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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2580
기자이미지 강나림 기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폭행·노역…형제복지원 감금자들의 26년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폭행·노역…형제복지원 감금자들의 26년
입력 2013-11-04 09:45 | 수정 2013-11-04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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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랑자 교화'라는 정부 시책에 따라 3천 5백여 명의 죄 없는 시민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감금과 폭행, 강제 노역 등 끔찍한 인권 유린을 당했던 '형제복지원' 사건. 이곳에서 각종 폭행과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만 공식적으로 5백 여 명. 1987년 이 사건이 세상이 알려졌지만, 형제복지원 원장은 정권의 비호 덕에 국가보조금 횡령죄만 인정돼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고, 인권유린을 당했던 피해자들은 아무런 보상이나 진상 규명조차 없이 흩어졌습니다.

    당시 9살 나이에 가족과 함께 형제 복지원에 갇혀 온갖 인권 유린을 당했던 소년이 26년 만에 사회를 향해 진상 조사와 명예 회복, 국가 배상을 요구하고 나서게 된 사연을 들어봅니다.

    =============================

    1987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부산 형제 복지원 인권 유린 사건.

    ◀SYN▶ MBC 뉴스데스크/1987년 6월 9일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 등 7명의 피고인은 원생들을 감금한 뒤 강제 노역을 시키고..."

    형제복지원이 폐쇄되면서 수감자들은 모두 풀려났습니다.

    그 중엔 어린 소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26년이 지났습니다.

    경북 칠곡군의 한 병원.

    당시 12살이었던 한종선 씨가 병문안을 왔습니다.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정신건강센터에 종선 씨의 아버지와 누나가 입원해 있습니다.

    준비해 온 간식 보따리를 풀어 놓는 종선 씨.

    이런 저런 대화를 이어가다 슬쩍 옛날이야기를 꺼냅니다.

    ◀SYN▶ 한영태/67세·한종선 씨 아버지
    (아버지가 형제복지원 잡혀 들어갔을 때 집에서 TV 보고 있었던 거 맞제?) “집에서 TV 보고 있는데 순사, 순경들이 들어와서 데려갔어.”

    세 가족이 모두 감금돼 있던 '형제복지원' 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종선 씨 아버지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SYN▶ 한영태/67세·한종선 씨 아버지
    “얘는 수사기관에서 보낸 애고 얘는 내 딸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예요?) “이게 11살 자식입니까! 11살이 어디 이런 애가 있습니까?”

    자기 딸과 아들은 11살과 9살 인데, 다 커 버린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식이 될 수 있냐는 겁니다.

    ◀SYN▶ 한영태/67세·한종선 씨 아버지
    “딸이 아니고 아들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 바른대로 말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딸 아들이 아닌데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종선 씨의 아버지와 누나는 심각한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서로 떨어져 산 지 벌써 26년.

    누나 신예 씨는 형제 복지원에 있을 때부터 정신 분열 증세가 나타났고,

    아버지도 형제복지원에서 나온 지 2년 만에 정신병원에 입원해 20여 년 째 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SYN▶ 한종선(38세)
    “한 가정에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 안에서 26년이라는 세월동안, 어떻게 보면 30년이죠. 84년부터 잡혀 들어갔으니까. 30년 동안 이산가족 되어있었던 거잖아요.”

    30년 전 종선 씨네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구두닦이 홀아버지 아래서 자랐지만, 그래도 단란한 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형제복지원이라는 곳에 들어간 이후, 이들의 삶은 완전히 풍비박산 났습니다.

    1984년 가을.

    9살 종선씨와 11살이던 누나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파출소에 왔습니다.

    잠시후 데리러 온다던 아버지는 밤이 늦도록 오지 않았고, 경찰은 남매를 커다란 차량에 태워 어디론가 보냈습니다.

    도착한 곳은 부산에 있는 부랑자 수용 시설인 형제복지원.

    그 곳은 생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마치 군대처럼 아동소대, 성인소대로 나누어 사람들을 감금한 채 강제 노역을 시켰고, 죽음에 이를 정도의 구타가 매일 반복됐습니다.

    ◀SYN▶ 한종선
    “머리에 방망이가 날아가서 골이 팍 터졌거든요. 애가 눈이 탁 터지면서 바로 탁 쓰러지는데 부들부들 하는 거예요. 머리는 피가 철철 흐르고..그런데 조장이 그런데도 막 패요.”

    온갖 기합과 고문, 성폭행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학대가 이어졌습니다.

    한 씨는 그런 끔찍한 기억들을 여러 장의 그림으로 그려냈습니다.

    ◀SYN▶ 한종선
    “너무 세게 맞으면 괄약근이 벌어져요.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똥이 막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조장이 이 새끼 똥 쌌다고 바닥에 흘린 똥 먹으라고 안 먹으면 또 두들겨 맞는 거고 먹으면 먹는 그날부터 별명이 똥개가 되는거예요.”

    종선 씨 남매가 악몽 같은 나날을 보내길 두 달 남짓.

    누나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더니 형제복지원 안에 있는 정신병동에 갇혔고, 남매를 두고 가버렸던 아버지마저 잡혀 들어왔습니다.

    ◀SYN▶ 한종선
    “아버지 처음 딱 만나자마자 아버지 우리 데리고 나가줘,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무 말도 못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왜 들어 왔어요 그러니까 집에서 티비 보고 있는데 경찰이 나오라 그래서 나갔더니 차에 실어서 데리고 왔다는 거예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부랑인을 단속하라고 지시했고, 경찰과 공무원들은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였습니다.

    길에서 구두를 닦거나 껌을 팔다가,

    술에 취해 벤치에서 잠을 자다가..

    혹은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형제복지원에 끌려왔습니다.

    종선 씨 아버지처럼, 가난에 찌들려 아이를 키우기 힘들었던 부모들은 정부가 지원하는 시설이라는 말만 믿고 자녀들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이렇게 들어오면, 나갈 길은 없었습니다.

    ◀SYN▶ 한종선
    “도망가다 잡혀온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대부분 병신 될 정도로 두들겨 맞아요. 피멍이 팅팅 부어서 건들기만 해도 터져 나오는 그런 상황이에요. 그런 거 너무 숱하게 보니까 나가면 죽는구나. 이 생각밖에 못하는 거죠.”

    당시 감금돼 있던 사람은 3천여 명.

    이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건, 우연히 복지원 근처 산등성이에서 강제 노역을 하던 원생들을 한 검사가 목격하면서였습니다.

    조사해보니 형제복지원이 지어진 이후 12년 동안 사망한 사람은 무려 513명.

    일부 사망자 시신은 병원에 해부용으로 팔려나가기도 했습니다.

    ◀SYN▶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 검사
    “단기간에 5백 명 이상이 사망했단 말이에요. 그 사람들이 다 자연사 한 거는 아니고 맞아죽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봤어요. 국가가 개입한 아주 전대미문의 인권유린 사건이었죠.”

    하지만 수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형제복지원을 만든 박인근 원장은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까지 받은 사회복지계의 '거물'이었고, 검찰 수뇌부는 노골적으로 수사 중단을 종용했습니다.

    ◀SYN▶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 검사
    “조사하기 위해서 경찰관들을 30명이나 선발해가지고 (형제복지원에) 보냈다가 그대로 그날 바로 철수를 당했죠. 그럼 저 사표를 내겠습니다. 하니까 검사장이 인상을 쓰더니 ‘사건 한 개 해가지고 영웅 되려고 하지마!’ 이게 대답이었어요.”

    당시 형제복지원이 지원 받았던 국가 예산은 매년 20억 원.

    이 가운데 박 원장이 11억 원 넘게 횡령한 사실까지 밝혀냈지만, 횡령액수를 축소하라는 외압이 이어졌습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김 전 검사는 박 원장에 대해 횡령과 감금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에 벌금 6억 8천만 원을 구형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법원은 "복지사회건설을 위해 헌신하고, 복지원을 최고의 시설로 발전시킨 점을 볼 때 징역과 벌금이 너무 무거워 부당하다"고 판결했습니다.

    이렇게 2년 동안 7번의 재판을 거치며 감형을 거듭한 끝에, 대법원은 박인근 원장에 대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습니다.

    벌금은 아예 사라졌고, 수천 명을 감금한 것에 대해선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SYN▶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 검사
    “당연히 유죄가 되어야 할 사건에 무죄를 선고한 거죠. 그냥 사법부가, 대법관들이 정권의 하수인들이었던 거죠. 전두환 정권이 바라는 바가 무죄였기 때문에 무죄로 선고한 거죠.”

    원장이 구속되면서 형제복지원은 폐쇄됐고, 감금됐던 3천여 명은 한꺼번에 나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12살이었던 종선 씨도 아버지, 누나와 떨어져 혼자 고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형제복지원 출신이라는 딱지가 붙은 종선 씨는 고아원에서도 학교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결국 성인이 된 뒤에 종선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막노동이 전부였습니다.

    그마저도 공사장을 전전하다 허리를 다쳐 생계가 막막해졌습니다.

    아버지와 누나의 소재를 찾은 건, 그 때였습니다.

    ◀SYN▶ 한종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했는데 거기서 아버지랑 누나 관계가 드러 난거죠. 아버지는 울산 언양 정신병원에 있었고 누나는 부산연산정신병원에 있었던 거죠.”

    형제복지원에 들어간 이후 삶이 송두리째 망가진 종선 씨.

    자신과 같은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14살에 형제복지원에 들어갔던 박태길 씨도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박인근 원장에게 발길질을 당한 뒤로 늑막염에 걸렸지만 치료도 못 받았고, 그래서 심장병과 척추 결핵까지 생겼습니다.

    형제원을 나온 뒤, 망가진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SYN▶ 박태길(43세)
    “신문도 팔아보고 껌도 팔아보고 구두 같은 거도 찍으러 다녀보고 중국집 배달도 해보고 그러니까 오래는 못하는 거지 숨이 차니까.”

    독한 진통제를 먹어야 하루를 버티는 박 씨..

    하지만 아픈 몸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형제복지원에서 조장을 맡으면서 다른 원생들을 때렸던 기억입니다.

    피해자였던 기억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가해자가 되어야 했던 사실이 지금까지 박 씨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SYN▶ 박태길
    “잘못하면 우리가 소대장한테 맞으니까 소대장한테 잘 보이고 또 안 맞으려면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도 때리고 이런 것이 더 제일 죄책감이 돼 있는 거죠.”

    형제복지원에서의 기억을 잊으려고 아예 부산을 떠났던 이상철 씨.

    하지만 그 곳 이야기를 시작하자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SYN▶ 이상철(49세)
    “발로 짓밟고 이런 식으로 짓밟아버리고 걷어차고 주먹으로 둘러치고..”

    14살 때 형제복지원에 끌려온 뒤 배울 기회는 영영 없었습니다.

    ◀SYN▶ 이상철(49세)
    그 당시에는 공부 같은 거 전혀 없었거든요. 규율 배우고 빨리 작업을, 집을 지어야 되니까..

    형제복지원을 나온 뒤에는 목욕탕 때밀이를 하며 간신히 숙식을 해결했습니다.

    돈을 버는 족족 그 때 다친 허리 약 값으로 다 쓰는 형편,

    억울했지만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순간 다시 그곳에 끌려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수십 년을 숨어 살다시피 했습니다.

    ◀SYN▶ 이상철
    “얘기하고 뭐 이렇게 따진다, 그러면 또 어떻게 됐을 거 같아요. 그 사람이 누구냐 또 이렇게 되면 다시 또 형제원에 갈 수가 있잖아 다시 끌려갈 수가 있잖아 그런 생각을 하지요. 그런..”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길거리로 내몰린 이후, 지금까지 그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지만, 어디에도 호소 한 번 못하고 20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SYN▶ 강경선 교수/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
    “거기서 사망만 안됐을 뿐이지 엄청난 정신적 피해, 또 불구자 정신병으로 되신 분들도 많다고 그럽니다. 이런 분들이 사회 어딘가에 피해자로 생존하고 계신 거거든요. 이런 분들은 자기들이 부랑자라는 이름으로 수용됐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밝히지도 못합니다.”

    반면 박인근 원장은 1989년 출소한 뒤 6개월 만에 다시 사회복지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2년 전까지 <형제복지지원재단>의 이사로 활동해 왔습니다.

    지금은 박씨의 셋째 아들이 대표 이사로 있는 이 재단은 중증장애인 요양원인 <실로암의 집>을 운영하고 있고, 부산 시내에 대규모 스포츠 센터와 온천도 경영하고 있습니다.

    박인근 원장을 비롯해 당시 인권 유린에 가담했던 가해자들.

    그리고 무고한 사람들을 가둬두고, 인권을 짓밟도록 강제수용 정책을 폈던 정부,

    국가 예산을 마구 퍼주면서 관리 감독에 소홀했던 부산시.

    진상을 은폐, 축소하는데 급급했던 사법부.

    이들 모두 책임을 지기는커녕, 그동안 제대로 된 사과 한 마디 없었습니다.

    ◀SYN▶조영선 변호사
    “형제복지원이 국가 묵인 하에, 또는 국가가 자행한 국가 폭력의 피해자라는 걸 정확하게 밝혀서 이들의 명예회복, 신용 회복을 해주는 게 우선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의 한 극단 연습실.

    배우들이 연기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끔찍했던 형제복지원 사건을 담아 낸 연극이 오는 15일부터 무대에 오릅니다.

    이제서야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세상에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지금까지 연락이 닿은 피해자는 40여 명.

    다른 생존자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감금에서 풀려난 뒤에 어떤 2차 피해를 입고 살았는지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SYN▶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 검사
    “형제복지원의 진상이 제가 그렇게 발버둥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10분의 1정도 규명이 됐나. 지금 시점에라도 국가가 진상을 규명하고 배상할 것은 배상해주는 게 맞다.”

    온 국민을 경악케했던 인권유린 사건,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형제복지원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권리조차 주장 할 수 없었던 약자들,

    이제라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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