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2580
송양환 기자
송양환 기자
대학로 명물 콤비의 26년
대학로 명물 콤비의 26년
입력
2016-01-18 11:39
|
수정 2016-01-1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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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거리,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가면 주말마다 거리공연을 펼치는 두 남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한때 MBC 공채 개그맨이었던 김철민 씨와 KBS 열린음악회 사전 MC를 했던 윤효상씨입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노래와 토크가 어우러진 길거리 공연을 펼치며 26년째 명물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방송 출연은 왠지 어색하고 길거리 공연이 행복하다는 두 사람의 나이도 어느덧 50세입니다.
많은 게 변하고, 변하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세태에서 대학로 그 자리를 지킨다는 건 두 사람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청테이프 덕지덕지 붙은 낡은 기타와 북 하나 메고 흥겹게 노래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저 뒤에 앞으로 밀착!) "
모여든 관객들이 손뼉 치며 즐기는 동안 노래는 절정으로 달려갑니다.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헤이 드럼!"
실컷 오두방정을 떨더니 하는 말.
"저도 쪽팔립니다. 저 정상이에요."
[이한겸]
"공연하고 노래를 한 다음에 바로 개그를 하시니까 그 두 개를 같이 하니까 좋은 것 같아요."
한겨울에 외투도 없이 마로니에 공원을 후끈 달구는 이 두 남자는 대학로의 명물로 통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개그맨 김철민, 저는 일반인 윤효상입니다."
오래전부터 서울 한복판에서 젊음과 문화의 거리로 자리해온 대학로, 이곳에서 올해로 26년째 같은 자리에서 거리공연을 이어오고 있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26년.
대학로도 변하고, 세상은 더 많이 변한 그 세월 동안 고집스러우리만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두 사람의 공연에선 노래와 개그가 쉴 새 없이 섞여 나옵니다.
[김철민]
"우리 여성분 두 분.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예쁘면 좋겠어요."
"넌 4학년?" (6학년) "동안이구나."
"잘 생겼어. 어머니세요?" (네)
"아빠 닮았구나." (하하)
[윤효상]
"오페라 그거 뭐 별겁니까? 아~~"
자신 있게 선보인 오페라는 외마디 비명에 가깝지만 관객들은 즐겁습니다.
"아!! 아!! 아!!"
새해 덕담도 잊지 않습니다.
[윤효상]
"지금 박수치신 분들만 100세까지 건강하시고 올해 꼭 로또 1등 당첨돼서 회사 때려치우시길 바랍니다!"
"지금 박수치는 이 기회주의자들! 작년이나 올해나 똑같이 살아라!"
[백경민]
"말 하나하나에 위트가 있으시고 뜻을 담고 있잖아요. 위트 속에 뜻을 담고, 담고 하시니까."
맘껏 웃고 박수치는 동안 관객들은 스트레스를 털어냅니다.
[박정균]
"처음 봤는데 빨려 들어가요. 너무 유쾌하고 시원합니다. 너무 좋은데요. 많이 웃었어요. 건강해지는 것 같아요."
[문소영]
"아주 정말 크게 웃을 수 있었고, 단순히 웃는 게 아니고 재미도 있으면서 저희들이 살면서 꼭 반드시 지켜야 되는 그런 미덕이라든지, 미담이라든지, 교훈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또 같이 얻어 갈 수 있는."
철민 씨와 효상 씨가 만난 건 1989년.
마로니에공원에서 노래를 하던 철민 씨에게 효상 씨가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내밀며 다가갔습니다.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이듬해부터 함께 노래와 개그를 시작했습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무대가 됐습니다.
"여러분! 저희들을 봐주세요!"
"노래 한 곡하겠습니다!"
사람들 모으는 게 재미있어서, 사람들이 웃어주는 게 즐거워서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놀았습니다.
매일 살다시피 하다 보니 공원 비둘기 습성까지 개그 소재가 됐습니다.
[윤효상]
"비둘기들이 저쪽에 가서 저쪽 건물에 딱 앉는 타임이 있어요. 미리 알고 '저쪽에 앉습니다' 그러면 비둘기 저쪽에 딱 앉으면 '보십시오. 여러분 다 앉았죠? 이따 내가 새우깡 한 봉지 사줄게 이 자식들아!'"
후배 개그맨들 중에는 두 사람의 대학로 개그를 전설처럼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김현철 개그맨]
"저 사람은 진짜 웃긴데 타협하지 않는, 쉽게 얘기해서 개그맨 시험과 이런 것들에 타협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젊음의 문화를 유도하는 사람이다. 이 코드가 있었죠."
[윤성한 개그맨]
"고등 학교 2학년 때인가 대학로 마로니에를 우연치 않게 지나가는데 김철민 형님이랑 윤효상 형님이 공연을 하고 있는 거예요. 너무 배꼽 잡고 웃고 진짜로 이런 분들이 다 있나."
하지만 그 많던 비둘기도 줄었고 마로니에 공원도 세월 따라 변했습니다.
[김철민-윤효상]
"10년 전에는 농구대가 설치돼 있었거든요." ("여기야. 여기 농구대 있었고 여기 이쪽에 시계탑 있었고")
"시계 탑도 있었고 대학로 시계탑 앞에서 만납시다 해가지고 시계탑 앞에서 만나고 그랬거든요."
소극장이 즐비했던 대학로의 거리도 음식점과 커피전문점들로 하나둘 채워졌습니다.
대학로의 상징이었던 붉은 벽돌 건물은 이제 몇 남지 않았습니다.
[김철민-윤효상]
"음식점이나 극장도 뭐 자꾸 주인이 바뀌니까. 리모델링 다시 하고 건물도 다시 들어서고 하니까." ("옛날 모습 남아있는 건물은 몇 개 안 돼요") "제가 봐도 헷갈려 몰라요. 지금 봐도 다 자고 일어나면 바뀌니까."
주말이면 어김없이 두 사람의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에겐 두 사람 자체가 대학로를 기억하는 추억이고 낭만입니다.
[김은경]
"그때는 저희가 고등학생이었고요. 대학로에 차량을 통제해서 젊은이들이 축제를 했는데 그때는 5-6백 명 항상 모여서 공연을 해서 그때 한번 뵙게 됐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이제 세월이 한 이십몇 년 흐르고 엄마가 돼서 와도 항상 옛날 추억할 수 있고 항상 사람들한테 즐거움 주고.."
20대 청년이었던 두 사람도 올해 나이 쉰입니다.
'젊음의 거리'라는 대학로와는 안 어울리는 나이일지 모르지만 열정만은 청춘입니다.
[김덕화]
"솔직히 많이 좀 늙으셨어요. 그렇긴 한데 일단 여전하시고 너무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젊은 시절 대중스타가 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1994년 방송사 공채 개그맨에 합격한 철민 씨.
"준비 됐나? 됐다! 됐나? 됐다!"
동기들보다 먼저 배역을 꿰찼지만 대학로에서와는 달랐습니다.
[김철민]
"카메라에 제가 울렁증이 있어가지고 카메라 렌즈 딱 큐만 주면 제가 왠지 긴장하고 왠지 제가 대사를 다 못해요. 그래서 점점 '쟤는 울렁증이 있다' 소문나는 바람에 어느 프로에서도 '저기 김철민 씨 배역 있는데' 작가들이 섭외를 하면 PD가 '저 사람 울렁증 때문에 안 돼'."
"폭소클럽 " '이게 웃겨?'
효상 씨 역시 재야의 개그 고수로 인정받아 방송사 개그 프로그램에 입성하기도 했습니다.
"노래하려고 그러는데 뭘 쳐다봐요. 쳐다보지 마세요. 박수 치지 마세요. 그냥 혼자 하게 놔두세요 그냥 하지만 길거리에서 통하던 방식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고 합니다."
[윤효상]
"방송은 어쨌든 간에 제약이 필요하잖아요. 말과 행동과 언어의 그런 제약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게 참 저로서는 너무나 오래된 걸 갖다가 제재를 하려니까 스스로도 통제가 안 되고 좀 힘들었어요. 굉장히."
비록 방송에서 뜨지 못하고 다시 대학로의 삶으로 돌아왔지만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고 합니다.
[윤효상]
"편했어요 아주. 내 집처럼. 그래서 여기 와서 그냥 대자로 뻗어서 누워서 잤어요. 신문지 깔고."
함께 방송에 출연했던 개그맨들이 유명 스타가 되는 걸 보면서 자신들이 초라해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철민 씨는 친형인 이미테이션 가수 너훈아 씨가 재작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성공하지 못한 아픔이 더 컸습니다.
[김철민]
"우리가 이왕 시작한 거 넌 개그맨으로 잘 나가고 나는 꼭 가수로서 내 곡을 한번 해보겠다 그렇게 이제 맹세를 했는데 '너훈아'라는 예명 가지고 가짜로 살다가 그냥 진짜도 못해보고 돌아가시고. 저는 남아있지만 저도 역시 방송 3~4년 하다가 뭐 사라지듯해서 여기까지 와 있지만."
그렇게 돌아온 대학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를 맞았습니다.
[김철민]
"대학로는 저를 살려준 곳이고 저를 만들어준 곳이고 저를 있게 해준 곳이고 담벼락에 혼자 앉아 기타 치고 그게 마음에 상처가 치유가 되고 또 주말에도 공연하고 그러니까 대학로는 앞으로도 계속 갈 것 같습니다."
대학로 공연을 하지 않는 평일.
두 사람은 전국을 돌며 행사를 다닙니다.
오늘은 구미의 한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무대에 오르니 아이돌스타에게나 어울릴듯한 예쁜 피켓이 두 사람을 맞이합니다.
26년 공연 인생에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당황해서 좀처럼 하지 않던 실수도 나옵니다.
[윤효상]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정신이 없습니다. 이거 때문에 너무 반해가지고 지금 정신이 없습니다. 이런 거 처음 봤습니다."
두 사람을 경북 구미까지 초청한 오케스트라 지휘자 부부는 가족 여행 중에 대학로에서 우연히 본 공연에 매료됐다고 합니다.
[박은신/아첼 오케스트라 디렉터]
"지방 학생들이 길거리 공연 문화나 소위 대학로 소극장 문화나 이렇게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개그 공연을 길거리에서 한다는 게 저희한테 너무나 신선했는데 그 개그 공연하는 모습보다 저분들 열정을 좀 우리 애들한테 보여주면 어떨까."
원래 가난한 거리의 개그맨이지만 요즘처럼 행사가 없는 비수기에는 더욱 생활비 걱정을 해야 할 형편입니다.
철민 씨는 토요일과 일요일 새벽 야간 업소에서 MC를 보며 고단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토요일 새벽 5시, 야간업소에서 일을 마친 철민 씨가 온 곳은 대학로 근처 찜질방.
밤을 새우다시피하고도 불편한 잠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건 26년간 지켜온 대학로 공연의 약속 때문입니다.
[김철민]
"아침에 이제 첫 버스 타고 와가지고 여기서 자고 대학로 가죠. 그렇게 계속 여기서만 5~6년 정도 묵은 거 같아요. 여기서만 항상 주말에."
빠듯한 삶이지만 공연에서 번 돈으로 벌써 10여 년 째 여러 복지시설과 어린이재단 등에 물품과 기부금을 보내고 있습니다.
[임신혁 실장/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매월 적지 않은 금액을 꼬박꼬박 후원을 해주시고 계시지만 더 저희들한테 감사한 것은 거리에 있는 많은 분들이 그분들이 기부하는 내용을 보고 또 어려운 아이들에게 관심을 좀 가져 주는 큰 기회로 만들어주고 있다."
두 사람은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경찰의 보이스피싱 예방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대학로 관할 경찰서에서 알게 된 한 경찰관과의 인연이 계기가 된 겁니다.
[설인규/성북경찰서 강력반장]
"예방 차원에서 갈 때는 이 친구들이 가서 한 번 분위기 좀 잡아 주고 재능기부라고 요새 말하잖아요 그런 역할들을 많이 해주죠."
26년을 함께 했지만 팀명도 없는 개그맨 김철민, 일반인 윤효상.
[윤효상]
"팀명을 뭘 만들긴 만들어요. 근데 깨질줄 알았는데 어떻게 20년이 넘었어요. 툭하면 치고박고 싸우고 그러는데 깨질줄 알았거든요. 하물며 전화번호도 제가 스팸으로 해놓는 그런 친구인데도 어떻게 며칠에 한 번은 보고 싶은 거예요."
소박하지만 변함없는 그들의 개그, 이웃들을 향한 마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웃음을 전합니다.
[송주미]
"어려운 친구들을 위해서 이렇게 먼저 힘써주시면 저처럼 이렇게 저걸 보고 따라가는 사람이 많을 테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50살 동갑내기는 앞으로도 이 자리를 지키리라 다짐합니다.
[윤효상]
"외국에 이민 가셨다가 거의 20여 년 만에 오셨는데 다 변했는데 우리만 안 변했다고 그러면서 어떤 분들은 꼭 여기 계속 계시라고 다음에 또 오겠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가는 분들도 계시고."
[김철민]
"둘이서 날갯짓할 수 있는 곳이 유일한 곳이 현재 대학로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뭐 칼바람이든 비바람이든 폭풍이 몰아쳐도, 저희 둘은 아마 대학로를 지킬 거고."
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뒤쳐졌다고 말하고, 앞서 달려가지 못하면 패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세상이지만 대학로 마로니에, 그곳에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주며 꿈꾸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머문다는 것, 지킨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한때 MBC 공채 개그맨이었던 김철민 씨와 KBS 열린음악회 사전 MC를 했던 윤효상씨입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노래와 토크가 어우러진 길거리 공연을 펼치며 26년째 명물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방송 출연은 왠지 어색하고 길거리 공연이 행복하다는 두 사람의 나이도 어느덧 50세입니다.
많은 게 변하고, 변하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세태에서 대학로 그 자리를 지킨다는 건 두 사람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청테이프 덕지덕지 붙은 낡은 기타와 북 하나 메고 흥겹게 노래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저 뒤에 앞으로 밀착!) "
모여든 관객들이 손뼉 치며 즐기는 동안 노래는 절정으로 달려갑니다.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헤이 드럼!"
실컷 오두방정을 떨더니 하는 말.
"저도 쪽팔립니다. 저 정상이에요."
[이한겸]
"공연하고 노래를 한 다음에 바로 개그를 하시니까 그 두 개를 같이 하니까 좋은 것 같아요."
한겨울에 외투도 없이 마로니에 공원을 후끈 달구는 이 두 남자는 대학로의 명물로 통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개그맨 김철민, 저는 일반인 윤효상입니다."
오래전부터 서울 한복판에서 젊음과 문화의 거리로 자리해온 대학로, 이곳에서 올해로 26년째 같은 자리에서 거리공연을 이어오고 있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26년.
대학로도 변하고, 세상은 더 많이 변한 그 세월 동안 고집스러우리만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두 사람의 공연에선 노래와 개그가 쉴 새 없이 섞여 나옵니다.
[김철민]
"우리 여성분 두 분.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예쁘면 좋겠어요."
"넌 4학년?" (6학년) "동안이구나."
"잘 생겼어. 어머니세요?" (네)
"아빠 닮았구나." (하하)
[윤효상]
"오페라 그거 뭐 별겁니까? 아~~"
자신 있게 선보인 오페라는 외마디 비명에 가깝지만 관객들은 즐겁습니다.
"아!! 아!! 아!!"
새해 덕담도 잊지 않습니다.
[윤효상]
"지금 박수치신 분들만 100세까지 건강하시고 올해 꼭 로또 1등 당첨돼서 회사 때려치우시길 바랍니다!"
"지금 박수치는 이 기회주의자들! 작년이나 올해나 똑같이 살아라!"
[백경민]
"말 하나하나에 위트가 있으시고 뜻을 담고 있잖아요. 위트 속에 뜻을 담고, 담고 하시니까."
맘껏 웃고 박수치는 동안 관객들은 스트레스를 털어냅니다.
[박정균]
"처음 봤는데 빨려 들어가요. 너무 유쾌하고 시원합니다. 너무 좋은데요. 많이 웃었어요. 건강해지는 것 같아요."
[문소영]
"아주 정말 크게 웃을 수 있었고, 단순히 웃는 게 아니고 재미도 있으면서 저희들이 살면서 꼭 반드시 지켜야 되는 그런 미덕이라든지, 미담이라든지, 교훈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또 같이 얻어 갈 수 있는."
철민 씨와 효상 씨가 만난 건 1989년.
마로니에공원에서 노래를 하던 철민 씨에게 효상 씨가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내밀며 다가갔습니다.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이듬해부터 함께 노래와 개그를 시작했습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무대가 됐습니다.
"여러분! 저희들을 봐주세요!"
"노래 한 곡하겠습니다!"
사람들 모으는 게 재미있어서, 사람들이 웃어주는 게 즐거워서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놀았습니다.
매일 살다시피 하다 보니 공원 비둘기 습성까지 개그 소재가 됐습니다.
[윤효상]
"비둘기들이 저쪽에 가서 저쪽 건물에 딱 앉는 타임이 있어요. 미리 알고 '저쪽에 앉습니다' 그러면 비둘기 저쪽에 딱 앉으면 '보십시오. 여러분 다 앉았죠? 이따 내가 새우깡 한 봉지 사줄게 이 자식들아!'"
후배 개그맨들 중에는 두 사람의 대학로 개그를 전설처럼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김현철 개그맨]
"저 사람은 진짜 웃긴데 타협하지 않는, 쉽게 얘기해서 개그맨 시험과 이런 것들에 타협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젊음의 문화를 유도하는 사람이다. 이 코드가 있었죠."
[윤성한 개그맨]
"고등 학교 2학년 때인가 대학로 마로니에를 우연치 않게 지나가는데 김철민 형님이랑 윤효상 형님이 공연을 하고 있는 거예요. 너무 배꼽 잡고 웃고 진짜로 이런 분들이 다 있나."
하지만 그 많던 비둘기도 줄었고 마로니에 공원도 세월 따라 변했습니다.
[김철민-윤효상]
"10년 전에는 농구대가 설치돼 있었거든요." ("여기야. 여기 농구대 있었고 여기 이쪽에 시계탑 있었고")
"시계 탑도 있었고 대학로 시계탑 앞에서 만납시다 해가지고 시계탑 앞에서 만나고 그랬거든요."
소극장이 즐비했던 대학로의 거리도 음식점과 커피전문점들로 하나둘 채워졌습니다.
대학로의 상징이었던 붉은 벽돌 건물은 이제 몇 남지 않았습니다.
[김철민-윤효상]
"음식점이나 극장도 뭐 자꾸 주인이 바뀌니까. 리모델링 다시 하고 건물도 다시 들어서고 하니까." ("옛날 모습 남아있는 건물은 몇 개 안 돼요") "제가 봐도 헷갈려 몰라요. 지금 봐도 다 자고 일어나면 바뀌니까."
주말이면 어김없이 두 사람의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에겐 두 사람 자체가 대학로를 기억하는 추억이고 낭만입니다.
[김은경]
"그때는 저희가 고등학생이었고요. 대학로에 차량을 통제해서 젊은이들이 축제를 했는데 그때는 5-6백 명 항상 모여서 공연을 해서 그때 한번 뵙게 됐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이제 세월이 한 이십몇 년 흐르고 엄마가 돼서 와도 항상 옛날 추억할 수 있고 항상 사람들한테 즐거움 주고.."
20대 청년이었던 두 사람도 올해 나이 쉰입니다.
'젊음의 거리'라는 대학로와는 안 어울리는 나이일지 모르지만 열정만은 청춘입니다.
[김덕화]
"솔직히 많이 좀 늙으셨어요. 그렇긴 한데 일단 여전하시고 너무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젊은 시절 대중스타가 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1994년 방송사 공채 개그맨에 합격한 철민 씨.
"준비 됐나? 됐다! 됐나? 됐다!"
동기들보다 먼저 배역을 꿰찼지만 대학로에서와는 달랐습니다.
[김철민]
"카메라에 제가 울렁증이 있어가지고 카메라 렌즈 딱 큐만 주면 제가 왠지 긴장하고 왠지 제가 대사를 다 못해요. 그래서 점점 '쟤는 울렁증이 있다' 소문나는 바람에 어느 프로에서도 '저기 김철민 씨 배역 있는데' 작가들이 섭외를 하면 PD가 '저 사람 울렁증 때문에 안 돼'."
"폭소클럽 " '이게 웃겨?'
효상 씨 역시 재야의 개그 고수로 인정받아 방송사 개그 프로그램에 입성하기도 했습니다.
"노래하려고 그러는데 뭘 쳐다봐요. 쳐다보지 마세요. 박수 치지 마세요. 그냥 혼자 하게 놔두세요 그냥 하지만 길거리에서 통하던 방식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고 합니다."
[윤효상]
"방송은 어쨌든 간에 제약이 필요하잖아요. 말과 행동과 언어의 그런 제약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게 참 저로서는 너무나 오래된 걸 갖다가 제재를 하려니까 스스로도 통제가 안 되고 좀 힘들었어요. 굉장히."
비록 방송에서 뜨지 못하고 다시 대학로의 삶으로 돌아왔지만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고 합니다.
[윤효상]
"편했어요 아주. 내 집처럼. 그래서 여기 와서 그냥 대자로 뻗어서 누워서 잤어요. 신문지 깔고."
함께 방송에 출연했던 개그맨들이 유명 스타가 되는 걸 보면서 자신들이 초라해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철민 씨는 친형인 이미테이션 가수 너훈아 씨가 재작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성공하지 못한 아픔이 더 컸습니다.
[김철민]
"우리가 이왕 시작한 거 넌 개그맨으로 잘 나가고 나는 꼭 가수로서 내 곡을 한번 해보겠다 그렇게 이제 맹세를 했는데 '너훈아'라는 예명 가지고 가짜로 살다가 그냥 진짜도 못해보고 돌아가시고. 저는 남아있지만 저도 역시 방송 3~4년 하다가 뭐 사라지듯해서 여기까지 와 있지만."
그렇게 돌아온 대학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를 맞았습니다.
[김철민]
"대학로는 저를 살려준 곳이고 저를 만들어준 곳이고 저를 있게 해준 곳이고 담벼락에 혼자 앉아 기타 치고 그게 마음에 상처가 치유가 되고 또 주말에도 공연하고 그러니까 대학로는 앞으로도 계속 갈 것 같습니다."
대학로 공연을 하지 않는 평일.
두 사람은 전국을 돌며 행사를 다닙니다.
오늘은 구미의 한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무대에 오르니 아이돌스타에게나 어울릴듯한 예쁜 피켓이 두 사람을 맞이합니다.
26년 공연 인생에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당황해서 좀처럼 하지 않던 실수도 나옵니다.
[윤효상]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정신이 없습니다. 이거 때문에 너무 반해가지고 지금 정신이 없습니다. 이런 거 처음 봤습니다."
두 사람을 경북 구미까지 초청한 오케스트라 지휘자 부부는 가족 여행 중에 대학로에서 우연히 본 공연에 매료됐다고 합니다.
[박은신/아첼 오케스트라 디렉터]
"지방 학생들이 길거리 공연 문화나 소위 대학로 소극장 문화나 이렇게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개그 공연을 길거리에서 한다는 게 저희한테 너무나 신선했는데 그 개그 공연하는 모습보다 저분들 열정을 좀 우리 애들한테 보여주면 어떨까."
원래 가난한 거리의 개그맨이지만 요즘처럼 행사가 없는 비수기에는 더욱 생활비 걱정을 해야 할 형편입니다.
철민 씨는 토요일과 일요일 새벽 야간 업소에서 MC를 보며 고단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토요일 새벽 5시, 야간업소에서 일을 마친 철민 씨가 온 곳은 대학로 근처 찜질방.
밤을 새우다시피하고도 불편한 잠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건 26년간 지켜온 대학로 공연의 약속 때문입니다.
[김철민]
"아침에 이제 첫 버스 타고 와가지고 여기서 자고 대학로 가죠. 그렇게 계속 여기서만 5~6년 정도 묵은 거 같아요. 여기서만 항상 주말에."
빠듯한 삶이지만 공연에서 번 돈으로 벌써 10여 년 째 여러 복지시설과 어린이재단 등에 물품과 기부금을 보내고 있습니다.
[임신혁 실장/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매월 적지 않은 금액을 꼬박꼬박 후원을 해주시고 계시지만 더 저희들한테 감사한 것은 거리에 있는 많은 분들이 그분들이 기부하는 내용을 보고 또 어려운 아이들에게 관심을 좀 가져 주는 큰 기회로 만들어주고 있다."
두 사람은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경찰의 보이스피싱 예방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대학로 관할 경찰서에서 알게 된 한 경찰관과의 인연이 계기가 된 겁니다.
[설인규/성북경찰서 강력반장]
"예방 차원에서 갈 때는 이 친구들이 가서 한 번 분위기 좀 잡아 주고 재능기부라고 요새 말하잖아요 그런 역할들을 많이 해주죠."
26년을 함께 했지만 팀명도 없는 개그맨 김철민, 일반인 윤효상.
[윤효상]
"팀명을 뭘 만들긴 만들어요. 근데 깨질줄 알았는데 어떻게 20년이 넘었어요. 툭하면 치고박고 싸우고 그러는데 깨질줄 알았거든요. 하물며 전화번호도 제가 스팸으로 해놓는 그런 친구인데도 어떻게 며칠에 한 번은 보고 싶은 거예요."
소박하지만 변함없는 그들의 개그, 이웃들을 향한 마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웃음을 전합니다.
[송주미]
"어려운 친구들을 위해서 이렇게 먼저 힘써주시면 저처럼 이렇게 저걸 보고 따라가는 사람이 많을 테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50살 동갑내기는 앞으로도 이 자리를 지키리라 다짐합니다.
[윤효상]
"외국에 이민 가셨다가 거의 20여 년 만에 오셨는데 다 변했는데 우리만 안 변했다고 그러면서 어떤 분들은 꼭 여기 계속 계시라고 다음에 또 오겠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가는 분들도 계시고."
[김철민]
"둘이서 날갯짓할 수 있는 곳이 유일한 곳이 현재 대학로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뭐 칼바람이든 비바람이든 폭풍이 몰아쳐도, 저희 둘은 아마 대학로를 지킬 거고."
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뒤쳐졌다고 말하고, 앞서 달려가지 못하면 패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세상이지만 대학로 마로니에, 그곳에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주며 꿈꾸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머문다는 것, 지킨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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