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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인사이트] '한반도 비핵화 협상' 이번엔 마침표?

이용주 기자 기사입력 2018-03-16 17:33 최종수정 2018-03-16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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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돌이표' 비핵화 협상 이번엔 마침표를!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회담 합의까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국면입니다. 4~5월로 예정된 정상회담 시리즈를 앞두고 무엇보다 적지 않은 기대감이 앞섭니다. 동시에 ‘쉽지 않을 텐데’, ‘해봤자 뻔하지’ 하는 냉소와 비관이 깃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북한의 입장 변화를 환영한다’와 함께 ‘아직 믿지는 못하겠다’는 응답이 많이 나온 것도 불신의 골이 얕지 않음을 잘 보여줍니다.

냉소와 비관은 나름 합당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합의와 파기를 반복해온 북미 회담의 역사 때문입니다. 북한과 미국은 1992년 1월 첫 공식 고위급 접촉을 가진 이래 여러 차례 만났고, 여러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문제는 거기까지였습니다.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번번이 깨졌습니다. 여기엔 북한 스스로 자초한 면이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북한만의 책임일까요? 냉철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의 도돌이표 안에 갇히지 않을 테니까요.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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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양자회담 → 1994년 제네바 합의

북한 핵 문제는 1993년 3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시작됐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탈퇴 효력을 정지시켰습니다만,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요구에 북한은 패전국에게나 하는 특별사찰을 수용할 수 없다며 맞섰고, 남북접촉에서 그 유명한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오면서 전쟁위기가 번졌습니다. 미국이 북한 영변 폭격을 검토하던 때,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하면서 위기는 겨우 진정됐습니다. 고위급 회담에 나선 북미는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북한은 NPT 복귀와 핵물질·시설 폐기를, 미국은 관계정상화와 경수로 건설·중유 지원을 일괄 타결 방식으로 맞교환한 것입니다.

하지만 약속을 행동으로 옮기는 속도는 느렸습니다.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던, 에너지·식량난에 직면한 북한은 일종의 비상체제인 '선군정치'를 앞세우면서 대외적으로 경직돼갔습니다. 미국은 어땠을까요? 북한 체제가 이르면 3일 또는 3주, 늦어도 3년 안에 붕괴한다는 '333이론'이 당시 유행했는데, 미국은 결과적으로 신기루 같았던 이 전망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제네바 합의는 애당초 지키기 위한 게 아니었다는 미국 인사들의 최근 증언 역시 이를 뒷받침합니다. 1998년 북한의 광명성 1호 발사(한미는 당시 '대포동 미사일'로 규정)로 미사일 위기를 한 차례 겪고 난 뒤 북미는 2000년 공동코뮤니케를 통해 핵·미사일 문제와 관계정상화를 일괄타결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정권교체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부시 공화당 정부의 집권과 함께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은 무산됐고 결국 제네바 합의는 공식 파기됐습니다.
2005년 9·19 공동성명과 北의 1차 핵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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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회담 → 2005년 9·19 공동성명

부시 대통령은 '북한은 악의 축'이란 일성으로 임기 첫해를 시작했습니다. 북한과의 양자 대화를 거부한 건 당연한 흐름이었죠. 어렵사리 재개된 북핵협상은 6자회담이란 틀로 옮겨왔습니다. 북미에 한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까지 모여 앉은 6자회담은 2005년 9·19공동성명을 낳았습니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기로 했고요. 그 대신 미국을 비롯한 5자는 안전보장 제공과 북미·북일 수교, 평화체제 논의, 경수로 제공 등을 보장했습니다. 핵문제 해결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성과였죠.

그런데, 이번엔 합의 바로 다음 날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9·19성명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미국은 마카오에 있는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이 북한 '불법자금'을 세탁하는 곳으로 사용됐다며 제재를 발표했습니다. 사실이라면 벌을 받아 마땅한 사안이긴 하지만 미국이 내놓은 근거는 빈약했고, 북한이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분위기는 악화됐습니다. 2006년 7월 5일 새벽 북한은 대포동 2호를 비롯한 미사일 7발을 발사했습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에 딱 맞춘 모양새였죠. 석 달 뒤 북한은 1차 핵실험까지 단행했습니다. 강대강 국면 속에서 9·19성명의 동력은 좀처럼 생겨나질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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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의 동생들, 2007년 2·13합의와 10·3합의

사라지는 듯했던 동력이 다시 살아난 건 미국 국내정치의 상황 변화 때문이었습니다. 2006년 말 이라크 상황이 악화되면서 부시 정부는 '수렁'에 빠져있었는데, 이 여파로 중간선거에서 참패한 겁니다.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딕 체니 부통령 등 네오콘 그룹이 퇴진하거나 입김이 약화됐습니다. 쉽게 말해 강경파가 물러나고 대화파가 백악관을 주도하게 된 것이죠.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에 다시 나섰는데요. 그런데 6자회담이 아닌 북한과의 양자 대화였습니다. 속도 한 번 내보겠다는 의도였던 것이죠. 2006년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우리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셋이서 종전선언을 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2007년 2·13합의와 10·3합의는 북미 양자 대화의 결과를 6자회담에서 인정해주는 형식을 갖췄습니다. 핵시설 폐쇄·봉인의 대가로 중유 5만 톤 제공과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연말까지 불능화를 달성하면 중유 100만 톤에 달하는 에너지 지원을 약속한 겁니다. 모처럼 서로 약속을 지키는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북한은 2008년 6월 27일 영변 냉각탑을 폭파시켰고요. 핵 관련 3가지 시설의 11개 항목 중 8개, 즉 78% 정도의 불능화를 실제로 진행시켰습니다. 하지만 2008년 12월 핵사찰 검증 방법을 놓고 의견이 엇갈리면서 불능화 조치는 중단됐고,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6자회담은 열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 뒤로 2012년 2월 북미 양측은 식량을 지원하는 대신 미사일을 당분간 쏘지 않는다는 합의에 성공하기도 했는데요. 2012년 4월 북한이 발사한 로켓을 두고 미사일이다, 아니다, 인공위성이다 부딪히면서 이 합의도 파기의 운명을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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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

이후 북한은 핵개발을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지난해 9월 6차 핵실험에 이어 11월 ICBM급으로 알려진 화성-15형 발사에 성공하면서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새로운 합의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게 무리도 아닙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거죠. 합의는 죄가 없습니다. 단지 실천하지 않은 당사자들의 잘못이었습니다. 관건은 신뢰입니다. 거듭된 합의 파기는, 따지고 따져보면, 신뢰가 부족하다 못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죠. 최고 결정권자들 사이에 신뢰가 생기면 큰 틀의 담대한 합의도 얼마든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러려면 결국 만나야 합니다. 5월 북미 정상회담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돌고 돌아 제자리였던 비핵화 협상 이번에는 마지막이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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