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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파공작원]선갑도 30년전 또다른 북파 공작부대 실체 확인[박찬정]
[북파공작원]선갑도 30년전 또다른 북파 공작부대 실체 확인[박찬정]
입력 2004-01-12 |
수정 2004-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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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섬 선갑도]
● 앵커 : 뉴스데스크는 그 동안 1급 군사비밀로 분류되었던 북파공작원의 실체를 관련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다섯 차례에 걸쳐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37년 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또 하의 실미도, 선갑도의 비밀을 파헤쳐 봅니다.
박찬정 기자입니다.
● 기자 : 1968년 1·21사태.
● 김신조(당시 기자회견) : 저희 31명의 임무는 박정희 모가지 뗄 임무고…
● 기자 : 무장공비 31명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북파특수부대 창설의 도화선이 됐습니다.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사건.
서울로 진입하던 북파 특수요원 23명이 군과 대치하다 자폭했고 살아남은 4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특수임무를 띠고 여러 차례 휴전선을 넘나든 육군 첩보부대 중사 출신 최우보 씨.
인천에서 75km 떨어진 덕적도서 배를 갈아탄 지 30여 분.
멀리 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 인터뷰 : 저기 보이는 게 선갑도야.
저기 보이는 게 선갑도라구.
● 기자 : 베일 속에 철저히 가려져 있던 무인도.
34년 만에 선갑도를 찾은 최 씨는 지난 1968년 여름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 최호구(선갑도 교관) : 아이구, 죽었구나 싶었지.
특히나 죄수들을 데리고 왔으니까.
이거 엄청난 문제다.
내 직감적으로 느꼈어.
● 기자 : 함께 내린 사람들은 안양교도소에 복역하던 12명의 장기수들.
북파 특수임무를 마치고 살아 돌아올 경우 남은 형기를 면제받는 조건이었습니다.
● 안양교도소 관계자 :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68년 7월 5일 날 나간 사람들이… 우리 기록상에선 집행정지로 출소한 거예요.
● 최호구(선갑도 교관) : 선갑도야, 잘 있었나.
● 기자 : 기억 저편에 있던 30여 년의 세월이 바로 어제처럼 되살아납니다.
● 최호구(선갑도 교관) : 제일 처음에 들어와서 이 백사장에, 이게 한 백 미터 안되겠나.
살랑살랑 구보를 시켰어.
7월 중순이고 굉장히 더울 때 아니야.
다 주저앉더라구.
바닷물에 밀어 넣었지.
● 기자 : 모래언덕 한 켠에 녹이 슨 훈련막사 잔해가 눈에 띕니다.
식수원이었던 우물터도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 최호구(선갑도 교관) : 물 참 좋아.
말도 못하게 좋다구.
물 콸콸 나온다 아이가.
● 기자 : 당시 선갑도에는 4개의 막사와 무기고, 사격장과 우물터가 있었습니다.
혹독한 훈련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습니다.
● 최호구(선갑도 교관) : 저쪽 계곡이 있죠.
소나무 두 그루 있는데, 계곡으로 내려와서 중간선을 따라서 V자 계곡 있죠.
거기 넘어 백사장까지 7번을 왔다 갔다 하는 거야.
그럼 10킬로야.
● 기자 : 몸에는 30kg의 모래배낭, 양쪽 다리에는 5kg의 모래주머니를 단 채 10km의 산악을 한 시간 안에 달려야 했습니다.
1968년 여름, 서해의 고도 선갑도에서 이후 4년 동안 군장기수 40여 명은 대규모 침투공작을 수행하기 위해 북파 특수요원들로 길러집니다.
MBC뉴스 박찬정입니다.
(박찬정 기자)
● 앵커 : 뉴스데스크는 그 동안 1급 군사비밀로 분류되었던 북파공작원의 실체를 관련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다섯 차례에 걸쳐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37년 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또 하의 실미도, 선갑도의 비밀을 파헤쳐 봅니다.
박찬정 기자입니다.
● 기자 : 1968년 1·21사태.
● 김신조(당시 기자회견) : 저희 31명의 임무는 박정희 모가지 뗄 임무고…
● 기자 : 무장공비 31명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북파특수부대 창설의 도화선이 됐습니다.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사건.
서울로 진입하던 북파 특수요원 23명이 군과 대치하다 자폭했고 살아남은 4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특수임무를 띠고 여러 차례 휴전선을 넘나든 육군 첩보부대 중사 출신 최우보 씨.
인천에서 75km 떨어진 덕적도서 배를 갈아탄 지 30여 분.
멀리 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 인터뷰 : 저기 보이는 게 선갑도야.
저기 보이는 게 선갑도라구.
● 기자 : 베일 속에 철저히 가려져 있던 무인도.
34년 만에 선갑도를 찾은 최 씨는 지난 1968년 여름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 최호구(선갑도 교관) : 아이구, 죽었구나 싶었지.
특히나 죄수들을 데리고 왔으니까.
이거 엄청난 문제다.
내 직감적으로 느꼈어.
● 기자 : 함께 내린 사람들은 안양교도소에 복역하던 12명의 장기수들.
북파 특수임무를 마치고 살아 돌아올 경우 남은 형기를 면제받는 조건이었습니다.
● 안양교도소 관계자 :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68년 7월 5일 날 나간 사람들이… 우리 기록상에선 집행정지로 출소한 거예요.
● 최호구(선갑도 교관) : 선갑도야, 잘 있었나.
● 기자 : 기억 저편에 있던 30여 년의 세월이 바로 어제처럼 되살아납니다.
● 최호구(선갑도 교관) : 제일 처음에 들어와서 이 백사장에, 이게 한 백 미터 안되겠나.
살랑살랑 구보를 시켰어.
7월 중순이고 굉장히 더울 때 아니야.
다 주저앉더라구.
바닷물에 밀어 넣었지.
● 기자 : 모래언덕 한 켠에 녹이 슨 훈련막사 잔해가 눈에 띕니다.
식수원이었던 우물터도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 최호구(선갑도 교관) : 물 참 좋아.
말도 못하게 좋다구.
물 콸콸 나온다 아이가.
● 기자 : 당시 선갑도에는 4개의 막사와 무기고, 사격장과 우물터가 있었습니다.
혹독한 훈련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습니다.
● 최호구(선갑도 교관) : 저쪽 계곡이 있죠.
소나무 두 그루 있는데, 계곡으로 내려와서 중간선을 따라서 V자 계곡 있죠.
거기 넘어 백사장까지 7번을 왔다 갔다 하는 거야.
그럼 10킬로야.
● 기자 : 몸에는 30kg의 모래배낭, 양쪽 다리에는 5kg의 모래주머니를 단 채 10km의 산악을 한 시간 안에 달려야 했습니다.
1968년 여름, 서해의 고도 선갑도에서 이후 4년 동안 군장기수 40여 명은 대규모 침투공작을 수행하기 위해 북파 특수요원들로 길러집니다.
MBC뉴스 박찬정입니다.
(박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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