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2580
이필희 기자
이필희 기자
약속 지킨 엄마와 아들
약속 지킨 엄마와 아들
입력
2016-01-11 10:53
|
수정 2016-01-11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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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도, 잘 듣지도 못하는 엄마를 부끄러워하거나 귀찮아하지 않고 살뜰히 보살피며 살던 13살 종건이의 사연이 2005년 MBC <느낌표>에 소개됐습니다.
당시 방송에서 엄마는 각막수술을 통해 다시 세상을 보게 됐고, 엄마는 눈을 뜬 바로 그 순간, 13살 종건이에게 "우리도 더 좋은 일하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며 시청자들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그 후 10년, 이 모자의 약속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들의 세상살이를 따라가봅니다.
------------------------------------------------------------
**** 2005년 1월, MBC '느낌표' ******
[원종건]
"(둘이만 사는 거에요?) 네 저희 둘이만 (아빠는?) 돌아가셨어요."
[어머니]
"먼지로 인해 눈이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어요. 그러니깐 5년 전부터는 완전히 양쪽 눈이 안 보였던.."
[원종건]
"(엄마 크게 불러볼까요?) 엄마!"
[박진숙]
"종건이가? 엄마다. 울지 마 우리 아들.."
[박진숙]
"(잘 보여?) 잘 보여.. 고맙습니다. 종건아 앞으로 우리도 우리도 더 좋은 일 많이 할 수 있는 사람 되자."
지난 2005년, 기증받은 각막으로 눈을 뜨게 된 박진숙 씨 모자의 사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훈훈한 감동을 줬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다시 보게 된 순간 13살 아들에게 한 말은 우리도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11년, 그들의 세상살이가 궁금했습니다.
11년 전 그 집 그대로, 부엌에서 저녁을 차리고 있는 엄마 박진숙 씨를 만났습니다.
[박진숙]
"이제 오나? 내일 일하러 갈 거면서 일찍 오지그래. 밥 챙겨놨어, 밥 먹어."
눈물을 흘리며 엄마 품에 안겼던 13살 종건이는 건장한 청년이 됐습니다.
대학생이 되면서 크게 줄어든 어머니와의 식사 시간.
이제 인턴 생활이 시작되면 밥상에서 어머니를 마주할 일은 더 줄어듭니다.
걱정하는 아들에 어머니는 신경 쓰지 말라고 답합니다.
[원종건]
"앞으로 일을 하게 되면은 그것도 더 걱정이에요. 일을 하게 되면 더 집에 잘 못 들어올 텐데..."
[박진숙]
"효도해라 돈 많이 벌어와라 공부 잘해라 안 할 테니까 너 열심히 살아."
아들 종건 씨가 어머니를 걱정하는 이유는 어머니가 지금도 동네에서 폐품을 모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이 저물고 가로등 불빛이 골목길을 비추는 시각.
박진숙 씨가 폐품을 주우러 집을 나섭니다.
11년 전 이들의 사연이 방송된 후 각지에서 쏟아진 후원 제의를 박 씨는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시력을 되찾은 뒤 폐지 줍는 일이 훨씬 수월해진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박진숙]
"이거 해서 돈 많이 벌고 싶다는 그런 생각 아니에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해서."
10년 넘게 지속된 일상.
박 씨는 주로 저녁 시간이나 이른 새벽에 동네를 돌아다니는데 낮 시간을 피하는 건 이유가 있습니다.
[박진숙]
"낮에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할머니들. 먼저 보면 가지고 가고, 드리고, 그냥 신문 가지고 가시라고 그래요."
다음날 아침.
박 씨가 자신의 키만큼 모인 폐지를 싣고 집을 나섭니다.
행여 넘어질까, 조심조심 발을 내딛으며 비탈길을 내려갑니다.
오늘 가져온 폐지는 25kg.
고물상에서는 천 원을 건네줍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박 씨가 이번엔 프라이팬과 옷가지 등을 챙겨 다시 고물상으로 향합니다.
매일 가는 길이지만 늘 조심스럽습니다.
[박진숙]
"날씨가 추우니까 바닥이 미끄러워갖고 잘못하면 저만큼 날아가요."
상자 위에 올려놨던 비닐봉지가 땅에 떨어지고, 뒤따라온 차량에 서둘러 길을 비켜주려 하지만 몸은 급한 마음을 따라가지 못 합니다.
시력은 회복했지만 소리가 안 들리는 건 여전하다 보니 아찔한 순간도 많습니다.
5년 전에는 뺑소니 사고도 당했습니다.
[박진숙]
"후진하는 차 소리를 못 들어서요. 나를 갖다가 요만큼 날려 보내고, 안경은 저만큼 날아갔는데 (원망스럽지 않으세요?) 아니요, 살아가는데 얼마나 고달파서 그렇게 행동을 했겠나 싶어서 나 이해하고 있어요."
고물상에 도착한 박 씨가 이번엔 고철과 옷가지, 종이의 무게를 각각 따로 잽니다.
박 씨가 건네받은 돈은 6,200원.
[고물상 주인]
"요새 이제 파지 가격이나 종이류 가격이.. (많이 떨어졌나요?) 네, 많이 떨어졌어요. 그러니까 옷이랑 아까 그 프라이팬 같은 게 그게 원래 금액이 더 나가는 거거든요."
집으로 돌아오던 박 씨가 비탈길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고철 덕분에 평소보다 돈을 많이 받아 오늘은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박진숙]
"이 아파트들 하나도 안 부러워요. 하늘 바라보고 이 좋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박진숙 씨는 이렇게 번 돈을 매일 조금씩 모아 기부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모은 돈은 3만 원 남짓.
박 씨는 이 돈을 본인과 아들의 이름으로 한 복지시설에 보냈습니다.
[나용주 대리/새마을금고]
"매년 초쯤 오셔서 하시는 거 같아요. 제가 아는 거는 4년 좀 넘었고 그전에도 계속하셨다고 들었어요."
다음날 오후.
박진숙 씨가 집 앞 골목길에 들어선 1톤 트럭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트럭에서 내린 사람은 소보루빵을 만들어 파는 김태경 씨.
박 씨가 모은 빈병들을 날라주기 위해 트럭을 몰고 찾아온 겁니다.
김 씨 역시 언어 장애가 있지만 노숙자들에게 자신의 빵을 나눠주는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박 씨가 공병 판 돈을 김 씨에게 보태라고 하고 김 씨가 못 받겠다고 하면서 잠시 기분 좋은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박진숙]
"빈병 팔아서 그거 줄라고 그러는데 안 받으려고 실랑이 벌이지 말라고."
[이영희/수화통역사]
"누나가 부자 되면 그때 도와주면 제가 도움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대형마트.
박스에 차곡차곡 병을 담으니 소주 병은 310여 개, 맥주병은 80여 개에 달합니다.
[정재훈 검수팀장/대형마트]
"한 400개, 합쳐서 400개 면.. 이 정도면 몇 달은 모아 오신 거죠."
공병을 팔고 받은 돈은 만 7천 원 정도.
박 씨는 이 돈을 봉투에 담아 기어이 김 씨 손에 쥐어줍니다.
[박진숙]
"(내가) 돈이 없어서 내가 주는 거 아니라니까. 앞으로 더 많이 좋은 일하는데 도와줘."
평생 못 볼 거라고 생각했던 아들의 얼굴과 세상의 풍경을 다시 보게 된 이후, 박 씨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물론, 커피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고 최근에는 수제 비누를 만드는 재미에 빠졌습니다.
[박진숙]
"내가 눈 안 보였으면 이렇게 하겠어요? 늘 캄캄한 동굴 같은 그런 데서 살다가 바라보니까 잠시도 가만히 안 앉아 있어요. (시간이 너무 아까우세요?) 네, 여기 어디든지 무슨 일이든지 다 하고 싶고, 막 뛰어다녀요."
뭐라도 하겠다고, 폐지 주워 번 푼돈이라도 어디에든 내겠다고 박 씨가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 건, 새로운 인생을 선물 받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느 날 찾아온 그 선물을 혼자 누려선 안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11년 전 그날, 수술이 끝난 후.
카메라가 꺼지고 제작진이 모두 돌아가자 박 씨는 아들의 손을 잡고 그 길로 병실이 아닌 병원 1층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장기기증 서약을 했고, 종건 씨는 보호자 자격으로 서명을 했습니다.
종건 씨는 지금도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원종건]
"저는 장기기증을 받았던 감사함이 있었지만 또 어머니가 누군가한테 장기기증을 준다는 거에 대해 약간 반감이 있었어요. 내 어머니인데.. 내 엄마인데.. 나중에는 또 깨달음으로 다시 돌아왔죠."
종건 씨는 스무 살 성인이 됐을 때 역시 장기기증 서약을 하며 어머니와 뜻을 함께 했습니다.
또,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헌혈도 마흔세 번이나 했습니다.
[원종건]
"먼 훗날 베풀게 될 것이지만 장기기증 서약을 했고, 그리고 생존 시 할 수 있는 장기기증이라고 생각하는 게 헌혈이에요, 좀 주기적으로 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나눔이 대단한 게 아니라 그냥 나에게 있는 걸 조금씩 함께 가지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순간 종건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아졌습니다.
3년 전 네팔로 봉사활동을 떠났던 종건 씨.
단원들의 봉사 활동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게 역할이었지만, 현지에서 사진이 귀한 네팔 주민들에게 사진을 찍어주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이연경/네팔봉사 참가]
"600~700명 됐나? 정말 많았는데 그 친구들 한 명씩 다 사진을 찍어주고 그리고 학교 관계자분들의 그 집에 가서 가족사진도 찍어 주고 했던 거 같아요."
종건 씨는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사진을 찍어주자는 제안을 하게 됐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빨리 읽어낼 수 있었던 건 어머니 덕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원종건]
"어머니가 눈이 안 보이셨고 귀가 안 들리시니까 저는 눈이 안 보이고 귀가 안 들리면 어떨까 항상 생각했어요. 그 사람 입장에서 보고 그 사람 마음에서 보고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습성이죠.
장애를 가진 어머니, 늘 모자란 집안 형편, 그러나 자신은 운이 오히려 좋은 편이라고 했습니다.
[원종건]
"무엇보다 어머니를 잘 만난 것도 있겠지만 주변 환경도 정말 좋았어요. 아까도 친구들 다 만났지만 주변 친구들이 다 알아요. 다 아는데 제 앞에서 티를 안 내요. 그래서 차별 그런 것도 없었고 따돌림 왕따 이런 것도 전혀 없었어요. 저는 사람을 잘 만나왔던 거 같아요."
토요일 아침.
어머니가 고물상에 간 사이 종건 씨가 미역국을 끓이고 있습니다.
아들이 차린 어머니 생일 상입니다.
아들이 선물로 마련한 장갑과 목도리에 기분 좋아하면서도 어머니는 삶의 철학을 잊지 않습니다.
[어머니]
"우리가 돈이 많고 나중에 잘 살아도 이러고 살아야 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평범하게.."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눈물 흘리던 11년 전의 어머니와 아들.
엄마는 눈을 뜨며 못 보던 세상을 보게 됐고, 아들은 성장하면서 더 큰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박진숙]
"종건이가 설사 나한테 어찌한다고 해도 내가 원치 않아요. 안 받아요. 너대로 가서 살아라 할 거예요. 커서도 엄마 애 먹이는 사람 안 되려고 내가 일을 열심히 해요."
[원종건]
"점점 세상에 접어들고 있고 이렇게 성장하면서 그냥 어머님을 좀 많이 떠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런 면에서 불효자인 것 같고.."
그러나 각자의 위치에서 삶 그 자체에 감사하고, 작은 거라도 이웃과 나누자는 어머니와 아들의 11년 전 다짐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당시 방송에서 엄마는 각막수술을 통해 다시 세상을 보게 됐고, 엄마는 눈을 뜬 바로 그 순간, 13살 종건이에게 "우리도 더 좋은 일하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며 시청자들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그 후 10년, 이 모자의 약속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들의 세상살이를 따라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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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1월, MBC '느낌표' ******
[원종건]
"(둘이만 사는 거에요?) 네 저희 둘이만 (아빠는?) 돌아가셨어요."
[어머니]
"먼지로 인해 눈이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어요. 그러니깐 5년 전부터는 완전히 양쪽 눈이 안 보였던.."
[원종건]
"(엄마 크게 불러볼까요?) 엄마!"
[박진숙]
"종건이가? 엄마다. 울지 마 우리 아들.."
[박진숙]
"(잘 보여?) 잘 보여.. 고맙습니다. 종건아 앞으로 우리도 우리도 더 좋은 일 많이 할 수 있는 사람 되자."
지난 2005년, 기증받은 각막으로 눈을 뜨게 된 박진숙 씨 모자의 사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훈훈한 감동을 줬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다시 보게 된 순간 13살 아들에게 한 말은 우리도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11년, 그들의 세상살이가 궁금했습니다.
11년 전 그 집 그대로, 부엌에서 저녁을 차리고 있는 엄마 박진숙 씨를 만났습니다.
[박진숙]
"이제 오나? 내일 일하러 갈 거면서 일찍 오지그래. 밥 챙겨놨어, 밥 먹어."
눈물을 흘리며 엄마 품에 안겼던 13살 종건이는 건장한 청년이 됐습니다.
대학생이 되면서 크게 줄어든 어머니와의 식사 시간.
이제 인턴 생활이 시작되면 밥상에서 어머니를 마주할 일은 더 줄어듭니다.
걱정하는 아들에 어머니는 신경 쓰지 말라고 답합니다.
[원종건]
"앞으로 일을 하게 되면은 그것도 더 걱정이에요. 일을 하게 되면 더 집에 잘 못 들어올 텐데..."
[박진숙]
"효도해라 돈 많이 벌어와라 공부 잘해라 안 할 테니까 너 열심히 살아."
아들 종건 씨가 어머니를 걱정하는 이유는 어머니가 지금도 동네에서 폐품을 모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이 저물고 가로등 불빛이 골목길을 비추는 시각.
박진숙 씨가 폐품을 주우러 집을 나섭니다.
11년 전 이들의 사연이 방송된 후 각지에서 쏟아진 후원 제의를 박 씨는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시력을 되찾은 뒤 폐지 줍는 일이 훨씬 수월해진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박진숙]
"이거 해서 돈 많이 벌고 싶다는 그런 생각 아니에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해서."
10년 넘게 지속된 일상.
박 씨는 주로 저녁 시간이나 이른 새벽에 동네를 돌아다니는데 낮 시간을 피하는 건 이유가 있습니다.
[박진숙]
"낮에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할머니들. 먼저 보면 가지고 가고, 드리고, 그냥 신문 가지고 가시라고 그래요."
다음날 아침.
박 씨가 자신의 키만큼 모인 폐지를 싣고 집을 나섭니다.
행여 넘어질까, 조심조심 발을 내딛으며 비탈길을 내려갑니다.
오늘 가져온 폐지는 25kg.
고물상에서는 천 원을 건네줍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박 씨가 이번엔 프라이팬과 옷가지 등을 챙겨 다시 고물상으로 향합니다.
매일 가는 길이지만 늘 조심스럽습니다.
[박진숙]
"날씨가 추우니까 바닥이 미끄러워갖고 잘못하면 저만큼 날아가요."
상자 위에 올려놨던 비닐봉지가 땅에 떨어지고, 뒤따라온 차량에 서둘러 길을 비켜주려 하지만 몸은 급한 마음을 따라가지 못 합니다.
시력은 회복했지만 소리가 안 들리는 건 여전하다 보니 아찔한 순간도 많습니다.
5년 전에는 뺑소니 사고도 당했습니다.
[박진숙]
"후진하는 차 소리를 못 들어서요. 나를 갖다가 요만큼 날려 보내고, 안경은 저만큼 날아갔는데 (원망스럽지 않으세요?) 아니요, 살아가는데 얼마나 고달파서 그렇게 행동을 했겠나 싶어서 나 이해하고 있어요."
고물상에 도착한 박 씨가 이번엔 고철과 옷가지, 종이의 무게를 각각 따로 잽니다.
박 씨가 건네받은 돈은 6,200원.
[고물상 주인]
"요새 이제 파지 가격이나 종이류 가격이.. (많이 떨어졌나요?) 네, 많이 떨어졌어요. 그러니까 옷이랑 아까 그 프라이팬 같은 게 그게 원래 금액이 더 나가는 거거든요."
집으로 돌아오던 박 씨가 비탈길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고철 덕분에 평소보다 돈을 많이 받아 오늘은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박진숙]
"이 아파트들 하나도 안 부러워요. 하늘 바라보고 이 좋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박진숙 씨는 이렇게 번 돈을 매일 조금씩 모아 기부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모은 돈은 3만 원 남짓.
박 씨는 이 돈을 본인과 아들의 이름으로 한 복지시설에 보냈습니다.
[나용주 대리/새마을금고]
"매년 초쯤 오셔서 하시는 거 같아요. 제가 아는 거는 4년 좀 넘었고 그전에도 계속하셨다고 들었어요."
다음날 오후.
박진숙 씨가 집 앞 골목길에 들어선 1톤 트럭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트럭에서 내린 사람은 소보루빵을 만들어 파는 김태경 씨.
박 씨가 모은 빈병들을 날라주기 위해 트럭을 몰고 찾아온 겁니다.
김 씨 역시 언어 장애가 있지만 노숙자들에게 자신의 빵을 나눠주는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박 씨가 공병 판 돈을 김 씨에게 보태라고 하고 김 씨가 못 받겠다고 하면서 잠시 기분 좋은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박진숙]
"빈병 팔아서 그거 줄라고 그러는데 안 받으려고 실랑이 벌이지 말라고."
[이영희/수화통역사]
"누나가 부자 되면 그때 도와주면 제가 도움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대형마트.
박스에 차곡차곡 병을 담으니 소주 병은 310여 개, 맥주병은 80여 개에 달합니다.
[정재훈 검수팀장/대형마트]
"한 400개, 합쳐서 400개 면.. 이 정도면 몇 달은 모아 오신 거죠."
공병을 팔고 받은 돈은 만 7천 원 정도.
박 씨는 이 돈을 봉투에 담아 기어이 김 씨 손에 쥐어줍니다.
[박진숙]
"(내가) 돈이 없어서 내가 주는 거 아니라니까. 앞으로 더 많이 좋은 일하는데 도와줘."
평생 못 볼 거라고 생각했던 아들의 얼굴과 세상의 풍경을 다시 보게 된 이후, 박 씨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물론, 커피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고 최근에는 수제 비누를 만드는 재미에 빠졌습니다.
[박진숙]
"내가 눈 안 보였으면 이렇게 하겠어요? 늘 캄캄한 동굴 같은 그런 데서 살다가 바라보니까 잠시도 가만히 안 앉아 있어요. (시간이 너무 아까우세요?) 네, 여기 어디든지 무슨 일이든지 다 하고 싶고, 막 뛰어다녀요."
뭐라도 하겠다고, 폐지 주워 번 푼돈이라도 어디에든 내겠다고 박 씨가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 건, 새로운 인생을 선물 받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느 날 찾아온 그 선물을 혼자 누려선 안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11년 전 그날, 수술이 끝난 후.
카메라가 꺼지고 제작진이 모두 돌아가자 박 씨는 아들의 손을 잡고 그 길로 병실이 아닌 병원 1층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장기기증 서약을 했고, 종건 씨는 보호자 자격으로 서명을 했습니다.
종건 씨는 지금도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원종건]
"저는 장기기증을 받았던 감사함이 있었지만 또 어머니가 누군가한테 장기기증을 준다는 거에 대해 약간 반감이 있었어요. 내 어머니인데.. 내 엄마인데.. 나중에는 또 깨달음으로 다시 돌아왔죠."
종건 씨는 스무 살 성인이 됐을 때 역시 장기기증 서약을 하며 어머니와 뜻을 함께 했습니다.
또,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헌혈도 마흔세 번이나 했습니다.
[원종건]
"먼 훗날 베풀게 될 것이지만 장기기증 서약을 했고, 그리고 생존 시 할 수 있는 장기기증이라고 생각하는 게 헌혈이에요, 좀 주기적으로 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나눔이 대단한 게 아니라 그냥 나에게 있는 걸 조금씩 함께 가지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순간 종건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아졌습니다.
3년 전 네팔로 봉사활동을 떠났던 종건 씨.
단원들의 봉사 활동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게 역할이었지만, 현지에서 사진이 귀한 네팔 주민들에게 사진을 찍어주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이연경/네팔봉사 참가]
"600~700명 됐나? 정말 많았는데 그 친구들 한 명씩 다 사진을 찍어주고 그리고 학교 관계자분들의 그 집에 가서 가족사진도 찍어 주고 했던 거 같아요."
종건 씨는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사진을 찍어주자는 제안을 하게 됐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빨리 읽어낼 수 있었던 건 어머니 덕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원종건]
"어머니가 눈이 안 보이셨고 귀가 안 들리시니까 저는 눈이 안 보이고 귀가 안 들리면 어떨까 항상 생각했어요. 그 사람 입장에서 보고 그 사람 마음에서 보고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습성이죠.
장애를 가진 어머니, 늘 모자란 집안 형편, 그러나 자신은 운이 오히려 좋은 편이라고 했습니다.
[원종건]
"무엇보다 어머니를 잘 만난 것도 있겠지만 주변 환경도 정말 좋았어요. 아까도 친구들 다 만났지만 주변 친구들이 다 알아요. 다 아는데 제 앞에서 티를 안 내요. 그래서 차별 그런 것도 없었고 따돌림 왕따 이런 것도 전혀 없었어요. 저는 사람을 잘 만나왔던 거 같아요."
토요일 아침.
어머니가 고물상에 간 사이 종건 씨가 미역국을 끓이고 있습니다.
아들이 차린 어머니 생일 상입니다.
아들이 선물로 마련한 장갑과 목도리에 기분 좋아하면서도 어머니는 삶의 철학을 잊지 않습니다.
[어머니]
"우리가 돈이 많고 나중에 잘 살아도 이러고 살아야 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평범하게.."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눈물 흘리던 11년 전의 어머니와 아들.
엄마는 눈을 뜨며 못 보던 세상을 보게 됐고, 아들은 성장하면서 더 큰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박진숙]
"종건이가 설사 나한테 어찌한다고 해도 내가 원치 않아요. 안 받아요. 너대로 가서 살아라 할 거예요. 커서도 엄마 애 먹이는 사람 안 되려고 내가 일을 열심히 해요."
[원종건]
"점점 세상에 접어들고 있고 이렇게 성장하면서 그냥 어머님을 좀 많이 떠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런 면에서 불효자인 것 같고.."
그러나 각자의 위치에서 삶 그 자체에 감사하고, 작은 거라도 이웃과 나누자는 어머니와 아들의 11년 전 다짐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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