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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마을도 비켜가지 못한 일제 '수탈의 흔적'

산골 마을도 비켜가지 못한 일제 '수탈의 흔적'
입력 2019-08-20 07:40 | 수정 2019-08-20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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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앵커 ▶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지 7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곳곳에는 일제 수탈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요.

    백두대간 산골 마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기주 기자입니다.

    ◀ 리포트 ▶

    서울에서 차로 4시간.

    구불구불 좁은 산길을 따라 한참을 더 들어가면 백두대간의 작은 산골마을,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에 닿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1923년 이곳에 금정광업소를 설립하고 해방 전까지 조선인 노동자들을 동원해 금을 캐 날랐습니다.

    제가 갱도 안쪽으로 들어와 봤습니다.

    허리를 펴기 힘들 정도로 높이가 낮은데요.

    바닥에는 발목 높이로 이렇게 물이 흐르고 있고요.

    일제강점기 금을 캐서 실어 날랐을 철길이 길게 깔려 있습니다.

    당시 일제가 금을 캐기 위해 빛 한 줌 들지 않는 작은 갱도에 투입한 인원만 3천 명이 넘습니다.

    [이상을/전 남부지방산림청 산림경영팀장]
    "금을 따라 가다가 없으면 다시 더 깊이 들어가고 깊이 들어가고, 태평양전쟁 무렵이었으니까 군자금이나 조선총독부 운영자금으로…"

    금정광산에서 차로 약 20분 떨어진 인근의 또 다른 산골마을.

    금을 신속하게 운반하기 위해 일제는 여기에 터널까지 뚫었습니다.

    터널 길이 약 3백미터에 폭과 높이도 각각 5미터.

    일제가 백두대간에 내놓은 이 커다란 구멍은 백 년이 다 되도록 메워지지 않은 채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뒤엉킨 덩쿨을 걷어내야 겨우 모습을 드러내는 비석 하나.

    "일본인 2명이 3백 명의 조선인 벌목자들을 동원해 금강소나무를 무차별 약탈해갔다."

    금정광산 일대를 둘러싸고 있는 금강소나무 숲도 당시 금과 더불어 일제의 대표적인 수탈 대상이자 탐나는 전쟁물자였습니다.

    백두대간 곳곳에 뚫어놓은 광산과 터널, 그리고 무자비한 벌목은 일제가 당시 우리나라를 철저하게 수탈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MBC뉴스 이기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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