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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태봉 원형 복구[함명철]

중종 태봉 원형 복구[함명철]
입력 1987-09-21 | 수정 1987-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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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 태봉 원형 복구]

    ● 앵커: 지금으로부터 495년전인 1492년 조선조 11대 임금인 중종에 탯줄을 묻었던 태봉이 경기도 가평 부근 가평읍 태봉에서 발견되서 오늘 원형대로 복원이 됐습니다.

    ● 기자: 먼 옛날 왕후가 왕자나 공주를 나으면은 탯줄을 결코 소홀히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산서에 좋은 산 봉우리에 터를 잡고 이처럼 근 바위로 석함을 만들어 태를 넣은 뒤에 땅속 깊이 파 뭍고 그 위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이 석함은 495년전인 1492년 조선조 11대 임금 중종에 어머니 정현 왕후가 중종을 낳고 그 태를 넣었던 것인데 부장품이 도굴당하고 석함만이 남아있는 것을 마을 주민들이 그동안 관측해오다 원형대로 복원 한 것입니다.

    화강암으로 만든 석함은 몸체와 뚜껑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안쪽을 직겨 70cm, 깊이를 1m20cm 정도로 파고 밑부분은 항아리가 들어 앉을 정도로 홈을 팠습니다.

    그래서 태를 묻을 때는 땅을 2m정도로 파 먼저 석함 몸체를 앉히고 태가 들어있는 2중 백자 항아리를 넣었습니다.

    ● 인터뷰: 여기에 태를 넣고 뚜껑을 덮고 다시 큰 태항아리에 안에다가 이걸 넣습니다.

    그리고 이 안에 석함안에 넣습니다.

    ● 기자: 또 백자 항아리 옆에는 지석을 세우고 돌 뚜껑을 덮은 뒤 흙을 덮고 지대석을 깔아 비석을 세웠습니다.

    중종에 태는 생후 4년 뒤인 홍치 5년 즉 1492년 9월 2일 밤 10시 이곳에 묻었다는 기록이 응각되어 있는데 중종이 직위한 다음 해인 1507년에 거북평 비좌에 비신을 다시 세웠습니다.

    기록에 따르면은 왕족에 태장 제도는 왕권이 몰락한 조선조 말까지 이어졌는데 태를 운반 할 때는 수백명에 군사가 회위하고 안태사까지 임명해서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 강대욱(연구관): 그 다음 태어난 아이가 이 태를 잘 묻음 으로써 현명하느냐 어리석느냐 또는 번성하느냐 또는 쇠퇴하느냐, 귀인 여부도 바로 태를 잘 처리하는데 달렸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왕족에 태를 묻을때는 반경 5km까지에 눈밭을 몰수해서 원성을 사는등 민폐가 적지않았기 때문에 조선 선종 이후에는 산에 묻기 시작했고 그래서 생긴 태봉은 전국에 41개소가 남아있는데 일제때 도굴당하고 파손되서 서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 인터뷰: 11살 인가 12살 때 봤어요. 내 눈으로 똑똑히 봤죠. 가방들을 가지고 와서 왜놈들이 캐가지고 갔어요.

    ● 기자: 한편 학회에서는 가평군이 복원한 중종 대왕에 태봉은 석함이나 비석, 8각 난간석등이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역사 유물로써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MBC뉴스 함명철입니다.

    (함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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