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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훈칠의 맥스MLB] '빠던!' 방망이 날아갈 때마다 울려 퍼지는 함성

[전훈칠의 맥스MLB] '빠던!' 방망이 날아갈 때마다 울려 퍼지는 함성
입력 2020-05-11 12:20 | 수정 2020-09-15 09:51
KBO 리그 배트 플립의 전설, 양준혁

KBO 리그 배트 플립의 전설, 양준혁

어느 정도 화제가 될 것이란 예상은 했다. 그래도 이미 진부해진 소재로 생각해 이 정도까지 관심이 쏠릴 줄은 몰랐다. KBO리그가 스포츠 전문 채널 ESPN을 통해 생중계되면서 미국 야구팬들의 집중 관심을 받고 있는 배트 플립, 이른바 '빠던' 얘기다. (속칭 '빠따 던지기'를 줄여 부르는 빠던은 팬들에게 이미 굳어진 말이지만 공식 용어도 아니고 올바른 표현도 아니어서 가급적 '배트 플립 (bat flip)'으로 표현한다.)
ESPN에서 주목한 모창민의 1호 배트 플립

ESPN에서 주목한 모창민의 1호 배트 플립

야구라는 정적인 스포츠에서 가장 화끈한 볼거리인 홈런, 거기에 화려함을 극대화하는 장치가 바로 배트 플립이다. 타자가 투구를 받아친 뒤 배트를 허공에 날려 보내는 동작과, 그렇게 날아간 배트의 비행 궤적이 포함된 개념이다. 선수의 타격 자세가 반영돼 각자의 개성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국내 팬들은 오래전부터 배트 플립을 선수들의 개인기로 즐겨왔다.

동시에 배트 플립은 논쟁의 대상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일상인데 메이저리그에서는 금기 행위라는 게 핵심이었다. 메이저리그의 역사와 수준이 한발 앞선다는 것 때문에 배트 플립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로 여겨진 적도 있다. 사소한 문화 차이라 인식하기도 했고 야구를 대하는 자세의 옳고 그름으로 구분하는 과도한 의견까지 있었다.
가장 화제였던 바티스타의 배트 플립

가장 화제였던 바티스타의 배트 플립

미국에선 여전히 이런 분위기가 남아있다. 메이저리그 16년 경력의 마크 데로사는 작년 한 방송에 출연해 "배트 플립은 투수를 존중하지 않는 행위여서 위협구를 얻어맞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야구의 특성상 투수는 마음만 먹으면 타자에게 보복 행위가 가능해서 투수를 자극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호세 바티스타 사건'이다. 2015년 토론토 소속이던 바티스타는 아메리칸리그 디비전시리즈에서 과도한 배트 플립을 펼쳐 크게 주목받았다. (해당 장면을 소재로 한 상품이 나올 정도였다.) 상대팀 텍사스는 해를 넘겨 보복 행위를 했고 곧바로 격렬한 물리적 충돌이 빚어졌다.
바티스타 사건을 소재로 한 상품

바티스타 사건을 소재로 한 상품

2016년 시애틀에서 뛰었던 이대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따로 구단 차원에서 조언을 들었다고 했다. "배트 플립을 하게 되면 나뿐 아니라 동료가 피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과연 배트 플립은 한국 야구에서만 별 탈 없는 문화일까?

타자가 타격 후 배트를 던지는 것 자체는 야구 경기 중 언제 어느 나라에서나 나올 수 있는 행위이다. 동영상으로 확인 가능한 20세기 중반 이후의 메이저리그 경기 자료에서 타격 후 배트를 던지는 장면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가운데 현재 기준으로 배트 플립처럼 보이는 장면도 있다.
시애틀에서 뛰던 시절의 이대호

시애틀에서 뛰던 시절의 이대호

다만 지금 말하는 배트 플립은 타격 후 별도의 세리머니로 작동하는 방망이의 움직임에 한정해야 맞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방망이가 날아가더라도 따로 분류할 만큼 독립적인 행위였다고 보기 어렵다. 일단 용어부터 그렇다. 1989년 처음 발간된 이후 현재 3판까지 나온 '딕슨 야구 사전'에서 '배트 플립(bat flip)'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플립(flip)'이라는 단어는 등록돼 있지만 배트 플립과는 전혀 무관한 용어다. 수비수가 공을 잡아 토스하는 동작이나 투수의 특정한 투구를 일컫는 말로 정의돼 있다.

특정 리그에서만 따로 이름 붙일 만큼 집중적으로 나타난다면 의도성을 따져볼 수 있다. 간혹 기회가 닿을 때 선수들에게 묻곤 했지만 배트 플립을 '일부러 한다'고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배트 플립의 대명사로 불리는 롯데의 전준우도 최근 MBC와의 인터뷰에서 "배트 플립을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고 저도 모르게 나오는 행동"이라고 했다. 외국인 선수가 자신의 배트 플립을 칭찬한 적이 있긴 해도 오히려 의식하다 보면 배트 플립이 더 안 될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것을 계기로 한국 야구가 세계에 알려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전준우는 간결한 동작으로 배트 끝에 발동을 걸어 공중에 큰 풍차를 만들어내는 독보적인 운동에너지 전달 기술을 지녔다.)
독보적인 배트 플립 기술자, 전준우

독보적인 배트 플립 기술자, 전준우

타자 전원을 심문하지 않는 이상 객관적으로 속내를 측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개인적으로는 선수들이 '굳이 자제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트 플립을 멋들어지게 연출한다고 단정까지는 못해도 최소한 애써 참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근거가 있다. 키움의 간판 타자 박병호는 한국 배트 플립의 장인 계보를 잇는 선수로 평가받았다. 애당초 홈런 생산 능력 자체가 KBO리그 역대급인 박병호는 대포 한 방, 한 방의 비거리도 상상을 초월하는 선수다. 여기에 예술 점수를 부여해도 무방한 수준의 배트 플립까지 일품이었다. 적어도 2014년까지는 그랬다.

2015년의 박병호는 달랐다. 타격 마무리 동작을 그의 성품에 걸맞도록 겸손한 자세로 바꿨다. 역동적으로 뿌려진 배트가 공중에서 720도 이상 회전하는 모습이 사라졌다. 이유가 있었다. 2015년 시즌 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것이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에서 예술 점수를 기대했다가는 물리적인 보복 행위를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조언을 같은 팀 외국인 선수들로부터 받은 뒤였다. 일부러 안 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반대도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미국에서 배트 플립을 자제했던 박병호

미국에서 배트 플립을 자제했던 박병호

심재학 MBC 해설위원은 '딱 보면' 안다고 했다. 공을 때리고 배트를 놓기까지 손목을 관찰했을 때 여분의 동작이 나타나는지가 핵심이라고 했다. 선수 출신 전문가의 눈으로는 말 그대로 '멋 부리는 손목'을 포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국내에서도 처음부터 아무렇게나 받아들여진 건 아니다. KT의 이강철 감독은 양준혁 해설위원이 1993년 데뷔하던 때를 기억했다. 자신이 해태에서 뛰던 시절, 삼성 신인 양준혁의 과감한 배트 플립은 상대에게 지나치다는 인상을 줬다고 했다. 다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당시 삼성 고참 선수들이 직접 찾아와 "얘가 어리고 그러니까 잘 모르고 그런 거니 이해해주라"고 양해를 구하면서 일이 커지지는 않았다고 했다. 사실 홈런을 맞은 투수 입장에서는 배트 플립까지 지켜볼 여유가 없다는 현실적인 말도 했다.
배트 플립이 자유로웠던 WBC 무대

배트 플립이 자유로웠던 WBC 무대

경기장 분위기가 배트 플립의 해석을 좌우하는 요소일 수 있다. 치맥에 응원가를 부르며 치어리더와 함께 즐기는 야구는 KBO리그만의 특징이다. (무관중 경기가 해제돼 응원 문화까지 미국에 생중계되면 더 큰 반향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도 있다.) 경기장 전체가 흥겨운 분위기에 휩싸이면 배트 플립도 세리머니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2017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은 로스앤젤레스와 샌디에이고, 마이애미 등 미국 여러 곳에서 열렸는데 현역 메이저리거가 대거 출전한 경기였음에도 배트 플립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국가대표 경기가 흔치 않은 야구에서 정규 시즌의 엄숙함을 잠시 내려놓은 선수들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다양한 세리머니로 자국 관중들을 열광시켰다. 사람의 차이보다 분위기의 차이가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사례다.

SK의 외국인 타자 로맥을 봐도 그렇다. 로맥은 한국에서 배트 플립을 부담없이 즐기는 선수다. "경기장에서 팬들이 큰 소리로 노래하고 함성을 지르는 것 자체가 미국에선 볼 수 없는 광경"이라면서 배트 플립도 비슷한 요소라고 했다. 심지어 KBO리그 첫 시즌 때는 자신의 배트 플립 기술이 좋지 않았는데 해를 거듭하면서 점점 발전하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한국에 온 뒤 배트 플립이 생긴 로맥

한국에 온 뒤 배트 플립이 생긴 로맥

메이저리그에서도 배트 플립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는 건 분명하다. 빈도를 정확하게 산출할 수는 없지만 최근 3~4년 사이에 부쩍 늘었다고 주장해도 무리가 없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야시엘 푸이그는 물론이고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팀 앤더슨, 은퇴한 데이비드 오티스 등이 메이저리그에서 배트 플립으로 종종 언급된 선수들이다. 다만 KBO리그 기준으로 보면 작위적이고 과장된 동작이어서 썩 만족스럽지 않다. 간혹 알폰소 소리아노처럼 KBO리그와 유사한 방식의 부드러운 배트 플립을 했던 선수도 있다. MLB 유튜브 공식 계정에도 ‘역대 최고의 배트 플립 50선’이 등록돼 있는데 팬들의 반응은 전체적으로 우호적인 편이다.

개인적으로는 '컷포(Cut4)'의 역할도 있었다고 본다. 컷포는 메이저리그 공식 사이트에 포함된 여러 코너 중 하나다. 기상천외한 수비, 파울볼을 기막히게 잡아낸 관중, 그 밖에 경기 중 일어나는 재미있는 콘텐츠를 다양하게 수록한다. '컷포'는 미국이 아닌 곳에서 일어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소개하는데 과거 황재균, 전준우, 정훈 등의 배트 플립을 업로드한 것이 미국 내에서 화제가 된 것은 물론 배트 플립에 대한 찬반 토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해당 선수가 '월드 스타'가 됐다며 국내에 다시 기사화되곤 했다.
ESPN에서 본격 소개한 배트 플립

ESPN에서 본격 소개한 배트 플립

2016년 ESPN에서 한국 야구의 배트 플립을 탐사 취재한 기사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한국 야구장의 분위기와 선수들의 반응을 직접 취재하면서 배트 플립의 원조를 탐문하다 양준혁 해설위원까지 찾아가 인터뷰한 기사는 야구팬들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한국 선수들의 배트 플립 자세를 세밀하게 표현한 애니메이션은 물론 집요한 탐구 정신까지 반영된 해당 기사는 최근 ESPN의 KBO리그 생중계와 맞물려 다시 한 번 대대적으로 알려졌다. ESPN의 야구 전문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제프 파산도 KBO리그의 배트 플립에 완전히 심취돼 있는 인물이다. 이렇게 현지 언론까지 가세해 홍보에 나서면서 '배트 플립을 보기 위해 KBO리그를 본다'고 말하는 미국 야구팬들이 급속도로 늘어난 게 현재 상황이다.

야구만큼은 미국 사대주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태권도에서 우리가 세계 최고인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었다. 야구는 각 플레이 하나하나가 점과 점으로 이어져 한 경기 전체의 선을 형성한다. 메이저리그가 한국 야구보다 한 수 위라 해서 한국 야구 경기 안의 수많은 점이 모두 메이저리그의 점들보다 열등한 것은 아니다. 좋고 나쁨을 따질 수 없는 수많은 점들도 존재한다. 배트 플립도 그 중 하나다. 평균 구속과 회전수, 타구 속도로 리그의 우열을 수치화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배트 플립은 아니다. 일단 재미있고, 볼수록 멋지다. 결정적으로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일반적인 배트 플립이라면 엄숙할 이유가 없다. 한 야구팬은 이런 말을 남겼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최소한 배트 플립 분야에서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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