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뉴스데스크

일제의 강점이후 훼손 거듭되었던 남산의 수난 92년사[홍성욱]

일제의 강점이후 훼손 거듭되었던 남산의 수난 92년사[홍성욱]
입력 1990-08-17 | 수정 1990-08-17
재생목록
    [일제의 강점이후 훼손 거듭되었던 남산의 수난 92년사]

    ● 앵커: 이어 일제의 강점 이후 훼손을 거듭해왔고 광복 이후에도 행정권 남용 등으로 수난을 겪어온 민족의 명산 남산 남산의 수난 92년사를 홍성욱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 기자: 지금은 소나무가 그리 많지 않은 남산은 본래 애국가 가사에도 나타났듯이 소나무가 늘 푸르는 산이었습니다.

    높이는 해발 265미터로 그리 높지 않지만 성종 때에는 유명한 풍류 왕족인 월산대군이 목멱상화 즉 꽃구경이라는 시를 지을 정도로 꽃이 유명했고 세종 때는 문인 정이호가 남산 타령이라는 시로 8군데의 명승을 노래할 정도로 계곡의 풍치가 빼어났습니다.

    풍수지리설의 두 산인 북악산의 대응하는 안산으로써 남산은 북악산과 함께 나라의 안녕과 태평성대를 비는 성산이기도 했습니다.

    ● 박경용연구간사(서호시사 편찬 위원회): 한강이 우지의 젖줄이라고 한다면 이 남산은 지금도 서울의 하나의 폐와 같은 즉 허파와 같은 그러한 역학을 하는 곳이 바로 남산이라고 생각합니다.

    ● 기자: 그러나 남산은 구한말 일본이 현 장충동 공원자리에 을미사변 순국장병 사당주의 소나무를 베어재고 벚꽃 수천그루를 심어 사당 건립의 뜻을 무색하게 하면서부터 수난이 시작됐습니다.

    특히 50년대에는 전쟁 뒤의 혼란과 행정권의 남용으로 공원 면적 잠식현상이 두드러져 57년 이태원 일대 3만 3천 평방미터가 외국인 주택단지 명목으로 공원에서 풀려났고 58년에는 동국대학교가 당시 백성욱 총장을 총애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승낙으로 세워졌습니다.

    70년대 들어서는 정경유착 등으로 재벌들의 호텔 건립 붐이 일어나 71년부터는 하얏트 호텔이 75년부터는 호텔 신라가 남산의 경관을 가려 시민들에게 가까우면서도 멀고 아름다우면서도 흉측한 곳으로 변해버렸습니다.

    MBC 뉴스 홍성욱입니다.

    (홍성욱 기자)

    당신의 의견을 남겨주세요

      인기 키워드

        취재플러스

              14F

                엠빅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