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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인사이트] 일본 최남단 섬 주민들이 '아리랑' 부르는 사연

[뉴스인사이트] 일본 최남단 섬 주민들이 '아리랑' 부르는 사연
입력 2018-09-18 17:34 | 수정 2019-12-3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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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인사이트] 일본 최남단 섬 주민들이 '아리랑' 부르는 사연
    오키나와 미야코 섬의 아리랑

    오키나와에서 300km 떨어진 일본의 최남단, 미야코 섬(미야코지마). 한 주민이 갑자기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같이 있던 주민들도 익숙하게 따라 불렀습니다. 명절 TV프로그램에서 외국인들이 부르는 어색한 아리랑이 아닌, '구슬픈 한이 담긴' 아리랑이었습니다. 주민들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배웠느냐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부르게 됐다고 합니다. 다른 주민들도 모두 똑같이 대답했습니다.

    집단적 기억

    미야코에서 85년째 살고 있다는 나가자토 키미 할머니도 어떻게 아리랑을 알게 됐는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일본군 '위안부' 언니들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매일 함께 아리랑을 부르고 놀았다고 회상했습니다. 키가 작고 까만 섬 사람들과 달리, 바다 건너온 '언니'들은 유난히 하얗고 날씬했다고 기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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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세인 요나하 히로토시 할아버지도 일본군 '위안부'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위안소 건물이 있던 장소로 데려가 당시의 기억을 구체적으로 들려줬습니다. 위안소는 초가지붕이었으며 그리 크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평일에는 장교급 간부들이, 또 주말에는 낮은 계급 사병들이 수 십 미터 길게 줄을 섰다고 증언했습니다. 빨래를 하고 들어갈 때마다 자리에 앉아 쉬면서 아리랑을 부르던 ‘위안부’들을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미야코 섬 주민들의 한

    미야코 섬을 비롯한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라는 독립 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1879년에 이르러 일본이 침략하면서 왕조가 무너지고 지금의 ‘오키나와 현’으로 편입됐습니다. 이후 일본은 오키나와 토박이 언어인 류큐어(語)를 쓰지 못하게 하며 주민들을 핍박했습니다. 2차 대전 당시에도 일본은 “위안부는 3등 국민, 오키나와 사람은 2등 국민으로 취급했다”고 주민들은 기억합니다.

    이렇다보니 미야코 섬 주민에게 일본군 '위안부'는 결코 '남'이 아니었습니다. 위안부 이야기에는 자신들의 고통과 부모가 겪은 아픔이 함께 녹아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었던 겁니다.

    주민들의 기억과 증언은 생생합니다. 먹을 게 없어 배를 움켜쥐어야 했던 자신과 군인에게 두들겨 맞던 자신의 아버지. 군부대에서 나온 먹을 것을 몰래 나눠준 마음씨 착한 한국인 위안부. 매운 것을 좋아하는 위안부를 위해 고추를 가져다주자, 위안부가 고추를 통째로 씹어 먹던 모습까지. 미야코 섬 주민들은 이 모든 것을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올렸습니다.

    더 충격적인 증언도 있습니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군은 군사 기밀을 모조리 파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군에겐 전쟁에서 살아남은 오키나와 원주민도 없애야 할 '증거'였습니다. 미군이 들어오면 기밀이 유출될까봐 주민들을 집단 자살시켰다고 합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미군이 들어오면 너희들은 노예가 될 것이다"라든가 "미군의 위안부로 살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하며 목숨을 끊도록 강요했다는 겁니다. 그때 겨우 살아남은 이들이 지금은 일본군이 저지른 전쟁 성범죄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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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와현은 1945년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엔 미군에게 점령당했다가 다시 1972년 일본에 반환됐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영토의 0.6%밖에 안 되는 오키나와 일대에 주일 미군 기지의 75%를 몰아넣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섬 곳곳에 자위대 기지까지 짓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이 기지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일본 본섬을 지키기 위한 것이고, 유사시에는 언제든 자신들을 버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가 동정이 아니라, 같은 아픔을 겪은 공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아리랑에 한이 서린 이유를 그제야 이해했습니다.

    기억의 기록

    미야코 섬 주민들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기억과 증언이 대대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자녀세대들에게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또 10년 전에는 자발적으로 일본군 '위안부'들이 쉬던 자리에 ‘아리랑 비’를 세우고, ‘여성들에게’ 라는 제목의 추모비도 만들었습니다. 참상의 기록을 위안부 피해를 입은 11개 국가 언어로 번역했고, 한국 군인에게 피해를 입은 베트남의 언어로도 남겨놨습니다.

    주민들은 참상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어머니를 통해 '위안부' 이야기를 전해들은 우에사토 키요미 씨는 "이야기를 대대로 전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것이 "자신들의 책임이자 의무"라고도 했습니다. '아리랑비'를 처음 만든 요나하 할아버지 역시 “자신들이 살 날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 기록을 통해 자손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위안소를 이용했던 군인들 중에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면, "더 늦기 전에 용기를 내서 증언을 하라"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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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코 섬 주민들의 노력은 일본군 '위안부'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십여 년 동안 '위안부' 연구에 몰두해 온 와세다 대학 홍윤신 박사는 "피해자 진술도 중요하지만 미야코 섬 주민 같은 목격자들의 증언이야말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중요한 증거"라고 강조했습니다. 동북아 역사재단 등 관련 연구자들의 도움으로 미야코 섬 취재를 간 저에게도 책임감이 느껴졌습니다. 기자는 인류의 일상을 기록하는 '미시 사학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미야코 섬 주민의 증언을 영상으로 남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케케묵은 옛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직도 진행 중인, 바로 지금의 이야기입니다. 피해 할머니들은 아직도 일본 정부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피해자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해결하도록 노력하라고 유엔이 권고했지만, 일본은 여전히 요지부동입니다. 일본 정부가 엄연한 역사적 사실까지 부정하며 뻔뻔하게 버티고 있는 사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한두 분씩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스무 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정녕코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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