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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기자이미지 제희원 기자

[뉴스인사이트] 죽음마저 가난으로 평가받는 사회

[뉴스인사이트] 죽음마저 가난으로 평가받는 사회
입력 2018-04-13 11:20 | 수정 2020-01-02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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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인사이트] 죽음마저 가난으로 평가받는 사회
    벼랑 끝에 선 '증평 모녀'가 손 내밀 곳은 없었습니다. 숨진 지 석 달이 지나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될 때까지도 이들 모녀의 위기 상황은 가족도 이웃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뉴스인사이트] 죽음마저 가난으로 평가받는 사회
    눈에 보이지 않는 가난의 그림자

    정 씨 모녀가 살았던 곳은 증평읍의 한 민간 임대 아파트입니다. 아파트 임대보증금은 1억 2천여만 원으로 공공 임대아파트보다는 훨씬 보증금이 많은 편에 속합니다. 집 말고도 정 씨는 1,500만 원 정도의 상가 임대보증금과 2005년식 화물차를 포함한 차량 석 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 모녀가 '송파 세 모녀'처럼 극단의 생활고를 겪은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이 제기됐습니다. 관할 관청에선 '복지 사각지대'라는 지적이 나오자마자 "가구실태 파악사항"이라는 자료를 내 숨진 정 씨의 세세한 자산과 부채 현황을 공개했습니다. 가구 부채 수준이 보유 재산과 엇비슷했고, 차량보유 대수와 상가 보증금 등으로 미뤄볼 때 '사업이 원활치 않아 남편이 자살한 후 두 모녀도 생활고로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도 덧붙였습니다.

    부채와 자산 규모 등 수치로만 보면 정 씨가 빚을 갚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 씨를 자꾸 주저앉게 했습니다. 사용처는 다 밝혀지지 않았지만, 주로 제2금융권과 대부업체 등 7개 금융권에서 빌린 돈은 차마 갚기 어려웠던 상황으로 추정됩니다. 그 사이 카드빚도 수천만 원이 쌓였습니다. 심마니 생활을 접은 남편과 함께 식당을 운영했던 부부. 하지만, 그마저도 얼마 안 돼 남편이 생계문제를 비관하며 숨지고, 정 씨는 어린 딸과 단둘이 남아 혹독한 빚 독촉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 사이 친정어머니도 사망하면서 정 씨는 정신적 어려움마저 홀로 감내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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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인사이트] 죽음마저 가난으로 평가받는 사회
    '초라한 반지하 방'이 아니면, '생활고'가 아닌가

    보건복지부와 증평군은 정 씨 모녀가 남편 사망 이후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도움을 요청했다면 긴급복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현행 기초생활보장제와 긴급복지지원제도가 규정하고 있는 소득, 재산 판정 기준으로는 지원에서 탈락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입니다. 무엇보다 이미 극한에 몰린 개인이 어떻게 해서든 본인의 곤궁함을 '소명'하는 방식으론 제도가 정말로 긴급한 위기 가정을 도울 수 있었다고 보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 때문에 송파 세 모녀가 다시 살아서 '세모녀법'에 도움을 청한다고 한들 혜택을 받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지요.

    가난의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합니다. 몸이 건강하고 일정 재산을 갖고 있더라도,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파악하는 게 바로 ‘사각지대의 해소’입니다. 국가가 할 일은 보다 적극적으로 위기에 몰린 이들을 살피고 끝끝내 ‘가난 대신 죽음’을 택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이며, 비로소 촘촘한 사회 안전망을 갖췄다 할 수 있을 겁니다. 증평 모녀 죽음에서 교훈을 찾으려면 통장에 남은 잔액과 쌓여 있던 채무를 저울질하는 게 아닌, 어디에도 문 두드릴 곳 없었던 두 모녀의 쓸쓸한 현실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뉴스인사이트] 죽음마저 가난으로 평가받는 사회
    위기가구 '발굴'보다 더 중요한 건…

    취재하면서 모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고민했습니다.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과 쏟아지는 빚 독촉도 어마어마한 압박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큰 벽은 연고 하나 없는 곳에 살면서 손 내밀 곳 하나 없는 막막함이 아니었을까요.

    '얘깃거리도 안 되는 단순한 변사'로 묻힐 뻔한 이번 증평 모녀의 죽음. 공기처럼 너무도 흔해진 무연고 죽음을 이제는 끊어낼 방법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요란한 일제 조사에 그치는 게 아니라 벼랑 끝에 몰린 누군가를 우리 사회가 책임질 수 있는 방향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입니다. 이 죽음은 생활고와 채무로 인한 고통, 손 내밀지 않았던 제도가 함께 만들어낸 사회적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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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어둠보다는 밝음에, 절망보다는 희망에 익숙하다. 그러나 새벽은 불빛에서 오는 게 아니라 어두운 하늘로 살며시 걸어 올라온다. 우리는 불빛에 의지하다 밤하늘로 걸어오는 새벽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이시우 작가의 <민통선 평화기행> 중 일부


    밤처럼 캄캄했을 현실 앞에 좌절했을 증평 모녀. 우리 사회가 물질적 빈곤을 넘어, ‘관계의 가난’까지 들여다봐야 할 이유입니다. 증평 모녀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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