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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은 적" 새긴 공수부대…결국 광주에서 실행

"시민은 적" 새긴 공수부대…결국 광주에서 실행
입력 2019-04-22 19:44 | 수정 2019-04-22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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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앵커 ▶

    이렇게 신군부에게 시민들은 적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5개월 뒤 일어난 광주 민주화 운동은 무엇이었을까요?

    '부마 항쟁의 교훈'이라고 적시한대로, 시민들이 군대만 봐도 겁이 나게할 정도로 신군부가 부마 항쟁 이후 시민을 상대로 어떤 훈련을 해왔고 그걸 광주에서 어떻게 실행했는지 조재형 기자 보도합니다.

    ◀ 리포트 ▶

    부마 진압에 첫 투입된 3공수 특전여단은 대한민국 최정예 특수부대였습니다.

    79년 10월 18일 새벽.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대규모 공수작전을 통해 부산에 들어온 3공수는, 경찰서까지 부순 기세등등한 시위대를 단 이틀 만에 제압합니다.

    주로 시위대의 머리를 가격해, 200여 명의 중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변길남/부마·광주항쟁 당시 3공수 13대대장]
    "(부마항쟁 때는) 군인들한테 붙잡혀가지고, '진압봉'이라 그래. 그 진압봉에 얻어맞은 사람도 없지 않아 있을 거야."

    7개월 뒤, 광주에 다시 나타난 3공수.

    그런데 이번에는, 시민들에게 실탄을 쐈습니다.

    부마항쟁 때만 해도 공포탄만 썼던 3공수가, 5·18 땐 m16 실탄을 쓴 겁니다. 5·18의 첫 집단발포 사건입니다.

    [안종철/前 5·18기록물 유네스코등재 추진단장]
    "바로 (1980년 5월) 20일 저녁에 3공수에 의해서 사살됐던 시민군 시신 2구, 이 2구가 광주시민들을 아주 격앙시켰던… 그 계기가 되게 된 거죠."

    부마에서 광주까지 7개월 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전두환 신군부는 12·12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뒤 7개 공수여단을 대상으로 충정 훈련, 즉 시위진압훈련을 대폭 강화합니다.

    공중침투 훈련은 제쳐두고, 오로지 시위진압훈련에만 매달린 겁니다.

    [노영기/조선대 교수. 前 군 과거사위원회 민간위원]
    "공수부대원들에게 독기를 심어줬다고 할까… 시민들에게 증오심을 갖도록… 계속 훈련을 시키고…"

    "공수부대원들이 80년도 초반부터… 퇴근도 하지 못한 채 계속 충정 훈련을 받았다", "80년 2월부터는 모든 교육훈련을 거의 포기한 채, 오로지 충정 훈련에만 여념이 없었다"는 사실이 군 과거사위 조사로 확인됐고, 계엄사령부 일지에도, 5·18 전 공수여단들이 모두 폭동 진압 훈련만 받았음이 기록돼 있습니다.

    [노영기/조선대 교수. 前 군 과거사위원회 민간위원]
    "7공수나 11공수 같은 경우에는 (3공수의) 부마의 경험들 자체, 그 때의 시위 진압의 경험들 자체가 그대로 전수되었다, 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1979년 부마항쟁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을 적으로, 탄압대상으로 규정한 전두환 신군부는, 치밀한 준비 끝에 이듬해 5월 광주에서 끔찍한 살육을 자행합니다.

    MBC뉴스 조재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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