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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훈칠의 맥스MLB] 조용한 '타격 장인' 에드가, 마지막에 웃다

[전훈칠의 맥스MLB] 조용한 '타격 장인' 에드가, 마지막에 웃다
입력 2019-02-01 15:25 | 수정 2020-09-15 09:56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은 특별하다. '쿠퍼스 타운'에 입성한 선수들에게 특출한 성적이나 화려한 경력은 필수다. 매년 베이스볼 아메리카에서 발행되는 '명예의 전당 연감'에는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낸 야구 천재들의 전설적인 스토리로 빼곡하다.

이런 식이다. "무하마드 알리가 자기 자신보다 더 존경한 유일한 사람"(행크 애런) "최고의 도루 성공률을 기록했고, 결국 1%만 허락하는 곳에 도달한 인물"(팀 레인즈). "타석과 수비에서 항상 최고였던 선수. 그에게 2라는 숫자가 붙는 경우는 포지션을 설명할 때뿐"(로베르토 알로마).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온갖 찬양 문구로 꾸며진 '명예의 전당 연감'을 훑어볼수록 화려한 수식어에 지칠 정도다.

그런 수식어와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선수, 에드가 마르티네스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무려 '10수' 만이다. 비인기팀 시애틀에서만 18년을 뛰어 월드시리즈 반지도 없고, 통산 성적 역시 일반적인 입성 지표로 여겨지는 3000안타나 500홈런과도 한참 거리가 있다. 첫 풀타임 시즌이 27살이었으니 어떤 기준으로 봐도 야구 천재도, 영재도 아니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덧붙이는 게 아니다. 에드가의 인생이 그 이상으로 어려웠고, 고난의 연속이었다. 프로 선수로 입문하는 순간부터 선수 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그랬다. 1963년 뉴욕에서 태어난 에드가가 가정사로 인해 푸에르토리코에서 성장한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11살 때 부모가 재결합하면서 뉴욕으로 돌아간 누나와 남동생과는 달리, 에드가는 고민 끝에 푸에르토리코에 남기로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곁에 있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자신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에 대해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아 막막했지만, 오직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 때문에 다른 모든 걸 눈감았다고 했다.

물론 로베르토 클레멘테를 흠모하며 야구에 빠져 지내던 당시의 생활에도 만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드가는 훗날 빅리거가 된 두 살 터울 사촌형 카멜로와 함께 야구에 심취했는데, 빗자루를 방망이 삼아 병뚜껑이나 돌멩이를 때려가며 수없이 스윙을 해댔고, 비라도 오는 날엔 처마 끝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에 빗자루를 휘둘러댔다고 한다. 이 시기의 에드가를 추억하는 기사 내용에 등장하는 단골 소재가 바로 이 '빗방울 타격'이다. 카멜로는 훗날 인터뷰를 통해 "병뚜껑을 치든 돌멩이를 치든, 심지어 물방울을 칠 때도 에드가는 같은 스윙을 유지하더라."고 했다.

프로 선수가 될 기회는 1982년에 찾아왔다. 푸에르토리코에서 시애틀 스카우트가 트라이아웃을 개최한 것이다. (1989년 이후 푸에르토리코 선수들은 정식 드래프트 대상에 포함됐다.) 당시 스무 살의 에드가는 직장을 다니며 야간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세미프로 리그 선수로도 뛰는, 건전하고도 알찬 삶을 살고 있었다. 제약 회사 공장과 가구 회사를 다니기도 했고, 밤에는 '제너럴 일렉트릭' 공장에서 교대 근무를 하면서 주말에 세미프로 리그에서 뛰었다.

당시엔 사촌형 카멜로에게 관심이 집중된 분위기였고 에드가는 프로 선수로 성공할 자신도, 욕심도 없었다. 에드가가 소속된 세미프로 팀의 구단주가 트라이아웃 참가를 적극적으로 권했지만 전날 당직 근무를 마친 에드가는 친구가 전화로 깨우지 않았으면 참가조차 하지 못할 뻔했다. 구단주가 장비까지 챙겨준 덕에 트라이아웃을 마친 에드가에게 스카우트는 4천 달러의 계약금을 내밀었다. (당시 스카우트는 타격이 아닌 수비에서 가치를 봤다고 한다.) 하지만 에드가는 당장 4천 달러를 받아봐야 금방 빈털터리가 될 거란 생각에 무시할 생각이었다. 벌이가 나쁘지 않은 상태였고 새 차까지 장만한 에드가에게 별다른 야심은 없었다. 직장을 다니고 공부를 하며 야구로도 소소하게 돈을 버는 삶을 포기할 정도의 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촌형 카멜로의 끈질긴 설득 끝에 시애틀과 정식 계약을 맺게 된다. 트라이아웃 참가부터 마지막까지 자신의 의지로 이뤄진 계약은 아니었다.

마이너리그 첫 시즌도 부진했다. 32경기에서 타율 0.173. 당시 시애틀의 단장 켈러는 이런 에드가를 유망주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빅리그에서 뛸 일이 없는 선수”로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스카우트의 간청으로 애리조나 교육리그 명단에 포함됐고, 여기에서 타격 재능을 발휘한 덕에 일단 마이너리그 생활은 지속할 수 있었다. 이후 꾸준히 성장해 트리플A까지 승격한 에드가는 87년에 0.329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빅리그 입성을 바라보게 됐다. 3루수로 장타력이 아쉽긴 하지만 정교한 타격에 준수한 수비는 인정받는 편이었다.

그런데 두 가지 문제가 생겼다. 하나는 오른쪽 눈이 간헐적으로 제 기능을 못하면서 사시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애틀 구단이 3루수 자리에 올스타 출신 짐 프레슬리 이외의 대안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시 증상은 에드가 자신의 노력으로 일정 부분 해결했다. 구단 담당 안과 전문의를 만나 매일 30분씩 눈을 집중 훈련시키는 운동법으로 효과를 봤는데, 당시 담당 의사는 노력으로 증세를 완화시킨 극히 드문 사례라고 했다. 하지만 주전 3루수 프레슬리의 문제는 시간이 걸렸다. 에드가는 이런 고민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걸 혼자 감내하는 성격이었다. 크게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마이너리그 생활에 적응해 만족감까지 들었다고 한다. 욕심 없는 에드가는 88년에 0.363, 89년에는 0.345의 고타율을 기록하고서야 90년부터 주전 3루수 자리를 얻었다. 만 27세였다.

92년에 첫 타격왕을 차지했다. 올스타에도 뽑혔고 실버슬러거도 수상했다. 이제 승승장구할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시련이 찾아온다. 햄스트링과 손목 부상으로 고생하면서 93, 94년 모두 긴 공백을 겪었다. 실력은 있지만 뭔가 애매해진 에드가를 잠시 트레이드 매물로 내놓기도 했던 시애틀 구단은, 고심 끝에 그의 타격 재능을 인정하고 결단을 내렸다. 에드가를 전문 지명타자로 전환하기로 한 것이다. 우려와 달리 에드가는 95년 두 번째 타격왕을 차지하며 '타격 장인'으로 거듭난다.
95년은 에드가와 시애틀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해였다. 8월 중순까지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 12경기 차 이상 뒤지다 시즌 막판 질주하며 창단 후 첫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디비전시리즈에서 만난 뉴욕 양키스에 먼저 2패를 당해 궁지에 몰렸지만, 에드가는 4차전에서 만루 홈런 포함, 2홈런 7타점으로 맹활약했고 5차전 연장 11회에 끝내기 2타점 2루타로 영웅이 됐다. 켄 그리피가 동물처럼 질주해 득점한 뒤 홈에서 동료들과 엉키는 그 장면은, 유튜브에 'The Double'을 입력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양키스에겐 뼈아픈 시즌이었다. 14년 만에 암흑기를 뚫고 가을 야구를 경험했지만 시애틀의 극적인 승리에 들러리만 섰다. 곧바로 주장 매팅리도 불운하게 은퇴했다. 이때 시애틀의 1루수였던 티노 마르티네스는 이듬해 양키스로 이적했는데, 양키스 스프링캠프에 도착하자마자 선수들의 인사가 예술이었다. "오, 티노, 반가워. 혹시 에드가를 상대하는 방법 혹시 알아?" 에드가의 야구 인생을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안타가 'The Double'인 이유다.
이렇게 꽃길만 걸으면 좋으련만, 99년 또 한 번의 난관에 봉착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시각 장애가 찾아온 것이다. 마이너리그 시절에는 양쪽 눈으로 균등하게 사물을 인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갑자기 투구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고 공이 머리나 얼굴에 맞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이대로 은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이너리그 시절 사시 극복에 도움을 줬던 담당 의사에게 긴급히 도움을 요청했고, 시각 집중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에드가에게 무수히 질문을 퍼부어 답변하는 동시에 시력 측정판을 읽게 하는가 하면, 무술 동작으로 공격을 시도해 에드가가 막게 하는 훈련까지 시켰다. 빠르게 날아오는 테니스공을 정해진 대로 인식하는 훈련도 시작했다. (에드가는 나중에 타격 머신에서 날아오는 테니스공 가운데 특정 숫자가 적힌 공만 때리는 식으로 훈련을 발전시켰다. 요즘은 이런 훈련이 다른 구단에서도 일반화됐다.) 모든 과정을 충실하게 소화한 에드가는 보통의 선수보다 시각 집중력이나 동체 시력에서 우수한 수치를 얻어냈다. 그리고 곧 타석에 돌아와 예전의 스윙을 해냈다.

오랜 진정성이 통했다고 해야 할까. 이런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에드가의 성품은 서서히 시애틀 팬들의 마음에 닿았다. 조용한 실력자의 모습이 오히려 ‘반전 재미’까지 유발했는지, 당시 시애틀의 구단 광고를 연출한 기획자는 "에드가가 등장한 광고는 반드시 히트했다"고 기억했다. 에드가는 자신이 재미있는 사람도 아닌데 왜 화제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지만. 에드가는 연봉 문제로도 사소한 잡음조차 일으킨 적이 없었다. 한 번은 시즌 종료 후 계약이 끝났다는 사실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어서 8시간 동안 자유계약 신분 상태로 방치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구단에 갈 생각이 없던 에드가는 다음 날 구단과 별일 없다는 듯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특히 1998년 랜디 존슨을 시작으로 켄 그리피 주니어와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매년 시애틀을 떠난 상황에서도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킨 에드가는 시애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철저했다. 특히 스윙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에 엄격했다. 어딜 가든 야구공을 쥐고 감각을 유지하는 게 투수의 미덕이라면, 어디든 야구 배트를 지니고 있는 에드가의 행동 역시 미덕이라 할만 했다. 집에서 키우는 개 이름도 스윙(Swing), 자신의 보트 이름도 시스윙(Seaswing)으로 붙였으니 말 다했다. 우아하고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에드가의 스윙이 훗날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스윙에 접목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일정한 웨이트 트레이닝과 달리기, 그리고 30분간의 눈 훈련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뉴욕 양키스와의 디비전시리즈에서 홈런 2방을 날린 4차전이 끝나고도 라커룸에서 사라져 정해진 시간만큼 사이클을 타고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다음 경기 생각에 몰두했다. 차에 함께 탄 아내가 이런 날은 웃어도 된다며 핀잔을 줄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그 다음 날은 말한 것처럼 'The Double'이 나온 그날이다.)

드러내지 않고 조용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꾸준했다. 만 38세가 될 때까지 규정 타석을 채운 시즌엔 모두 3할 타율을 기록했고 불혹의 나이에 7번째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치로와 함께 뛰는 동안 시애틀 팬들은 눈이 즐거웠다. 이치로가 천재적인 타격 달인의 모습으로 감탄사를 자아냈다면, 에드가는 타격에 통달한 스윙 예술가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줬다. 공교롭게 에드가의 은퇴 경기가 열린 2004년 10월 1일에 이치로는 조지 시슬러의 단일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을 넘어서며 두 거장이 교차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2003년과 2004년에 시애틀 감독을 지낸 밥 멜빈은 "에드가와 이치로만큼은 감독이 참견할 필요가 없는 선수였다"고도 했다.

시각에 장애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역대급 선구안을 갖춰 삼진(1202개)보다 볼넷(1283개)을 많이 기록했다. 통산 타율 0.312, 출루율 0.418, 장타율 0.515라는 수치는 가장 이상적인 타격의 지향점을 야구계에서 최종 합의한 숫자처럼 느껴진다. 2년 연속 50개의 2루타를 기록한 역대 9명 중 하나. 조 디마지오 이후 두 차례 이상 타격왕을 차지한 최초의 오른손 타자. 여기에 지역 사회에 기부와 봉사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도 수상했다. 이런 에드가를 예우하기 위해 시애틀 시는 2005년에 세이프코 필드 옆 도로의 이름에 '에드가 마르티네스 드라이브'라는 이름을 붙였다. MLB 사무국도 매년 가장 뛰어난 지명 타자에게 주는 상의 명칭을 '에드가 마르티네스 어워드'로 정했다.

"신께 감사드린다. 그가 은퇴해서." 마리아노 리베라는 에드가를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타자라고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자신을 두들긴 덕에 타율이 올랐으니 저녁을 사라고도 했다. 천하의 리베라를 상대로 19타수 11안타에 홈런 2개를 기록해 천적 이상의 존재로 군림한 것은 에드가를 '타격 장인'으로 인식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한 팀에서만 뛴 '타격 장인'의 이미지가 명예의 전당 득표에 도움이 됐을 수 있다. 단순 누적 수치보다 비율 기록을 중시하는 세이버메트릭스로 재평가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리피와 랜디 존슨의 홍보 활동도 영향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에드가의 명예의 전당 입성은 야구를 통해 삶의 가치를 반추할 수 있는 인물을 발굴한 것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시애틀 지역 언론 출신으로 현재 MLB.com 에서 활약 중인 그렉 존스는 에드가의 명예의 전당 입성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좋은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는 단순한 진리를 직접 확인한 것이 기쁘다."
공식 기자회견에서 에드가는 자신의 인생 여정이 이렇게 흐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누구에게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대신 명예의 전당 공식 행사가 열리는 7월까지 인사말을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이제 새롭게 발간될 '명예의 전당 연감'에서 화려함과 거리가 먼 에드가를 어떤 문구로 꾸며놓을지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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