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뉴스데스크
기자이미지 홍신영

쉬쉬했던 '미군 위안부'…이제야 보듬는 '상처'

쉬쉬했던 '미군 위안부'…이제야 보듬는 '상처'
입력 2018-09-11 20:44 | 수정 2018-09-11 20:58
재생목록
    ◀ 앵커 ▶

    우리에게는 잊혀진 역사일지 모릅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주한 미군 기지 곁에 살던 미군 위안부 여성들.

    극심한 가난에 성매매로 내몰려서 '양공주'라는 멸시 속에 숨죽여 살던, 이제는 고령이 된 여성들이 그 삶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공연 무대에 섭니다.

    홍신영 기자가 다녀왔습니다.

    ◀ 리포트 ▶

    "안녕하세요! (웃음)"

    웃으며 서로 눈을 맞추기까지 5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연극을 시작하면서 생긴 변화입니다.

    정해진 대본은 없습니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하나 둘 꺼내집니다.

    [김숙자/기지촌 피해 할머니]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이 하고 싶으세요?" "..."

    미군 기지촌을 떠나지 못한 '미군 위안부' 세 할머니가 주인공입니다.

    [김경희/기지촌 피해 할머니]
    "생계 때문에 못살고 하니까 돈 벌러…. (연극 시작할 때는) 울컥하고 좀 힘들었지."

    이번 무대가 처음은 아닙니다.

    시작은 치유였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들의 삶은 역사였고, 기억하기 위해 무대에 올렸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가 주도했던 기지촌 정화사업.

    당시에도 성매매는 불법이었지만 대통령 직속 '정화위원회'는 이들을 '미군 위안부'라 부르며 관리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우리나라의 애국자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외국분들을 위해 여러 가지 애쓰셔서…."

    포주들은 여성들에게 향정신성 약물을 먹였고.

    "그거 먹으면 또라이 된다!"

    성병 치료 과정에서 숨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김숙자/기지촌 피해 할머니]
    "관리는 나라에서 했잖아요. 나는 606호(매독 치료약) 맞으면서 죽은 여자도 봤어요."

    '양공주'라는 사회적 멸시 속에 가족과도 연을 끊고 홀로 지내온 할머니들.

    [권향자/기지촌 피해 할머니]
    "나는 빈 껍데기가 된 거죠. 왜냐하면 돈을 다 거기(가족)로 줬는데…. 사람 취급도 못 받았잖아요."

    올해 법원은 미군 위안부의 존재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위자료 지급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진실규명과 생활안정 지원을 담은 법률안은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입니다.

    MBC뉴스 홍신영입니다.

    당신의 의견을 남겨주세요

      인기 키워드

        취재플러스

              14F

                엠빅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