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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인사이트] 12년 삶 앗아간 단 한 번의 판결…대법원의 거래

임소정 기사입력 2018-05-30 10:16 최종수정 2018-06-04 18:13
KTX 승무원 블랙리스트 양승태 대법원 박근혜 이명박 뉴스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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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택이 늘어선 고급 주택가엔 아침부터 새소리가 명랑했습니다. 고요하고 한가로웠습니다.
간밤 한 문건이 공개되면서, 어지럽혀졌을 사람들의 마음과는 극명히 대비되는 풍경이었습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 보고서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의 3차 조사보고서가 나온 게 지난달 25일, 그 이튿날 아침 양승태 전 대법원장 집 주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했습니다. 전날 밤 10시가 넘어 공개된 조사보고서엔 양승태 대법원이 일반 민사나 형사사건을 해결하는 ‘상고법원 설치’를 두고 청와대와 이른바 ‘재판 거래’를 한 의혹이 담겨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인생이 걸린 판결들이 줄줄이 나열돼있는 대외비 문건. 상고법원에 반대하는 판사들도 사찰대상이 됐다는 정황이 발견됐습니다. 전 사법부의 수장인 양승태 대법원장 재임 당시 진행된 일들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질문이 많았습니다. 초인종을 여러 번 눌렀습니다. 그는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대법원과 박근혜 정부 간 거래의 수단이 된, 많은 이들의 삶. 'KTX 승무원'의 판결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이틀 전, 그녀들은 다시 서울역 앞에 천막을 펼쳤습니다. 조사 결과를 보았냐고 입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아 머뭇거렸습니다. KTX 해고 승무원 김승하 씨는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며 먼저 운을 뗐습니다. 그리고 이내 "사법부마저 기댈 수 없는 세상"을 향해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 관련 영상 보기 [12년의 싸움 앗아간 단 한번의 판결(임소정)]


번복된 약속, 12년간의 싸움

12년. 이렇게 오래도록 싸움을 계속해야 할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20대의 사회초년생들은 이제 30대 후반이 됐습니다. 아직도 모든 건 제자리입니다.

1년 뒤 코레일의 정직원으로 채용한다는 홍보 영상을 보고, 부푼 마음으로 지원서를 냈습니다. 경쟁도 치열했습니다. 부모님은 공기업 직원이 됐다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하지만 1년 뒤, 회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모진 사람들은 처음엔 그들이 쉽게 정규직을 탐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더러우면 다른 직장을 찾으라 했습니다. 기나긴 싸움에 많은 친구들이 지쳐갔습니다. 280명은 34명으로 줄었습니다. 그래도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법과 약속을 어긴 건 저들이고, 우리가 옳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 하나로 12년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삭발, 쇠사슬 시위, 세 차례의 단식농성, 철탑 농성, 오체투지까지. '코레일의 직원'이란 단순한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안 해본 게 없습니다. 1,2심 법원은 그들의 노력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코레일의 직원이 맞고, 직접 고용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법원은 그동안 받지 못했던 월급도 한꺼번에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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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심은 뒤집은 대법원 판결

그런데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그 '법'이 그 기나긴 세월을 하루아침에 부정했습니다. 대법원은 KTX 승무원들이 서비스만 담당할 뿐 열차 안전 업무를 담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안전을 담당하는 열차의 차장은 코레일 직원, 서비스를 담당하는 승무원은 자회사 직원으로 업무가 철저히 구분돼있어 코레일이 이들을 직접 고용할 의무가 없다는 겁니다. 열차에 무슨 일이 발생해도 승무원은 안전 담당 의무가 없어 그냥 지나쳐도 된다는 이상한 논리의 판결이었습니다. 지급받은 월급도 이자까지 쳐서 뱉어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당 무려 1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었습니다. 판결이 있은 지 18일, 한 승무원이 세 살 아이를 두고 고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습니다. 세상을 향한 원망에, 승무원들은 동료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까지 떠안았습니다.

"청와대의 국정운영을 뒷받침"…재판 거래 의혹

법원행정처의 대외비 문건은 ‘KTX 승무원들을 코레일의 직원으로 볼 수 없다’고 한 대법원 판결을 두고 “VIP와 BH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는 차원에서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한 의미가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조사 결과를 발표한 대법원 특조단은 이런 문서가 존재했을 뿐 실제로 ‘재판 거래’를 했는지는 실체가 없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재판 과정 단계에서 외부의 개입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겁니다.

‘재판 거래’가 실제 있었는지는 철저히 진상을 규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와는 별개로 실제 그 거래가 있었든 없었든, 사람들의 소중한 삶이 걸린 재판을 대법원이 청와대와의 대화 거리로 삼으려 했던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지난 금요일(1일), 대외비 문건에 대해 “만나면 덕담을 하고 좋은 이야기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화젯거리가 있어야 되니 만든 말씀자료”라고 말했습니다.

무려 12년입니다. 그 사이 결혼을 한 승무원들의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어떤 단어로 이들의 잃어버린 세월을 다 담을 수 있을까요. 이런 기사를 쓸 때면, 단어의 얕음이 야속합니다. 화면 한 장면 한 장면, 무엇을 고르고 어떻게 붙여야 할까. 고민을 해도 답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문장과 편집으로도 그들이 지나온 시간들을 1분 30초 안에 충실히 담을 수는 없겠지요.

▶ 관련 영상 보기 [KTX 여승무원들 "대법원장 만나게 해달라"]


"법원이 법을 지켰으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다"

어제 대법원을 항의 방문한 승무원들을 막아서며 법원을 지키는 공무원들은 "법에 따라서 하셔야죠"라고 했습니다. 승무원들은 이에 "우리가 지금 법을 믿을 수 있는 상황"이냐 되물었습니다. 해고 승무원 김승하 씨는 법을 수호하는 기관 사법부를 향해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법원이 법을 지켰으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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