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2580
민병호 기자
민병호 기자
청춘의 아이콘 '카세트 테이프'…버틸 수 있는 존재의 이유
청춘의 아이콘 '카세트 테이프'…버틸 수 있는 존재의 이유
입력
2014-09-22 08:45
|
수정 2014-09-22 14:14
재생목록
빨간 버튼을 눌러 라디오에서 영화음악을 녹음해 본 학창시절이 있었다면, 새로 산 테이프의 셀로판 포장지를 뜯으며 바스락 소리에 설렜다면, 톱니바퀴처럼 생긴 구멍에 육각볼펜을 꼽아 돌려본 기억이 있다면 알 것입니다.
가로 10cm, 세로 6.3cm의 직사각형 속에 차곡차곡 감긴 마그네틱 필름.
90년대 '길보드차트'의 주인공이었고, 미니 플레이어와 함께 청춘의 아이콘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카세트 테이프.
화려한 시절은 저물었지만 카세트 테이프를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주말이면 카세트음악을 듣는 휴대용 플레이어 수집가, 낡은 화물트럭의 카세트 데크로 장거리 운전의 피로를 잊는 운전기사..
가난한 인디밴드는 경제적 이유로 카세트테이프 앨범을 내고, 잘 나가는 스타들도 카세트테이프로 향수를 자극합니다.
카세트 테이프에 들어있는 것이 음악 뿐만이 아니라고, 그 가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목소리들을 들어봤습니다.
=============================
화물차 운전만 25년째.
매일 10시간 가까이 운전하는 이범한 씨에게 졸음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이범한▶
(다니시다 보면 졸리기도 하고 그럴 때 많으시겠어요)
"그럼요 새벽에 4시에 나오는데 한 30분 운행하다보면 잠 많이 오죠."
(졸리실 때는 보통 잠 깨기 위해서 좀 어떤 걸 좀 하세요?)
"새벽시간에 라디오 들을 때도 있고 테이프 주로 노래 잠 많이 오면 노래로 전환하고 그렇습니다."
이 씨의 낡은 화물트럭에서 음악을 들으려면 카세트테이프를 집어넣어야 합니다.
◀이범한▶
"차가 오래돼 가지고 CD가 안됩니다. 저같이 노후된 차량이 한 반이 넘을 겁니다. 노후된 차량들은 거의 테이프로 다 돼 있습니다."
하루의 대부분을 차에서 보내는 그에게 카세트테이프는 소중한 친구 같은 존재입니다.
◀이범한▶
"집에서는 마누라가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차에 타면 일단 노래를 들어야 하니까 자동으로 손이 가고 잠 오면 손이 가고 그렇습니다. 중요하죠. 엄청나게... 테이프가 있어야 노래를 듣고 또 스트레스도 풀리고 하니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카세트테이프.
이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귀한 물건이 돼 버렸는데요.
좀 더 빠르고 좀 더 편한 걸 찾는 요즘 시대에 카세트테이프가 사라져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카세트테이프의 시대는 이렇게 끝나는 걸까요?
초가을 하늘이 유난히 맑았던 주말.
한 유명 공중파 방송무대에 초대가수가 등장합니다.
(오늘 열렬한 환영에 답해서 무슨 노래 하나 하실까?)
"송해 오라버니 때문에 '오라버니' 한곡 더 전해드릴게요"
데뷔 15년차 트로트 가수 금잔디.
요즘 젊은이들이 애용하는 음원 판매순위에선 찾아보기 힘든 이름이지만 알고 보면 플래카드까지 내걸린 인기가수입니다.
방송 출연이 끝나자마자 팬들 사이를 뚫고 차에 올라탑니다.
오늘 안에 소화해야할 일정이 아직 4개나 더 남았습니다.
◀금잔디/트로트 가수▶
(가장 바쁠때는 하루에 보통 몇개 정도까지 해보셨어요?)
"여덟 개요. 여덟 개고 오늘 같은 경우도 다섯 개."
(그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하셔야 되는 거에요?)
"오늘 같은 경우는 새벽 4시에 나와가지고요. 오늘 아마 집에 들어가면 새벽 4시가 될 거 같아요. 그러니까 24시간 뭐...."
이 날은 데뷔 15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단독 콘서트도 가졌습니다.
공연장을 찾은 한 열성 팬은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최국순/72세▶
"고속도로에서 지나가는데 노래가 아주 좋더라고요. 우연찮게 카세트를 트니까 금잔디 노래가 나오는데 그렇게 좋더라고요. 쉽게 얘기해서 첫 눈에 반했달까."
10년 넘게 무명으로 지내온 그녀를 팬클럽까지 거느린 스타로 만들어준 일등공신은 바로 카세트테이프였습니다.
금잔디 씨의 별명은 '고속도로의 여왕'입니다.
집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카세트테이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대박이 난 앨범들입니다.
(이게 몇 개 나간 거예요?)
"이게 한 백만 장이 나갔고요."
(그럼 이 세 개를 답 합쳐서 몇 개가 나간 거예요?)
"요거 말고 다음 것까지 해 가지고 비공식적으로는 200만장이 넘었어요."
(200만 장이 넘게? 와, 테이프로만 그렇게 팔리기 정말 어려울텐데..)
카세트테이프의 위력은 생각보다 강했습니다.
◀금잔디/트로트 가수▶
"정말 보도 듣도 못한 시골마을에 가면 시골마을 이장님이 금잔디를 너무 기다리고 계신 거에요. '왜 저를 이렇게 기다리고 저를 이렇게 좋아하세요?' 이러면 '어우 내가 이걸 갖고 있는데' 카세트테이프를 갖고 계세요. 이거에 어떻게 이 노래를 이렇게 잘 할 수 있냐고.."
올해 68살의 김현식 씨가 영상변환 업체를 찾았습니다.
누님의 팔순잔치 영상을 카세트테이프로 옮기러 온 겁니다.
◀김현식/68세▶
"저희 누님이 팔순잔치를 했는데 제가 카메라로 찍었어요. 그 누님이 팔순잔치가 굉장히 즐거우셨나 봐요. 그 노랫소리 좀 듣고 싶다고..나이 먹은 사람은 베개 밑에 카세트테이프 놓고 라디오 듣고 테이프 듣고 그러거든요"
나이 지긋한 김 씨 형제들에겐 노래 듣기에 테이프만한 게 없습니다.
◀김현식/68세▶
"아 편하죠. 왜냐면 열고서 넣고 플레이만 누르면 되니까 다른 거 없죠."
닷새 만에 찾아온 장날.
카세트테이프 노점도 오랜만에 문을 열었습니다.
간혹 젊은 세대들도 관심을 보이지만 역시 주 고객은 어르신들입니다.
◀김운복/78세▶
"카세트 거기다가 테이프 넣고 들으면 한결 낫지 구수한 맛이 나는 게 말이야. 저녁에 잘 때 귀에 꼽고 자면은 자동으로 30분 돌아가면 딱 끝나 자동으로.."
이제 곧 카세트테이프가 없어지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김운복/78세▶
"테이프가 사라지면 뭐 사람도 사라지는 거지. 사람이 사라지지 테이프가 사라지겠어?"
경기도 화성의 한 공장.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20명 가까운 직원들이 쉴 새 없이 카세트테이프를 찍어내던 곳이었지만 이젠 기계도, 일하는 사람도 많이 줄었습니다.
◀이창희/카세트 테이프 제작업체▶
"가장 많이 나갔을 때가 노래방에서 테이프 녹음할 때 많이 나갔어요. 그때 저희가 생산했던 게 200만개 이상 판매를 했으니까.."(한 달에요?) "네"
20년 가까이 이 사업을 해온 이창희 씨는 차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들을 수 없게 되면서 사용량이 급속하게 줄어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창희/카세트 테이프 제작업체▶
"저희가 피부로 완전히 느꼈을 때가 3년 전이었는데 그때가 차량에 카오디오가 장착이 안되고 cd나 usb로 돌아가는 시점이었는데 아무리 못해도 한달에 50만개 이상 생산을 했는데 그 시점에 한 30만개 밑으로 계속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관련 업체 대부분이 사업을 접은 가운데 공테이프를 생산하는 공장도 전국에서 이 곳 한군데만 남았습니다.
8.90년대 음악시장에서 카세트테이프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했습니다.
그 시절엔 누구나 한번쯤 라디오를 들으면서 좋아하는 음악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고, '길보드차트'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을 정도로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카세트테이프 음악을 통해 가수와 노래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카세트 플레이어.
어느덧 고3 수험생의 아버지가 된 이준호 씨는 32년 전 기억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이준호▶
"처음 제가 워크맨을 구입했던 것은 1982년 5월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성적이 잘 나왔다고 워크맨을 당시 세운상가에서 사주셨어요. 바로 이 모델이고요 그 당시에는 최신 모델이었죠."
지금은 느낄 수 없는 카세트테이프만의 매력.
◀이준호▶
"아마 8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던 분들이면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소피마르소의 라붐이란 테이프인데요. 그 당시에는 테이프 말고도 속지가 있어요. 당시 소피마르소 흑백사진이 들어있고 그 뒤에는 이제 그 영화에 대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읽는 것도 카세트테이프를 듣는 거 못지않게 소소한 재미중의 하나였습니다."
쫓아가기 벅찬 디지털 세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아날로그 감성으로 위로받습니다.
◀이준호▶
"카세트 테이프는 저한테는 힐링이에요. 사실 많은 분들이 컴퓨터로 작업을 많이 하시고 스마트폰 많이 쓰시는데 하루 종일 그런 디지털에 의해 피로가 쌓였던 것들을 카세트를 들으면서 많이 위안을 받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이런 복고의 바람은 음반업계로도 조금씩 불어오고 있습니다.
음질 좋은 CD나 음악파일에 밀려났던 카세트테이프가 돌아오기 시작한 겁니다.
올해 초 나온 김광석 헌정앨범이 테이프로 만들어져 천세트가 모두 팔려나갔고, 남성 보컬그룹 브라운아이드소울의 4집 역시 테이프로도 함께 발매돼 한정판 2만장이 예약판매와 동시에 매진됐습니다.
◀이수근/음반기획자▶
"최근에 솔직히 트렌드가 음악을 소장하기보다는 소비하잖아요. 그렇게 음악을 만들고 그렇게 활동을 하는 게 맞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저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희 음악을 소수라도 소장할 수 있게, 소장할 가치가 있게끔 만들고 싶었거든요."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실용적 복고가 인기입니다.
인디밴드 13팀의 공연이 펼쳐진 홍대 인근의 한 클럽.
공연장 한 켠에 카세트 테이프가 판매중입니다.
◀박정근/인디음반 제작자▶
"우리 사운드는 CD같이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음질보다는 약간 테이프의 먹먹한 음질로 나왔으면 좋겠다. 제작비를 좀 절감해보자 이런 경우가 있고요. 음원만 내려고 했는데 그래도 물리적인 형태의 음반이 필요하다 그래서 테이프로 발매되는 경우가 있고요."
테이프 300개 정도를 찍어내는 데 드는 음반 제작비용은 15만 원 정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인디밴드들에겐 더욱 매력적입니다.
◀이준·심지훈/흑염소(인디밴드)▶
"저희가 테이프를 인터넷으로 주문해가지고 테이프가 오고" (공테이프가 오면 직접 다 녹음을 하고) "인쇄도 테이프 라벨지 붙어 있잖아요. 그것도 인쇄소에서 다 해가지고 직접 오려가지고 다 붙이고"(되게 힘들어요. 셋이 밤새서 스티커 붙이고) " 근데 그게 또 맛이 있어요." (재미가 있죠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맛이 있죠)
가로 10cm 세로 6cm의 네모난 플라스틱.
이 작은 사각형 안에는 음악만 담겨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에겐 과거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고,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기 버거운 세대에게는 현재를 사는 버팀목이 돼 주기도 합니다.
◀금잔디/트로트가수▶
"제 목소리가 가능한 날까지는 테이프는 계속, 왜냐면 그때까지도 CD가 뭔지 DVD 영상이 뭔지 핸드폰으로 다운받아서 받는 음악이 뭔지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그 분들을 위해서 저는 계속해서 이런 음악들로 카세트 테이프으로 인사를 계속 드릴 거예요“
◀이수근/음반기획자▶
"옛날에 음악은 내 기억 속에도 소장하지만 그 매체도 소장했다는 거죠. 그게 없어진 건 사실이에요. 사실은 그 기억을 되찾고 싶은 거겠죠"
또 어떤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여전히 없어서는 안 될 절실함이기도 합니다.
◀이창희/카세트 테이프 제작업체▶
"시각장애인 도서관에 납품을 하는데 그 분들이 오디오 테이프를 듣거든요. 가장 편하고 불량 안 나고 언제든지 주고받고 하면서 들을 수 있는 게 테이프밖에 없거든요."
아직은 끝이 아니라고 말하는 작은 목소리들.
디지털 세상에 밀리고 치이면서도 카세트테이프가 꿋꿋이 버틸 수 있는 존재의 이유일 겁니다.
가로 10cm, 세로 6.3cm의 직사각형 속에 차곡차곡 감긴 마그네틱 필름.
90년대 '길보드차트'의 주인공이었고, 미니 플레이어와 함께 청춘의 아이콘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카세트 테이프.
화려한 시절은 저물었지만 카세트 테이프를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주말이면 카세트음악을 듣는 휴대용 플레이어 수집가, 낡은 화물트럭의 카세트 데크로 장거리 운전의 피로를 잊는 운전기사..
가난한 인디밴드는 경제적 이유로 카세트테이프 앨범을 내고, 잘 나가는 스타들도 카세트테이프로 향수를 자극합니다.
카세트 테이프에 들어있는 것이 음악 뿐만이 아니라고, 그 가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목소리들을 들어봤습니다.
=============================
화물차 운전만 25년째.
매일 10시간 가까이 운전하는 이범한 씨에게 졸음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이범한▶
(다니시다 보면 졸리기도 하고 그럴 때 많으시겠어요)
"그럼요 새벽에 4시에 나오는데 한 30분 운행하다보면 잠 많이 오죠."
(졸리실 때는 보통 잠 깨기 위해서 좀 어떤 걸 좀 하세요?)
"새벽시간에 라디오 들을 때도 있고 테이프 주로 노래 잠 많이 오면 노래로 전환하고 그렇습니다."
이 씨의 낡은 화물트럭에서 음악을 들으려면 카세트테이프를 집어넣어야 합니다.
◀이범한▶
"차가 오래돼 가지고 CD가 안됩니다. 저같이 노후된 차량이 한 반이 넘을 겁니다. 노후된 차량들은 거의 테이프로 다 돼 있습니다."
하루의 대부분을 차에서 보내는 그에게 카세트테이프는 소중한 친구 같은 존재입니다.
◀이범한▶
"집에서는 마누라가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차에 타면 일단 노래를 들어야 하니까 자동으로 손이 가고 잠 오면 손이 가고 그렇습니다. 중요하죠. 엄청나게... 테이프가 있어야 노래를 듣고 또 스트레스도 풀리고 하니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카세트테이프.
이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귀한 물건이 돼 버렸는데요.
좀 더 빠르고 좀 더 편한 걸 찾는 요즘 시대에 카세트테이프가 사라져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카세트테이프의 시대는 이렇게 끝나는 걸까요?
초가을 하늘이 유난히 맑았던 주말.
한 유명 공중파 방송무대에 초대가수가 등장합니다.
(오늘 열렬한 환영에 답해서 무슨 노래 하나 하실까?)
"송해 오라버니 때문에 '오라버니' 한곡 더 전해드릴게요"
데뷔 15년차 트로트 가수 금잔디.
요즘 젊은이들이 애용하는 음원 판매순위에선 찾아보기 힘든 이름이지만 알고 보면 플래카드까지 내걸린 인기가수입니다.
방송 출연이 끝나자마자 팬들 사이를 뚫고 차에 올라탑니다.
오늘 안에 소화해야할 일정이 아직 4개나 더 남았습니다.
◀금잔디/트로트 가수▶
(가장 바쁠때는 하루에 보통 몇개 정도까지 해보셨어요?)
"여덟 개요. 여덟 개고 오늘 같은 경우도 다섯 개."
(그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하셔야 되는 거에요?)
"오늘 같은 경우는 새벽 4시에 나와가지고요. 오늘 아마 집에 들어가면 새벽 4시가 될 거 같아요. 그러니까 24시간 뭐...."
이 날은 데뷔 15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단독 콘서트도 가졌습니다.
공연장을 찾은 한 열성 팬은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최국순/72세▶
"고속도로에서 지나가는데 노래가 아주 좋더라고요. 우연찮게 카세트를 트니까 금잔디 노래가 나오는데 그렇게 좋더라고요. 쉽게 얘기해서 첫 눈에 반했달까."
10년 넘게 무명으로 지내온 그녀를 팬클럽까지 거느린 스타로 만들어준 일등공신은 바로 카세트테이프였습니다.
금잔디 씨의 별명은 '고속도로의 여왕'입니다.
집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카세트테이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대박이 난 앨범들입니다.
(이게 몇 개 나간 거예요?)
"이게 한 백만 장이 나갔고요."
(그럼 이 세 개를 답 합쳐서 몇 개가 나간 거예요?)
"요거 말고 다음 것까지 해 가지고 비공식적으로는 200만장이 넘었어요."
(200만 장이 넘게? 와, 테이프로만 그렇게 팔리기 정말 어려울텐데..)
카세트테이프의 위력은 생각보다 강했습니다.
◀금잔디/트로트 가수▶
"정말 보도 듣도 못한 시골마을에 가면 시골마을 이장님이 금잔디를 너무 기다리고 계신 거에요. '왜 저를 이렇게 기다리고 저를 이렇게 좋아하세요?' 이러면 '어우 내가 이걸 갖고 있는데' 카세트테이프를 갖고 계세요. 이거에 어떻게 이 노래를 이렇게 잘 할 수 있냐고.."
올해 68살의 김현식 씨가 영상변환 업체를 찾았습니다.
누님의 팔순잔치 영상을 카세트테이프로 옮기러 온 겁니다.
◀김현식/68세▶
"저희 누님이 팔순잔치를 했는데 제가 카메라로 찍었어요. 그 누님이 팔순잔치가 굉장히 즐거우셨나 봐요. 그 노랫소리 좀 듣고 싶다고..나이 먹은 사람은 베개 밑에 카세트테이프 놓고 라디오 듣고 테이프 듣고 그러거든요"
나이 지긋한 김 씨 형제들에겐 노래 듣기에 테이프만한 게 없습니다.
◀김현식/68세▶
"아 편하죠. 왜냐면 열고서 넣고 플레이만 누르면 되니까 다른 거 없죠."
닷새 만에 찾아온 장날.
카세트테이프 노점도 오랜만에 문을 열었습니다.
간혹 젊은 세대들도 관심을 보이지만 역시 주 고객은 어르신들입니다.
◀김운복/78세▶
"카세트 거기다가 테이프 넣고 들으면 한결 낫지 구수한 맛이 나는 게 말이야. 저녁에 잘 때 귀에 꼽고 자면은 자동으로 30분 돌아가면 딱 끝나 자동으로.."
이제 곧 카세트테이프가 없어지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김운복/78세▶
"테이프가 사라지면 뭐 사람도 사라지는 거지. 사람이 사라지지 테이프가 사라지겠어?"
경기도 화성의 한 공장.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20명 가까운 직원들이 쉴 새 없이 카세트테이프를 찍어내던 곳이었지만 이젠 기계도, 일하는 사람도 많이 줄었습니다.
◀이창희/카세트 테이프 제작업체▶
"가장 많이 나갔을 때가 노래방에서 테이프 녹음할 때 많이 나갔어요. 그때 저희가 생산했던 게 200만개 이상 판매를 했으니까.."(한 달에요?) "네"
20년 가까이 이 사업을 해온 이창희 씨는 차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들을 수 없게 되면서 사용량이 급속하게 줄어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창희/카세트 테이프 제작업체▶
"저희가 피부로 완전히 느꼈을 때가 3년 전이었는데 그때가 차량에 카오디오가 장착이 안되고 cd나 usb로 돌아가는 시점이었는데 아무리 못해도 한달에 50만개 이상 생산을 했는데 그 시점에 한 30만개 밑으로 계속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관련 업체 대부분이 사업을 접은 가운데 공테이프를 생산하는 공장도 전국에서 이 곳 한군데만 남았습니다.
8.90년대 음악시장에서 카세트테이프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했습니다.
그 시절엔 누구나 한번쯤 라디오를 들으면서 좋아하는 음악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고, '길보드차트'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을 정도로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카세트테이프 음악을 통해 가수와 노래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카세트 플레이어.
어느덧 고3 수험생의 아버지가 된 이준호 씨는 32년 전 기억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이준호▶
"처음 제가 워크맨을 구입했던 것은 1982년 5월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성적이 잘 나왔다고 워크맨을 당시 세운상가에서 사주셨어요. 바로 이 모델이고요 그 당시에는 최신 모델이었죠."
지금은 느낄 수 없는 카세트테이프만의 매력.
◀이준호▶
"아마 8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던 분들이면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소피마르소의 라붐이란 테이프인데요. 그 당시에는 테이프 말고도 속지가 있어요. 당시 소피마르소 흑백사진이 들어있고 그 뒤에는 이제 그 영화에 대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읽는 것도 카세트테이프를 듣는 거 못지않게 소소한 재미중의 하나였습니다."
쫓아가기 벅찬 디지털 세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아날로그 감성으로 위로받습니다.
◀이준호▶
"카세트 테이프는 저한테는 힐링이에요. 사실 많은 분들이 컴퓨터로 작업을 많이 하시고 스마트폰 많이 쓰시는데 하루 종일 그런 디지털에 의해 피로가 쌓였던 것들을 카세트를 들으면서 많이 위안을 받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이런 복고의 바람은 음반업계로도 조금씩 불어오고 있습니다.
음질 좋은 CD나 음악파일에 밀려났던 카세트테이프가 돌아오기 시작한 겁니다.
올해 초 나온 김광석 헌정앨범이 테이프로 만들어져 천세트가 모두 팔려나갔고, 남성 보컬그룹 브라운아이드소울의 4집 역시 테이프로도 함께 발매돼 한정판 2만장이 예약판매와 동시에 매진됐습니다.
◀이수근/음반기획자▶
"최근에 솔직히 트렌드가 음악을 소장하기보다는 소비하잖아요. 그렇게 음악을 만들고 그렇게 활동을 하는 게 맞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저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희 음악을 소수라도 소장할 수 있게, 소장할 가치가 있게끔 만들고 싶었거든요."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실용적 복고가 인기입니다.
인디밴드 13팀의 공연이 펼쳐진 홍대 인근의 한 클럽.
공연장 한 켠에 카세트 테이프가 판매중입니다.
◀박정근/인디음반 제작자▶
"우리 사운드는 CD같이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음질보다는 약간 테이프의 먹먹한 음질로 나왔으면 좋겠다. 제작비를 좀 절감해보자 이런 경우가 있고요. 음원만 내려고 했는데 그래도 물리적인 형태의 음반이 필요하다 그래서 테이프로 발매되는 경우가 있고요."
테이프 300개 정도를 찍어내는 데 드는 음반 제작비용은 15만 원 정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인디밴드들에겐 더욱 매력적입니다.
◀이준·심지훈/흑염소(인디밴드)▶
"저희가 테이프를 인터넷으로 주문해가지고 테이프가 오고" (공테이프가 오면 직접 다 녹음을 하고) "인쇄도 테이프 라벨지 붙어 있잖아요. 그것도 인쇄소에서 다 해가지고 직접 오려가지고 다 붙이고"(되게 힘들어요. 셋이 밤새서 스티커 붙이고) " 근데 그게 또 맛이 있어요." (재미가 있죠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맛이 있죠)
가로 10cm 세로 6cm의 네모난 플라스틱.
이 작은 사각형 안에는 음악만 담겨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에겐 과거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고,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기 버거운 세대에게는 현재를 사는 버팀목이 돼 주기도 합니다.
◀금잔디/트로트가수▶
"제 목소리가 가능한 날까지는 테이프는 계속, 왜냐면 그때까지도 CD가 뭔지 DVD 영상이 뭔지 핸드폰으로 다운받아서 받는 음악이 뭔지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그 분들을 위해서 저는 계속해서 이런 음악들로 카세트 테이프으로 인사를 계속 드릴 거예요“
◀이수근/음반기획자▶
"옛날에 음악은 내 기억 속에도 소장하지만 그 매체도 소장했다는 거죠. 그게 없어진 건 사실이에요. 사실은 그 기억을 되찾고 싶은 거겠죠"
또 어떤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여전히 없어서는 안 될 절실함이기도 합니다.
◀이창희/카세트 테이프 제작업체▶
"시각장애인 도서관에 납품을 하는데 그 분들이 오디오 테이프를 듣거든요. 가장 편하고 불량 안 나고 언제든지 주고받고 하면서 들을 수 있는 게 테이프밖에 없거든요."
아직은 끝이 아니라고 말하는 작은 목소리들.
디지털 세상에 밀리고 치이면서도 카세트테이프가 꿋꿋이 버틸 수 있는 존재의 이유일 겁니다.
당신의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