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 뉴스
[스트레이트 14회 하이라이트] 카메룬 광산에는 실제 다이아몬드가 있을까?
[스트레이트 14회 하이라이트] 카메룬 광산에는 실제 다이아몬드가 있을까?
입력
2018-06-11 08:59
|
수정 2018-06-11 08:59
재생목록
◀곽동건▶
네, 그리고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 카메룬 광산에는 실제로 다이아몬드가 있었을까요?
◀주진우▶
그러게요.
◀곽동건▶
그런데 사실 이 부분도 아직까지 진실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카메룬 광산을 실제로 탐사했던 한 교수가 갑자기 숨을 거뒀기 때문입니다.
◀VCR▶
CNK가 우회상장을 계획하던 2008년 10월,
CNK의 카메룬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했다던
지역 국립대 김 모 교수가 갑자기 사망합니다.
그런데 김 교수가 왜 갑자기 숨졌는지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분분했습니다.
정확한 사망원인을 알기 위해 유가족을
접촉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김○○ 교수 유가족▶
"저는 할 말이 없으니까, 죄송합니다. 너무너무 제가 괴로움을 당해 가지고. 죄송합니다"
(아니, 어떤 괴로움을 받으셨는지...)
"아니요, 아니"
대규모 광산을 발견했다던 김 교수는 당시
CNK에 1억3천만원을 투자해 회사의 지분을
가진 이 회사의 이사였습니다.
김 교수는 카메룬을 5차례 방문해 모두 30일
정도 탐사작업에 참여했는데, CNK 측은 이미
이 때부터 다이아몬드 예상 매장량을 언론에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망하기 전, 김 교수는 동료들에게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말을 넋두리처럼 했다고 합니다.
◀김○○ 교수 동료▶
"'오덕균이 그 사람이 좀 많이 이용했다' 그런 얘기는 좀 들었거든요. 자기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거(탐사 결과)를 돈으로 연결하려고 하는 그런 과정에서 무리가 많이 따른 거죠"
김 교수가 사망하면서 그가 주도했던 매장량
탐사는 결국 중단됐습니다.
CNK 측은, 회사 내부 인력이 탐사를
마무리했다며 서울의 절반 정도의 면적에
다이아몬드 4억2천만 캐럿이 매장돼 있다는
자체 보고서를 냈습니다.
CNK는 이 넓은 면적에서 160개 정도의 구덩이를 파낸 뒤 매장량을 추정했습니다.
◀당시 매장량 탐사 참여자▶
"포크레인 가지고 그걸(원석 포함 토양) 파서 주면, 원주민들이 바가지에다 그걸 담아서 흔들어가지고 모래하고 분리시켜서 그걸 찾는 거죠"
외교부는 이렇게 CNK가 작성한 보고서를 검증도 없이 그대로 인용해 보도자료를 낸 것입니다.
매장량도 의문이지만 이 지역의 다이아몬드가
상품성이 있는지도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매장량 탐사 참여자▶
"근데 다이아몬드도 보석류가 있고 공업용이 있으니까 뭐 1불짜리가 있을 수 있고 몇 십 불짜리가 있을 수 있고 한 거니까..."
(공업용 다이아몬드 정도밖에 안된다고 그래서 채산성이 안 맞는다는 얘기도 나오던데)
"채산성이 안 맞으니까 생산을 안 했겠죠. 생산해도 적자가 나니까 회사가 그렇게 됐지. 안 그러면 뭐..."
그래서 다이아몬드 전문가들은 CNK 주식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보석업계 관계자▶
"아예 자체를 믿지를 않았어요. 그냥 사기꾼 또 나왔나 보다. 오랜 시간 투자해야 되는데 단 몇 년 만에... 있을 수가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애초에 말이 안 됐어요. 근데 말이 안 될 때, 긴가민가할 때 그때 외교부가 나서가지고 딱 사람들이 믿게 만들어서 주가 탁 튀고..."
투자자들의 피해가 속출하고 다이아몬드
매장량조차 의심스러워지면서 검찰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김 교수의 죽음으로 매장량에 대한
의혹은 해소되지 않았고, 오덕균 회장은
카메룬으로 출국한 뒤 바쁘다며 귀국하지
않았습니다.
검찰 수사에 응하지 않던 오덕균 회장은 출국
2년만에야 귀국했고, 검찰에 구속됐습니다.
그런데 오덕균 회장의 귀국 한 달 뒤인
2014년 4월 24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
앞의 승용차 안에서 CNK 전 부회장
임 모 변호사가 숨진채 발견됐습니다.
부장판사 출신의 임 변호사는 CNK의 우회상장과 오덕균 씨의 경영권 인수를 도왔던 핵심인물로 불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차 안에서는 번개탄과 컴퓨터로 출력한
유서가 발견됐고, 경찰은 이 죽음을 자살로
결론지었습니다.
임 변호사는 왜 재판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당시 담당 형사들을 수소문해 정확한 사망
경위를 물어봤지만, 이들은 당시 방송과 신문 등 대부분 언론에 보도됐던 이 사건 자체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사건담당 형사▶
"아니 나도 전혀 모르겠는데, 과정이 어떻게 된 거냐고. 그때 과장님 있었다면서 내가 막 (과장님께도) 물어봤더니 전혀 기억이 안 난대, 자기도..."
김 교수의 죽음과 임 변호사의 자살.
핵심 인물 두 명의 사망으로 결국 검찰은
가장 중요한 의혹에 대한 조사도 하지 못했고, 이후 수사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네, 그리고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 카메룬 광산에는 실제로 다이아몬드가 있었을까요?
◀주진우▶
그러게요.
◀곽동건▶
그런데 사실 이 부분도 아직까지 진실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카메룬 광산을 실제로 탐사했던 한 교수가 갑자기 숨을 거뒀기 때문입니다.
◀VCR▶
CNK가 우회상장을 계획하던 2008년 10월,
CNK의 카메룬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했다던
지역 국립대 김 모 교수가 갑자기 사망합니다.
그런데 김 교수가 왜 갑자기 숨졌는지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분분했습니다.
정확한 사망원인을 알기 위해 유가족을
접촉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김○○ 교수 유가족▶
"저는 할 말이 없으니까, 죄송합니다. 너무너무 제가 괴로움을 당해 가지고. 죄송합니다"
(아니, 어떤 괴로움을 받으셨는지...)
"아니요, 아니"
대규모 광산을 발견했다던 김 교수는 당시
CNK에 1억3천만원을 투자해 회사의 지분을
가진 이 회사의 이사였습니다.
김 교수는 카메룬을 5차례 방문해 모두 30일
정도 탐사작업에 참여했는데, CNK 측은 이미
이 때부터 다이아몬드 예상 매장량을 언론에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망하기 전, 김 교수는 동료들에게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말을 넋두리처럼 했다고 합니다.
◀김○○ 교수 동료▶
"'오덕균이 그 사람이 좀 많이 이용했다' 그런 얘기는 좀 들었거든요. 자기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거(탐사 결과)를 돈으로 연결하려고 하는 그런 과정에서 무리가 많이 따른 거죠"
김 교수가 사망하면서 그가 주도했던 매장량
탐사는 결국 중단됐습니다.
CNK 측은, 회사 내부 인력이 탐사를
마무리했다며 서울의 절반 정도의 면적에
다이아몬드 4억2천만 캐럿이 매장돼 있다는
자체 보고서를 냈습니다.
CNK는 이 넓은 면적에서 160개 정도의 구덩이를 파낸 뒤 매장량을 추정했습니다.
◀당시 매장량 탐사 참여자▶
"포크레인 가지고 그걸(원석 포함 토양) 파서 주면, 원주민들이 바가지에다 그걸 담아서 흔들어가지고 모래하고 분리시켜서 그걸 찾는 거죠"
외교부는 이렇게 CNK가 작성한 보고서를 검증도 없이 그대로 인용해 보도자료를 낸 것입니다.
매장량도 의문이지만 이 지역의 다이아몬드가
상품성이 있는지도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매장량 탐사 참여자▶
"근데 다이아몬드도 보석류가 있고 공업용이 있으니까 뭐 1불짜리가 있을 수 있고 몇 십 불짜리가 있을 수 있고 한 거니까..."
(공업용 다이아몬드 정도밖에 안된다고 그래서 채산성이 안 맞는다는 얘기도 나오던데)
"채산성이 안 맞으니까 생산을 안 했겠죠. 생산해도 적자가 나니까 회사가 그렇게 됐지. 안 그러면 뭐..."
그래서 다이아몬드 전문가들은 CNK 주식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보석업계 관계자▶
"아예 자체를 믿지를 않았어요. 그냥 사기꾼 또 나왔나 보다. 오랜 시간 투자해야 되는데 단 몇 년 만에... 있을 수가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애초에 말이 안 됐어요. 근데 말이 안 될 때, 긴가민가할 때 그때 외교부가 나서가지고 딱 사람들이 믿게 만들어서 주가 탁 튀고..."
투자자들의 피해가 속출하고 다이아몬드
매장량조차 의심스러워지면서 검찰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김 교수의 죽음으로 매장량에 대한
의혹은 해소되지 않았고, 오덕균 회장은
카메룬으로 출국한 뒤 바쁘다며 귀국하지
않았습니다.
검찰 수사에 응하지 않던 오덕균 회장은 출국
2년만에야 귀국했고, 검찰에 구속됐습니다.
그런데 오덕균 회장의 귀국 한 달 뒤인
2014년 4월 24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
앞의 승용차 안에서 CNK 전 부회장
임 모 변호사가 숨진채 발견됐습니다.
부장판사 출신의 임 변호사는 CNK의 우회상장과 오덕균 씨의 경영권 인수를 도왔던 핵심인물로 불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차 안에서는 번개탄과 컴퓨터로 출력한
유서가 발견됐고, 경찰은 이 죽음을 자살로
결론지었습니다.
임 변호사는 왜 재판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당시 담당 형사들을 수소문해 정확한 사망
경위를 물어봤지만, 이들은 당시 방송과 신문 등 대부분 언론에 보도됐던 이 사건 자체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사건담당 형사▶
"아니 나도 전혀 모르겠는데, 과정이 어떻게 된 거냐고. 그때 과장님 있었다면서 내가 막 (과장님께도) 물어봤더니 전혀 기억이 안 난대, 자기도..."
김 교수의 죽음과 임 변호사의 자살.
핵심 인물 두 명의 사망으로 결국 검찰은
가장 중요한 의혹에 대한 조사도 하지 못했고, 이후 수사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당신의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