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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2580
기자이미지 최훈 기자

1년이 지났지만...

1년이 지났지만...
입력 2015-04-20 09:29 | 수정 2015-04-2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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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4명의 희생자를 낸 세월호 침몰사고가 일어난 지 1년.

    그러나 실종자 9명을 품은 배는 여전히 바다밑에 가라앉아있고, 사고의 원인은 제대로 밝혀진 게 없습니다.

    1년 전 그날에 멈춰진 희생자 가족들의 시간.

    그들의 처절한 기다림과 목소리에 귀기울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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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찾아온 4월

    양봉진 씨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딸 사진을 꺼내봅니다.

    ◀ 양봉진/ 고 온유양 아버지 ▶
    "(사진 자주 보시나요?) 컴퓨터에 저장 되어 있으니까. 매일 보죠. 매일. (매일 보세요?) 한창 필 나이잖아요. 열 여덟살이면 얼마나 예쁠 나이에요. 딱 봐도 한참 필 나이잖아요. (진짜 예쁘네요)"

    늘 예쁜 딸이지만 작년 수학여행 가기 전날 밤엔 유난히 예뻤습니다.

    ◀ 양봉진/ 고 온유양 아버지 ▶
    "수학여행 가기 전 날 너무 예쁘더라고요. 제가 한 번 더 쳐다 봤어요. 온유가 이렇게 예뻤었나? 온유 엄마도 그랬더라고요. 온유 엄마도 한번 더 쳐다 봤대요."

    태몽이 바다였고, 태명은 부활이었던 딸 온유는 바다에서 잠들었고, 부활절에 발견됐습니다.

    1년이 지났지만, 아버지는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오늘도 학교 갔다 돌아올 것만 같은 사랑스런 딸.

    ◀ 양봉진/ 고 온유양 아버지 ▶
    "태어나서 아픈 날짜까지 기억을 다 해요. 생후 53일째 열이 40도 가까이 오르락 내리락 해서 3일 고생한 거. 생후 106일 때 머리 불덩이 같은 거 기저귀까지 다 갈았으니까."

    배가 급격히 기울던 순간 온유는 한 남학생의 도움을 받아 갑판으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종 구조 명단에 온유는 없었습니다.

    반장이었던 온유가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또다시 선실로 들어간 겁니다.

    ◀ 양봉진/ 고 온유양 아버지 ▶
    "그래서 저는 그랬어요. 저는 딸 하나는 잘 키웠다. 슬프지만 딸 하나는 잘 키웠다."

    마지막 인사도 못 했다는 생각에 아빠는 요즘도 딸에게 받지 못할 문자를 보냅니다.

    자식 잃은 슬픔.

    지난 1년은 고통을 억누르고 또 누르며 지내온 시간이었습니다.

    ◀ 양봉진/ 고 온유양 아버지 ▶
    "부모님을 잃으면 고아. 남편을 잃으면 과부. 아내가 없으면 홀애비. 그런 명칭은 있는데 자식을 잃었을 때는 명칭이 없대요. 그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295명이 세상을 떠나고 9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

    세월호 참사는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유가족들은 1년 전 그날로 시간이 멈췄다고 말합니다.

    슬픔과 분노,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다시 그 바다를 찾은 유가족들을 2580이 동행했습니다.

    동이 터 오는 이른 아침.

    수십 명이 짐을 챙겨 버스에 오릅니다.

    가는 내내 버스 안은 조용합니다.

    ◀ 김봉희/ 고 정원재 씨 부인 ▶
    "(팽목항에 얼마만에 가시는 거예요?) 그 때 사고 나서 거기서 시신 수습하고 나서 처음 가는 것 같아요. 선뜻 기억 속에 떠올리고 싶지도 않지만 선뜻 가기도."

    인천에서 출발해 6시간만에 도착한 팽목항.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 세월호 유가족 ▶
    "말을 못 할 정도로 마음이 아프죠. 진짜. 여기서 시신을 여기서 인수인계 해서 간 거 같아. 그때 밤에 와서 몰랐는데 보니까 여기인 것 같아. 여기서 시신을 찾아가지고 그 날 밤에 간 것 같아."

    사고가 난 그날은 남편의 생일이었습니다.

    ◀ 세월호 유가족 ▶
    "생일이어서 동창생들끼리 환갑여행 간다고 해서 제가 떡이랑 해서 보냈거든요. 동창들 하고 같이 가면서 먹으라고 해서 보냈는데 그게 저승길. 친구들하고 나눠 먹는 음식이 된 거 같은"

    팽목항 여기 저기서 참았던 슬픔이 터져나옵니다.

    9살 요셉이는 출장 가던 아빠를 따라 온 가족이 배를 탔다가 요셉이만 구조됐습니다.

    ◀ 조요셉 ▶
    "(여기 어딘 줄 알아?) 몰라요. (몰라?) 어. (이름이 뭐야?) 조요셉.
    (요셉이? 몇 학년이야?) 2학년."

    ◀ 요셉이 삼촌 ▶
    "요셉이만 혼자 구조 되고 나머지 3명은... (부모님이랑 또 누구예요?) 요셉이 형. 5학년 짜리 있었거든요.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요셉이는?) 요셉이는 제가 키우고 있고 (삼촌 분이?) 네.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잖아요."

    유가족들은 사고 해역을 둘러 보기 위해 배에 올랐습니다.

    요셉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신이 났습니다.

    ◀ 지하영/ 요셉이 사촌 누나 ▶
    "(요셉이 어떤 점이 좋아? 요셉이 좋은 점) 안 좋은데요. (그래도 한 가지는 있을 거 아니야. 요셉이 좋은 점 없어?) 웃는 거. (웃는 거? 웃는 게 좋아?) 하하하"

    어른들은 말이 없습니다.

    사고 지점이 점점 다가옵니다.

    ◀ 세월호 유가족 ▶
    "너무 아파가지고 숨도 못 쉬겠어요. 너무 가슴이 아파가지고. 세상 여기서 어떻게 죽었나 싶어가지고"

    '세월'이라고 적힌 노란 부표가 홀로 바다에 떠 있습니다.

    ◀ 세월호 유가족 ▶
    "엄마~ 엄마~"

    아버지가 있던 곳.

    남편이 잠든 바다에 다시 한번 작별 인사를 고합니다.

    ◀ 세월호 유가족 ▶
    "원교 아빠 잘가"

    ◀ 세월호 유가족 ▶
    "순복아 미안해! 못해줘서 미안해!"

    ◀ 최인수 / 고 최순복 씩 남편 ▶
    "행복하게 못 해줘서. 그러니까 미안하지요. 살려고 애를 썼는데...“

    유백형 씨는 아직 팽목항을 떠날 수 없습니다.

    ◀ 유백형/ 실종자 양승진 씨 아내 ▶
    "내가 잘 아는 자원봉사자가 손수 이렇게 떠가지고 이렇게 걸어 놓은 거예요. (아 손으로 떠서요?) 손으로 다 뜬 거죠."

    남편인 안산 단원고 교사 양승진 씨는 세월호에서 아직 나오지 못 했습니다.

    ◀ 유백형/ 실종자 양승진 씨 아내 ▶
    "여보 끝까지 기다릴게. 어서 나와. 당신 아들 딸. 마누라 기다리고 있으니까 여보."

    지금 가장 큰 바람은 단 한번만이라도 남편을 보고 싶다는 것.

    실종자 가족이라는 이름 대신 유가족이라도 되고 싶다는 겁니다.

    ◀ 유백형/ 실종자 양승진 씨 아내 ▶
    "온전한 선체 인양해서 꼭 남편 뼈조각이라도 따뜻하게 찾아서 따뜻한 나라로 보내주고 싶어"

    수없이 다닌 사고 해역.

    이제 담담할만도 하지만 남편이 아직도 물 속에 있을 걸 생각하면 마음을 추스릴 수가 없습니다.

    ◀ 유백형/ 실종자 양승진 씨 아내 ▶
    "여보야 얼른 나와. 꼭 인양해서 당신 꼭 찾아줄게요. 미안해. 자기야 미안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

    지난 1년. 정신적인 충격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됐을까?

    정신건강 트라우마 센터에서 요셉이를 다시 만났습니다.

    ◀ 요셉이 삼촌 ▶
    "처음엔 당연히 울죠. 엄마가 안 보이니까 갑자기 안 보이니까. 배에서 숨 쉴 수 있냐고 물어 보길래 배가 커서 숨 쉴 수 있다. 거짓말도 하고 했는데."

    요셉이는 밝은 표정으로 미술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 요셉이 삼촌 ▶
    "초등학교 고학년 올라가면 다 알겠죠. 그 때가 사실 걱정이지. 지금은 워낙 밝고 잘 크니까 걱정을 안 하는데 세월호 사건이나 이런 걸 알게 됐을 때 어떻게 받아 들일지"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 있는 대상자는 256가구에 768명.

    하지만 상당수는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고,

    치료는 사치라며 치료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생존자와 유가족들도 많습니다.

    ◀ 트라우마 센터 부소장 ▶
    "사회와의 불신이 지속되는 것. 그리고 여론으로 통해서 상처 받는 것들. 이런 외부적인 상처가 계속 진행이 되고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외상후라기 보다는 아직도 외상중이다. 계속 트라우마를 받고 있다."

    다른 재난 사고와 비교해도 회복 속도는 훨씬 더디고, 그 고통은 극심합니다.

    ◀ 트라우마 센터 부소장 ▶
    "사고 이후에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 그런데 이분들의 시간은 바로 어제 바로 저번 주 그 사고 상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 했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런 이유는 자꾸 세월호 사고에 대한 처리가 늦어지는 부분들이 있을 거고..."

    세월호 유가족들이 가장 바라는 건 진상규명입니다.

    내 가족이 세상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라도 정확히 알고 싶다는 겁니다.

    2580은 사고 직전에 세월호를 수리했던 업체 직원들을 만나 실마리가 될지도 모를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세월호의 본격 운항 석달 전인 2013년 11월까지 세월호를 수리하고 개조했던 조선소 직원은 세월호가 운항하지 않을 때도 물위에서 이미 5도 정도 기울어져 있었다고 말합니다.

    ◀ OOO 선박 수리 업체 ▶
    "항상 5도 정도는 기울어져 있었어요. 조타실 가면 앞에 물로 된 수평계가 달려 있습니다. 그걸 항상 보고 다녀요. 저희들은. 왜냐하면 수리를 하기 위해서 배가 바른 상태로 서 있을 때 구조물을 올려야지 바로 올라가거든요."

    균형을 잡기 위해 물탱크인 밸러스터에 평형수를 넣어도 곧바로 또 기울었다고 합니다.
    ◀ OOO 선박 수리 업체 ▶
    "이게 배가 자꾸 좌현 쪽으로 기울어요. 선장한테 밸러스팅(평형수 주입)을 해달라 해 놓으면 5분 있으면 다시 돌아가고 돌아가고 하더라고요."

    당시 생존자들이 급변침 이전부터 배가 기울었다고 진술 했던 내용과도 일치합니다.

    ◀ 장OO / 생존자 ▶
    "기우는 게 있었어요. 한 두시간 전부터 계속 조금씩 기울었어요. 조금씩."

    하지만 검찰과 정부 조사 과정엔 이런 내용은 빠져 있습니다.

    조사를 받은 적도 없다고 합니다.

    ◀ OOO 선박 수리 업체 ▶
    "뭐 경찰에서나 검찰에서나 여지껏 사고 나고 나서 제가 직접 수리 하고 수리한 업체지만 그런 데 대해서는 전혀 얘기가 나온 게 없습니다."

    그런데 작년 사고 직후. 세월호가 원래부터 기울었을 거라고 확신 했던 일본 교수가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배는 좌우로 흔들리면서 균형을 잡지만, 한쪽으로 기운 배는 작은 충격에도 쉽게 전복된다는 실험도 공개했었습니다.

    ◀ 와타나베 교수/ 일본 도쿄해양대 ▶
    "원래 있던 무게가 300kg이고, 추가로 얹은 건 5~6kg에 불과한데도 순식간에 뒤집어집니다."

    이 교수의 주장은 배가 이미 기운 상태로 가다가 통제 불능이 돼서 휘청거렸고, 그러다보니 급선회한 것 처럼 보일 뿐이지, 사고원인은 급선회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고 해역쯤에선 기름이 떨어져 배가 더 가벼워졌고, 맹골수로의 강한 유속이 충격으로 작용해 전복했을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조선소는 세월호가 늘 5도 기울어 있었던 건 사이드 램프을 떼어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사이드 램프는 차량이 이동하는 통로로 6,70톤 가량 되는데, 오른쪽에 있던 걸 아예 떼어 내고 대신 10톤 짜리 철판으로 덮어놓은 겁니다.

    ◀ OOO 선박 수리 업체 ▶
    "벌써 (좌우가) 50톤 60톤 차이가 나는 거죠. 그러니까 평형수에 쏠림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이건 감당이 안 되거든요. 우측 것을 뜯어 냈으니까 좌측으로 항상 기울어져 있었죠. 배가 누워 있는 것도 지금 왼쪽으로 누워 있잖아요."

    화물과 차량을 배에 고정시키는 고박 장치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장에게 부품을 가져오면 달아주겠다고 했지만, 청해진 해운은 시간이 없다며 그냥 가버렸다고 합니다.

    ◀ OOO 선박 수리 업체 ▶
    "그것(고박장치)을 우리가 제작을 못해요.
    그걸 밖에서 제작을 해서 사다가 붙여야 하는데. 화물 선적 스케쥴 때문에 바쁘다고 가지고 갔죠. 그냥."

    세월호 유가족들은 사고 원인을 정확히 밝히기 위해 선체 인양이 꼭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 정명교/ 세월호 유가족 ▶
    "도대체 저 배가 왜 침몰을 했고, 저 안에 가장 큰 중요한 건 실종자 분들이 계실 수 있잖아요."

    정부도 최근 인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선체 인양이 생각 만큼 쉽지 않단 의견도 있지만 천안함을 인양했던 업체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 문영석 / 천안함 인양 업체 ▶
    "(세월호를 인양하는 건 어려운 건가요? 아님 어렵지 않은가요?) 우리나라 기술로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거네요?) 네."

    물 속으로 옮기면 인양 비용과 기간도 지금 거론되는 것보다 훨씬 줄어들 거라고 말합니다.

    가장 유력한 방법은 세월호 바닥에 와이어를 걸어 크레인으로 세운 다음 플로팅 도크라는 선박으로 세월호를 끌어 올린 뒤 인양하는 방식입니다.

    ◀ 문영석 / 천안함 인양 업체 ▶
    "저는 톤 수가 만 톤을 오버하지 않고 7~8천 톤으로 보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 구상을 하면 비용도 좀 절감이 되고 공기도 절감이 되고..."

    네 계절이 한 바퀴 돌아 다시 그 자리에 돌아왔습니다.

    누군가는 배를 인양하자 하고, 누군가는 그럴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잊지 않겠다 하고, 또 누군가는 그만 잊자고 말합니다.

    분열과 갈등속에 침묵의 바다에 묻혀버린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진실

    미루면 미룰수록 진정한 통합과 치유는 늦춰질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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