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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6월 23일 나항윤 대법관의 참모습[이호인]

1971년 6월 23일 나항윤 대법관의 참모습[이호인]
입력 1993-07-03 | 수정 1993-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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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6월 23일 나항윤대법관의 참모습]

    ● 앵커: 대법원 오늘 5일 대법관 회의를 열고 소장 판사들의 개혁 요구는 일부 수용을 하되 수뇌진과 정치는 판사의 퇴진 요구는 수용하지 않는 선에서 이번 사태를 수습하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한편 대한변호사협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도 오는 5일 각각 회의를 갖고 정치 판사 명단 공개와 무소신 판결 백서 발간 등 소장 판사의 개혁 요구에 부응하는 방안을 논의할 방침입니다.

    사법부 개혁을 둘러싼 파문이 계속되고 있는 오늘 황폐라는 판결이라는 방패 뒤에 숨지 않고 법관의 본령을 판결로 보여준 한 법조인을 이호인 기자가 소개하겠습니다.

    ● 기자: 1971년 6월 23일, 사법부의 조용한 혁명이라고까지 표현된 대법원 판결이 나항윤 대법관 주심 아래 내려졌습니다.

    권위주의적인 정치권력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4년여의 진통 속에 내려진 3공화국 수립 이후 첫 위헌 판결이었습니다.

    ● 나항윤(변호사, 당시 주심 대법관): 위헌이라는 것이 아무도 이의가 없었다고요, 거의.

    그런데 이제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거기에 아부한 거지.

    그런데 우리가 법관으로서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위헌이냐 합헌이냐 할 수는 없잖아요.

    ● 기자: 문제의 법률은 국가 배상법 2조 1항과 법원 조직법 59조.

    당시 언론은 판결이 사법부를 묶어 놓은 사슬을 스스로 풀고 입법부 견제 기능을 발휘한 혁명이라고까지 보도했습니다.

    그러한 사안이 중대했던 만큼 결정 과정에는 회유와 압력이 많았었다고 당시 주심을 맡았던 나항윤 대법관은 회고합니다.

    ● 나항윤(변호사, 당시 주심 대법관): 저한테도 몇 사람이 왔어요.

    몇 사람이 와 가지고 나 좀 봐 달라.

    ● 기자: 2년 뒤 유신 헌법 아래 정부는 법관 재임용 심사를 도입했고 당시 자의적인 심사에서 탈락된 56명의 법관 명단에는 이 위헌 판결에 찬성 의결을 냈던 나 변호사 등 9명의 대법관 이름이 들어 있었습니다.

    ● 나항윤(변호사, 당시 주심 대법관): 그러니까 그때 사법부 독립을 말살시키자 하는 방법이에요, 그게.

    내 말 안 들으면 다 친다, 이거죠.

    ● 기자: 사법부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내렸던 소신 판결.

    그러나 이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법부를 떠나야 했던 노 법조인은 법관의 참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 나항윤(변호사, 당시 주심 대법관): 소위 정치 판사가 되지 마라 그거죠.

    소신대로 해라, 그거예요.

    MBC뉴스 이호인입니다.

    (이호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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