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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2580
기자이미지 김현경 기자

어느 일본 은행의 '세쿠하라'

어느 일본 은행의 '세쿠하라'
입력 2015-10-12 10:57 | 수정 2015-10-12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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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사에서 귀한 손님이 와 회식을 하면 그 손님 주위에는 젊은 여직원들을 배치해 술 시중을 들게 하고, 업무 시간 여직원의 외모와 신체 부위를 평가하는 성희롱적 발언을 일삼는 곳.

    한 일본 은행의 한국 지점에서 일상화돼있다는 풍경입니다.

    일명 ‘세쿠하라(sex + harrassment)’.

    가해자는 주로 일본인 고위직 남성들, 피해자는 현지 채용된 한국 여직원들이라는 게 전. 현직 직원들의 증언입니다.

    또, 이 같은 분위기에 항의하면 일본인 상사들은 “한국에선 다 이런다던데..”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한 여직원이 회식 후 귀가 도중 택시 안에서 일본인 직속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피해자는 일이 벌어진 이후 6개월 동안 국가인권위와 고용노동부 등에 진상조사를 호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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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어느 날 저녁.

    일본계 은행 서울지점에서 근무하던 한 20대 여직원이 일본인 주재원인 상사, 한국인 동료와 함께 회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직원은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일본인 상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합니다.

    상사가 "한 번만 안아봐도 되겠냐"며 강제로 껴안고 신체 접촉을 한 겁니다.

    [직원/미쓰이스미토모 은행]
    "너무 수치스럽다는 생각.. 이걸 어떡하면 좋지? 남편 얼굴을 어떻게 보지?"

    당시 결혼한 지 6개월 된 신혼이었던 피해자는 정신적 충격으로 한 달간 입원치료까지 받았습니다.

    가해자는 평소에도 상습적으로 성희롱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직원/미쓰이스미토모 은행]
    "신혼 여행 갔다 오니까 남편하고 벗고 (사진) 찍은 거 없느냐고 그런 걸 물어보고, 잠깐 회의실로 올래? 회의실로 불러서 입술에 뭐가 묻었다고 하면서 손으로 닦아주고.."

    이 여직원은 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가해자는 기소됐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일단락된 것 같은 직장 내 성추행 사건.

    그러나 2580과 만난 피해 여직원은 이번 사건이 가해자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폭로했습니다.

    이 은행에는 한국인 여직원에 대한 일본인들의 성희롱과 성차별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미쓰이스미토모 은행 서울지점.

    일본 3대 대형 은행으로 작년 9월 기준 총자산이 약 1400조 원에 달하는 세계적인 금융기업입니다.

    서울지점에는 일본인 주재원 30여 명과 한국 직원 150여 명이 일합니다.

    그런데 이 은행에는 이해하기 힘든 문화가 있다고 합니다.

    피해자가 2580에 보여준 회식 사진입니다.

    가운데 앉은 남성은 본사에서 온 고위 임원, 그 주위를 젊은 여직원 네 명이 둘러싸고 앉아있습니다.

    이른바 '여직원 술시중'.

    본사나 다른 해외지점에서 서울로 일본인 출장자가 오면 회식을 하는데, 남성 출장자 양옆에 항상 한국인 여직원을 앉혀 술을 따르게 했다는 겁니다.

    옆자리에 앉히는 기준은 주로 외모와 나이.

    [직원/미쓰이스미토모 은행]
    "얼굴 괜찮은 애들 누구지? 젊고 어리고 일본어 하고. 일본어 못하면 영어라도 잘하고 그런 직원을 (출장자) 사방에 앉혀요."

    출장자 옆에 앉을 여직원을 미리 정해 자리 배치 표까지 만들었고,

    [직원/미쓰이스미토모 은행]
    "(와야 할 여직원들이) '오늘 다른 약속 있다'고 하면 '팀장님이 꼭 와달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결국 그 사람들 초대를 하고 앉히고.."

    상사들은 출장자를 접대하는 방식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쳤다고 합니다.

    [직원/미쓰이스미토모 은행]
    "남자한테 술 따를 때는 이렇게 하는 게 더 모양새가 좋다. (VIP가) 무슨 말을 하면 웃고 반응하고 재미있게 해드려라. 뭐 저희들을 완전 접대부 취급한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직원들의 증언도 일치했습니다.

    [전 직원 A]
    "남자가 (술을) 따라주는 것은 있을 수가 없고 모양새도 이상하니까 여자가 따라준다고. 그래서 일본 말할 수 있는 어린 여직원으로 옆에 앉히는 데 거의 뭐 강제라고 보시면 돼요."

    [전 직원 B]
    "기쁨조가 필요한 거죠, 기쁨조. 분위기를 좋게 하기 위해서.."

    서울에 나와있는 일본 주재원들이 본사 임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한국 여직원들을 이용했다는 게 직원들의 생각입니다.

    [전 직원 B]
    "어깨 동무를 하고 러브샷 하고.. 출장 와서 처음 보는 분들하고 러브샷을 하는 건데 여직원들이 자진해서 하는 일이 아니죠."

    택시 안 성추행 피해를 당한 여직원의 경우 이런 회식 자리에서도 또 다른 성희롱을 당했다고 합니다.

    아시아 지역 출장소 소장이 서울에 와 회식이 끝난 뒤 원치 않은 신체 접촉을 한 겁니다.

    [직원/미쓰이스미토모 은행]
    "프랑스 식으로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 여직원들을 다 껴안고 볼에 뽀뽀를 하는 행동을 했고 저한테 왔을 때는 엉덩이까지 슬쩍 만졌어요."

    일본인 상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황당한 답이 돌아왔습니다.

    한국에선 다 그런 거 아니냐는 겁니다.

    [직원/미쓰이스미토모 은행]
    "이런 문화는 너네 한국 사람 문화가 더 심하지 않아? 접대문화? 한국에서 이런 거 다 배운 건데?' 뭐 조롱하듯이 그렇게 말을 하니까 너무 기분이 나빴어요."

    택시 안 성추행 역시 일본인들의 인식이 이렇다 보니 벌어졌다는 게 직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전 직원 C]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이 되게 많았기 때문에 사실은 뭐 언젠가 터질 일이 터졌다.."

    피해자는 사건 수습 과정에서도 회사 측은 문제를 덮기에만 급급했다고 말했습니다.

    [직원/미쓰이스미토모 은행]
    "당신들은 혐의가 하나도 없느냐, 자유로울 수 있느냐라고 물어봤더니 없다고 하면서 '(한국) 여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자의적으로 술자리에 갔고, 거기서 행동을 했다' 이렇게 하니까 진짜로 화가 나죠."

    일본어로 성희롱을 '세쿠하라(sexual+harassement)'라고 합니다.

    이 회사에서 '세쿠하라'는 회식뿐 아니라 업무 시간에도 일상적으로 일어났다는 게 직원들의 증언입니다.

    [전 직원 D]
    "일본인 남자 직원들이 사무실에서도 공공연하게 여직원들의 가슴, 다리, 엉덩이 같은 특정 신체 분위에 대해서 순위를 매겨요. 그런 얘기를 다 들리게 하면서 웃고 떠드는 거죠. 그럼 쟤네들이 또 '세쿠하라'를 하는구나 그래요."

    [전 직원 A]
    "치마를 입으면 '요새 어떤 남자 만나고 있냐. 뭐 속궁합은 잘 맞냐' 뭐 그런 건 뭐 너무 빈번해요. "

    이 지경이 되도록 왜 문제 제기를 못한 걸까.

    그 배경엔 보수적이고 군대식에 가까운 일본 특유의 직장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게 직원들의 설명입니다.

    "시끄러워! 말대답하지 마."

    직장 상사가 지위를 이용해 부하를 괴롭히는 것을 일본에선 '파와하라(power+harassement)'라고 부르는데, 이 은행에서도 '파와하라'가 만연해 누구도 쉽게 항의하거나 바른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전 직원 D]
    "전 사무실에 다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화를 내고 한 사람을 30분 넘게 면박을 줄 때도 있어요. "

    [전 직원 A/미쓰이스미토모 은행]
    "인격 모욕을 하는 거죠. 나이가 많아서 뒤떨어진다든지 맨날 옷을 막 그렇게 입고 꾸미기 바쁘니까 업무는 이런 식으로 하는 거 아니냐.."

    게다가 이 은행은 일본인 주재원들은 정규직이지만, 한국인 직원들은 계약직으로 채용돼 2년 뒤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는 구조입니다.

    한국인 직원들의 인사권을 일본인 상사가 가지고 있다 보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전 직원 D]
    "일본인 책임자들 눈 밖에 나기 싫으니까 그냥 다들 가만히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일본 직원들도 '우리 맘대로 해도 되는구나' 생각해서 계속 심해지고.. 악순환인 거죠."

    이런 직장 분위기였지만 택시 안 성추행 사건까지 당하고 나자 피해 여직원은 용기를 냈습니다.

    그동안 참기만 했던 이런 문제점을 외부에 알려 개선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고용노동부와 국가인권위원회의 문을 두드린 겁니다.

    하지만 이들의 대응은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사건 발생 약 3주 뒤 피해자는 자신의 성추행 사건과 함께 회사 내 전반적인 성차별 문제를 조사해달라며 고용노동부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습니다.

    [직원/미쓰이스미토모 은행]
    "정말로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인터넷으로 민원 신고 접수했는데 (컴퓨터) 엔터키를 막 치는데 손이 진짜 부들부들 떨렸어요.. (그래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거기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고용노동부 담당자는 신고 뒤 20일이 지나서야 1차 조사를 했습니다.

    그나마도 조사 중간에 합의를 권유하는 듯한 발언까지 합니다.

    [근로감독관/서울지방고용노동청]
    "작년에 제가 어린 친구들 여직원 두 명을 조사를 한 적이 있거든요. 근데 결론적으로는 합의가 되더라고요. (합의요?) 네, 금품보상..."

    피해자는 합의가 아니라 회사에 대한 전반적인 실태 조사를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직원/미쓰이스미토모 은행]
    "제가 원했던 거는 딱 하나였어요. 제발 현장 검증을 나가달라. 나가서 설문을 하든 아니면 1:1 면담을 하든 다른 사람들도 피해 사실이 있을 테니까 추가적으로 (조사) 좀 해달라고.."

    고용노동부는 결국 피해자가 여러 차례 민원을 제기하자 5개월이 지난 지난달 23일에서야 결과를 통보했습니다.

    택시 안 성추행과 해외 지점 출장자가 회식 자리에서 피해자의 엉덩이를 만진 두 가지 사건만 성희롱으로 인정했고, '여직원 술시중'과 같은 회사 차원의 조직적인 성희롱 문제는 현장 조사도 하지 않고"입증이 힘들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아직까지도 "다른 사건이 많아 바쁘다"는 식의 답변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관계자]
    "제가 좀 다른 사건들 때문에 지방 출장도 가고 하느라 선생님 사건을 조금 소홀히 한 건 맞아요.."

    그 사이 은행 측은 자신들이 선임한 국내 대형 법률사무소를 통해 피해자의 시아버지에게까지 연락을 취하며 진정을 취하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회식 때 자리 배치를 제비뽑기로 정하겠다"는 것을 개선안이라고 내놨습니다.

    [직원/미쓰이스미토모 은행]
    "어쨌든 간에 제비 뽑힌 사람은 운이 없어서 옆에 앉아서 술 따르라는 거잖아요."

    2580은 일본 도쿄에 있는 미쓰이스미토모은행 본점에 이번 사건에 대한 입장을 물었습니다.

    [홍보실 관계자/미쓰이스미토모은행 본점]
    "(서울지점에) 성희롱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질문지를 보내주시면 서울지점과 협의해 답변을 준비하겠습니다."

    서울지점의 고위 관계자는 답변을 피했습니다.

    [미쓰이스미토모 은행 고위 관계자]
    "(한국의 MBC입니다) 지금 회사 가는 중이라 죄송합니다.. (출장자 회식 때 여직원들을 동석시켰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서울지점은 대신 이메일로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은행 측은, 택시 안 성추행 가해자는 해고, 해외지점 소장은 경고 조치했으며, 하지만 "성희롱 등와 관련된 서울지점의 업무 환경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고용노동부는 2580의 취재가 시작되자 다음 주 중 은행으로 근로 감독을 나갈 것이며 지점장과 부지점장 등에 대한 재조사도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김종철 고용노동부 여성 고용정책과장]
    "성희롱을 유발하는 그런 근무 환경이 있는지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함으로써 전반적인 직장 문화를 개선토록 행정지도를 해 나가도록 할 예정입니다. 필요한 경우에 재조사에 착수할 수 있습니다."

    이번 일로 건강이 악화돼 병가를 신청한 피해자는 은행 측의 공식적인 사과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 사건이 마무리되면 다시 회사에 복귀해 정상적인 업무 환경에서 일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직원/미쓰이스미토모 은행]
    "피해자가 가는 길이 너무 일단 험난하고요. 이걸 구제해 달라고 국가기관에 진정을 냈는데 결국에 상처받는 사람은 저인 거예요 다시. 진짜 이게 진실이 알려져서 다른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들이 줄어들었으면 좋겠고.."

    예전보다 나아졌다지만 우리나라 직장 내 성희롱 상담 건수는 해마다 1000건을 넘어설 정도로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말처럼 성차별적인 분위기가 직장 '전체'에 퍼져 있는 경우라면, 앞으로도 피해는 더 확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민대숙 이사/여성노동법률센터]
    "(이번 사건에서) 이 성희롱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조직의 문제다라고 문제 제기를 한 것에 있어서 큰 의미가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문제는 거기에 대해서 이제 어떤 법 제도가 받쳐줄 수 있느냐라고 한다면 지금은 못 받쳐주는 상황이고.."

    어렵게 낸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헛된 메아리가 되지 않으려면 기업들 스스로의 철저한 반성과 교육, 그리고 정부의 강력한 조치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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