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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2580
기자이미지 박진주 기자

오후 4시에 퇴근합니다.

오후 4시에 퇴근합니다.
입력 2017-07-10 10:14 | 수정 2017-07-10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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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한 대형 유통업체에서 일하는 미유키 씨는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4시면 퇴근합니다.

    다른 정규직 사원들과 같은 일을 하지만 근무 시간은 3시간 더 짧은 이른바 '한정 정사원'입니다.

    풀타임 근무에 비해 임금은 적지만 동일한 복리후생에 무엇보다 정년까지 고용이 보장돼 만족도가 높습니다.

    일본에서는 이처럼 근무 형태를 다양화해 근로 시간을 줄이고, 이를 통해 신규 고용을 창출하는 일자리 개혁이 진행 중입니다.

    경기 호황으로 일자리 보다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일본과 달리, 사상 최악의 취업난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일자리 개혁은 더 시급하고 중대한 과제입니다.

    기존 근로자들은 세계 최장 수준의 근로시간에 허덕이는 반면, 청년층과 실업자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이 같은 현실에서 일본 일자리 개혁이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지 진단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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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사이타마현의 대형 유통업체에서 일하는 구보 미유키 씨.

    시곗바늘이 오후 4시를 가리키자, 하던 일을 멈추고 퇴근 준비에 나섭니다.

    [구보 미유키/카인즈]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근무 중인 동료들을 뒤로하고 당당하게 사무실을 나선 미유키 씨는 곧장 보육원으로 향합니다.

    [구보 미유키/카인즈]
    "오늘 뭐 하고 놀았어? 유우"

    내일은 보육원에서 운동회가 열리는 날.

    여유 있게 대형마트에 들러, 운동회 간식거리를 챙깁니다.

    [구보 미유키/카인즈]
    "유우가 좋아하는 과자 있을까."

    2살 아들이 알러지 질환을 앓고 있어서, 매일 도시락 싸 줘야 하는데, 풀타임 정규직 때는, 퇴근해서 이것저것 장을 보고 나면, 귀가는 밤 9시나 돼서야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장을 보고 나서도, 아직 해가 떠 있습니다.

    [구보 미유키/카인즈]
    "영차~ 하하하 즐겁지? 한 번 더 미끄럼틀 탈까?"

    남들보다 2시간 빠른 퇴근은 미유키 씨에게 직장과 육아, 가정일 모두를 놓치지 않게 해주고 있습니다."

    [구보 미유키/카인즈]
    "역시 아이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는 게 제일 좋아요. 지금까지는 이렇게 함께 있을 시간이 없었거든요. 4시에 퇴근하면 아이와의 시간도 만들 수 있고 저의 시간도 생겨서 좋은 것 같아요."

    직장에 나와 하루 8시간 근무.

    최근 이런 전통적인 근무형태를 개혁하려는 다양한 움직임이 일본에서 확산되고 있습니다.

    정규직이면서도, 1주일에 4일만 근무하거나 오후 4시에 퇴근해도 되는 '한정 정사원' 제도입니다.

    미유키 씨는 이 회사에서 매장 상품 관리와 직원 채용 등을 담당하는 정규직입니다.

    다만, 출퇴근 시간이 다른 정규직 사원들과 다릅니다.

    통상적인 '나인투식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8시간 풀타임 근무가 아니라, 1시간 늦은 오전 10시에 출근해 2시간 빠른 오후 4시까지 하루 5시간만 근무하는 '한정 정사원'입니다.

    [구보 미유키/카인즈'한정 정사원']
    "오후에 아이가 열이 나거나 아플 수도 있어서 가능하면 중요한 일은 오전 중 집중해서 일하려고 하고 있어요. 일도 가정도 양립할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근무하려고 합니다."

    일본의 '한정 정사원' 또는 '한정 정규직' 제도는 근무 지역 또는 직무에 제한을 두거나 일부 시간만 한정해 일하는 정규직 일자리입니다.

    일반 정규직 사원보다 근무 시간이 짧은 만큼 월급 액수가 적지만 정년이 보장되고, 회사의 복리후생도 동일합니다.

    같은 회사 홍보팀 이무라 요시오 씨도 '한정 정규직'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출산과 육아에 지장을 받지 않으면서도, 정년까지 고용이 보장되는 엄연한 정규직이란 점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 업체에서 근무하는 여직원 500명 가운데 50명이 이런 한정 정규직 형태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무라 야스요/카인즈'한정 정사원']
    "긴 생애주기 중에서 일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죠. (근무 시간이 짧은 만큼) 월급은 줄지만 아이가 큰 후에도 계속 일하는 생활을 감안하면 장점이 아주 많아요."

    워킹맘인 오카모토 요코씨도 올해 초 '한정 정규직' 영업사원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근무 여건 가운데, 무엇보다 야근 등 초과 근무 없이 '칼퇴근' 할 수 있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라고 말합니다.

    아이를 기다리게 하거나, 약속 시간에 늦는 경우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오카모토 요코/비스타일 '한정 정사원']
    "(한정 정사원으로 일하면)잔업이 없어서 좋은 것 같아요. 밤늦게까지 일하는 일이 없고요. 퇴근 후 집에 돌아가서 아이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 제일 좋아요."

    기업 입장에서도 '한정 정규직' 제도는 실보다 득이 많다고 합니다.

    고용을 늘려 생산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과 함께 출산이나 육아 휴직을 마친 직원들의 회사 복귀를 도와 이직률을 줄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이와사키 야스히사/과장 카인즈 인사부]
    "육아, 출산을 계기로 여성이 캐리어를 포기하고 이직하게 되면 회사 입장에서도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지 못해 손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법보다 더 우대 혜택을 강화하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정비한 것이죠."

    늦게 출근하고 먼저 퇴근하다 보면 직무 책임감이 떨어질 것이란 우려도 있었지만, 이 업체는 7년 전 한정 정규직 도입 전에 비해 매출이 오히려 늘었습니다.

    [구보 미유키/카인즈'한정 정사원']
    "효율적으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8시간 근무할 때보다 더 최대한 일을 빨리 끝내려고.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더 집중해서 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지난 2015년 12월 대형 광고회사 덴쓰에 입사한 도쿄대 출신 24살 다카하시 마쓰리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당국의 조사 결과, 마쓰리 씨의 초과 근무 시간은 월 105시간.

    월 21일 근무 기준으로 하루 평균 5시간씩 매일같이 초과 근무를 했고, 심지어 퇴근 없이 53시간을 연속으로 사무실에서 근무한 적까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거의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다, 현실을 비관해 자살한 것으로 당국은 결론지었습니다.

    이 사건 등을 계기로 근로 시간문제가 이슈가 됐고, 일본 정부는 정규직의 장시간 노동은 막고 중간 개념인 '한정 정사원' 제도를 활용해 정규직을 다양화하는 과정을 병행하는 '일자리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아베 신조/일본 총리]
    "이 세상에서 '비정규직'이라는 용어를 아예 없애 나가겠습니다. 동시에 장시간 노동 관행을 바꿔 나가겠습니다. 하루종일 일하는 '맹렬 사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정되는 일본으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일자리 개혁에는 고용의 주체인 민간 기업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원칙 아래, 다양한 인센티브 제도를 먼저 도입했습니다.

    강요나 강제 없이,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 것입니다.

    일하는 방식을 다양화한 기업에는 인증마크를 부여해 세금 우대 조치와 인건비 지원 등 각종 혜택을 부여했습니다.

    [이와사키 야스히사/과장 카인즈 인사부]
    "쿠루민 마크를 취득했습니다. 우수 기업이라는 이미지 개선 효과도 있고 신입사원 채용에도 매우 유리합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도, 정부가 압박하지 않고, 기업들 스스로 정규직을 더 채용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다케다 고스케/일본 내각관방 참사관]
    "경제계 협조를 구해가면서 지금까지 해왔던 장시간 노동. 근로 방식 모델을 아예 바꿔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히구치 요시오 교수/게이오대]
    "회사 입장에서도 모든 사람을 정규직으로 하면 인건비가 많이 든다는 우려가 있어 도입을 주저하게 되는데 정부가 여러 종류의 보조금을 지원합니다. 이렇게 일하는 방식을 개혁한 기업에게 지원을 하기 때문에 (긍정적이다.)"

    이같은 일자리 개혁이 성과를 내고, 또 다양한 근무 형태가 생산성을 높인다는 점이 입증되면서, 일본 기업의 절반 정도가 일주일 4일 근무 또는 오후 4시 퇴근 등 '한정 정규직' 제도를 부분적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마쓰모토 다카코/비스타일 '한정 정사원']
    "정규직이기 때문에 일에 대한 책임감도 생기고 임금도 장기적인 고용도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일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근로 시간과 임금을 줄여 신규 고용을 늘리는 일자리 나누기, '잡 셰어링' 정책은 이미 8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시도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임금 삭감은 신입사원 위주로 이뤄졌고, 새로 만들어진 일자리 역시 인턴이나 비정규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용시장 상황이 8년 전보다 훨씬 나빠진 최근, 일자리 나누기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KT&G에 근무하는 이승종 씨, 올여름 휴가는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팀 직원들과 휴가 기간이 겹치지 않도록 조정하거나, 업무가 밀릴까 팀장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습니다.

    [이승종 / KT&G 직원]
    "몇 년 전부터 회사에서 '눈치 없이 휴가 가자'는 사내 캠페인을 하고 있어서 주어진 휴가 일수를 자연스럽게 제가 원하는 날짜에 지정해서 자유롭게 갈 수 있어 너무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고요."

    휴가 기간 그 빈자리엔 전문 대체 인력이 투입되기 때문입니다.

    기존 직원은 대체 인력 덕분에 편한 마음으로 휴가를 가고, 대체 직원은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이동수/ KT&G 휴가자 대체인력]
    "고정 업무가 아니고 휴가자를 대신해서 하는 업무인데요. 아무래도 대신하는 사람이 있다 보니 휴가 가시는 분들이 좀 덜 미안해하고 마음 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분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연차 휴가 보장은 물론, 근속 5년마다 3주간 휴가를 주는 리프레시 제도를 신설하고, 기존 1년이었던 육아휴직의 기간과 지원금을 2배로 늘렸습니다.

    근로시간 단축 등으로 절감된 인건비는 신규 고용에 활용돼, 105명의 비정규직 청년들이 새로운 정규직으로 채용됐습니다.

    [홍희정/ KT&G 정규직 전환 직원]
    "요즘 취업하기 정말 힘든데. 그래도 우리 회사는 휴가 사용 문화가 자유로워서 그런 거를 통해서 이제 새로운 후배들에게 기회도 제공하고 저도 그러한 혜택을 입은 것 같아서 굉장히 좋습니다."

    근로 시간을 줄여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시도에 지자체들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경상북도는 올해 말까지 산하기관 등에서 '주 4일제 정규직' 99명을 채용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의 한정 정규직 제도처럼 주5일제보다 보수는 20% 정도 적지만, 복지 등 처우는 정규직과 동일합니다.

    이로 인한 잉여예산은 신규 채용과 비정규직의 주 4일제 정규직 전환 등에 사용될 계획입니다.

    광주시는 산업단지 조성 등을 통해 일자리 수요를 창출하고, 기업은 일본의 '한정 정규직'과 비슷한 형태로 신규 채용을 늘려 새로운 일자리를 만든다는 구상입니다.

    [정경자 팀장/광주시 사회통합추진단 정책 TF]
    "싼 임금을 적용할 수 있는 그리고 부지를 확보할 수 있는 해외를 찾아서 기업들이 계속 떠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부분들은 투자를 촉진하지 않고는 신규 일자리가 창출되기가 힘들죠."

    노, 사 그리고 지역사회와 시민단체가 임금의 적정 수준을 설정해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첫 시도입니다.

    [이병훈 교수 /중앙대 사회학과]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임금도 좀 낮출 건 낮추고 그리고 여러 가지 유연성이란 부분도 노사 대타협을 이루고 하는, 기존의 고용관계라든가 노사 관계의 틀을 좀 넘어서서 혁신적으로 시도했다는 그런 점은 우리가 본받을 만하고."

    하지만, 자발적인 일자리 창출 노력은 아직 일부에 불과하고, 고용시장의 현실 역시 녹록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연간 근로시간은 2015년 기준 2천113시간, OECD 평균과 비교해 연간 43일, 한 달 보름 정도 더 일하는 셈입니다.

    이처럼 기존 근로자들이 장시간 노동에 내몰리는 뒤편에서 청년층과 실업자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고통받고, 중소기업들은 일할 사람을 못 구해 외국인에 의존하는 기형적 고용 형태가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정연정 교수/배재대학교 공공행정학과]
    "기업들에 대한 일종의 특혜, 일자리와 정부지원, 세제혜택 기업에 대한 이걸 직접적으로 연동시켜서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정부의 고용 촉진 정책에 대해서도, 기업들은 '그렇다면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다'고 버티고, 정규직 노조는 자신들의 일자리나 임금이 위협받을까 경계합니다.

    결국, 양보와 고통 분담 없이는 안 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읍니다.

    [정연정 교수/배재대학교 공공행정학과]
    "정규직은 그만큼 일하는 시간,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일자리 나눔이라고 하는 걸 할 수가 있는 거거든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정규직과) 임금 격차를 조금씩 좁혀가는 이런 투 트랙의 노동정책이 가장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런 정책 아닌가."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기록한 지난해, 상장기업 임직원 수는 오히려 1만 3천 명 넘게 감소해 고용 없는 성장이 아닌, '고용축소형 성장'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월급과 근무시간을 조금 줄이는 대신 삶의 질을 조금 더 추구하자는 사고의 전환이, 또 거창한 위원회나 압박적 정책이 아닌 기업과 근로자들의 자발적 참여와 동참이, 실제 고용 창출로 이어진다는 점을 일본의 사례는 시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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