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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2580
기자이미지 권희진기자

'구준생'의 하루

'구준생'의 하루
입력 2015-05-04 09:19 | 수정 2015-05-18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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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시행된 9급 공무원 채용 시험에 무려 20만 명 가까이 몰렸습니다.

    청년실업이 심화되고 공무원 채용에 연령제한이 사라지면서 9급 공무원 준비생, 이른바 '구준생'이 늘고 있는 것.

    연봉은 적지만 정년이 보장된 안정된 일자리를 찾아 20대부터 50대까지 구준생이 되고 있습니다.

    새벽 강의로 하루를 시작해 끼니는 컵밥으로 때우고, 알바와 공부를 병행하는 구준생의 하루를 따라가봅니다.

    =====================================================================

    국가직 9급 공무원 필기시험장.

    100분에 걸쳐 5과목, 100문제를 푼 수험생들이 일제히 시험장을 빠져나옵니다.

    표정은 대부분 굳어 있습니다.

    이날 하루 전국 260여 곳의 시험장에 동시에 20만명이 몰렸습니다.

    [김주혜/21]
    "요새 취직하기 힘드니까..아무래도 공무원이 여자가 준비하기에는 좋겠다고 생각해서.."

    [장준하/26]
    "청년실업 이런게 힘들잖아요. 취업하기가. 취업난이. 그래서 거의 어렸을 때부터 많이 생각을 해왔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국가시험으로는 60만명이 응시했던 지난 수능시험 다음의 최대 규모, 평균 경쟁률 52:1, 10명을 뽑는 교육행정직은 무려 73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9급 공무원으로 향하는 바늘 구멍같은 통로는 지망생들이 늘어나면서 점점 더 좁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없다는 9급 공무원 준비생, 구준생들의 사정을 들어봤습니다."

    새벽 4시 50분, 짙은 어둠이 깔려있는 서울 노량진의 학원 앞에 공무원시험 준비생들이 길게 줄을 섰습니다.

    4시간 뒤 시작하는 학원 수업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자리에 앉기 위해섭니다.

    [신재웅]
    "매일 하시는 거예요?"
    "네 매일 4시 반쯤 나와가지고.."
    "아무래도 간절하니까 빨리 합격하고 싶으니까"

    [박수현]
    "힘들다는 생각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서 하긴 하는데 오늘만 하자 하면서 한 달이 지났어요. 최종 합격을 하면 가서 연수받는 곳이 있어요. 매일 아침에 거기 간다고 생각하고 일어나요."

    새벽 6시, 학원 문이 열리고 줄지어 기다렸던 준비생들이 앉을 자리에 차례차례 표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자리를 확보한 준비생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 아침 해가 솟아오릅니다.

    주머니 가벼운 구준생들은 한 교회의 식당으로 모여듭니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카레밥

    김이 나는 뜨거운 밥에 노란 카레를 부어 한술 뜨자 몸도 마음도 조금 든든해집니다.

    [박태훈]
    "아침마다 계속 똑같이 밥값 사천원 오천원이 나가는데 그걸 쓰면 너무 부담이 크니까 여기서 공짜로 주는 밥을 먹고 그러죠."

    이 교회가 노량진 수험생들의 아침밥을 챙겨준 지는 15년이 됐습니다.

    [나이남 권사/노량진 강남교회]
    "여기 와서 밥먹고 너무 감사했다고 그래서 합격해서 이거 보낸다고 그러면서 편지도 써서 보내주시고 그래요."

    아침 8시 40분부터 시작되는 형사소송법 강의.

    대형 모니터만 10대가 설치된 대형강의실이 5백명 구준생들의 체온으로 달아오릅니다.

    [신광은/학원 강사]
    "4시에 여기를 나오려면 일어나는 시간이나.. 생각하면 잠을 거의 못자잖아요. 그런거 생각하면 굉장히 안쓰럽고 그런건 항상 있습니다."

    오로지 합격만을 꿈꾸며 어려움을 견딘다는 구준생들.

    노량진에선 모두가 절박합니다.

    9급 교육행정직 공무원을 준비중인 27살 강 모 씨는 새벽 6시부터 독서실 근무를 시작합니다.

    [강 모 씨]
    "월요일 같은 경우는 한주간 퇴실할 사람이나 이런거 체크도 해야하고 월요일이 좀 바빠요."

    오전에 6시간을 일하면서 짬짬이 시험공부를 하고 나면 이내 점심 시간.

    오후엔 보습학원에서 서너 시간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6명의 준비생들과 함께 쓰는 방.

    3개의 2층 침대 가운데 한 개의 윗 칸만이 온전히 강 씨의 공간입니다.

    침대 1층보다 3만원이 싸서, 월세 23만원을 냅니다.

    6개 침대의 주인들은 침대를 커다란 천으로 가려서 자신들의 공간을 확보합니다.

    [강 모 씨]
    "집에 들어와서 씻고하다 보면 12시 좀 넘는데 잠은 거의 한 시쯤에 자요. 이런 거 보다가 자요."
    "중요한 짐들은 다 여기다 놓겠네요. 이건 뭐에요?"
    "이건 자기 전에 바르는 것들."

    6개의 침대가 놓인 방들이 가득한 이 고시텔에선, 길건너 사육신 공원에 흐드러지게 핀 봄꽃들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강 씨가 분신처럼 보관하고 있는 두툼한 노트들.

    지리교사 임용고시를 위한 4년 동안의 노력의 흔적들이 깨알같은 글씨로 남아있습니다.

    [강 모 씨]
    "임용 중에서도 굉장히 안 뽑는 중에 속해요. 만약에 9백명이 지원하면 전국에서 60명 뽑는 거고.."

    내리 4년의 낙방, 꿈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 모 씨]
    "스펙이 없어요. 교원자격증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해서 생각을 하가 그래도 스펙없이 좀 빠르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다 보니까 교육행정.."

    강 씨는 주 6일의 독서실 근무와 주 3일의 보습학원 아르바이트로 매달 80만원을 법니다.

    이 돈으론 방값, 밥값은 해결해도 노량진의 학원비까지 낼 수는 없습니다.

    [강 모 씨]
    "그게 제일 힘든 거 같아요. 공부하는 중에 남들은 솔직히 학원도 다 종합반 다니거나 아니면 과외를 따로 받거나 그런 식인데.. 이렇게 해서 되나? 되려나?.."

    보란 듯이 이곳을 떠나겠다는 각오, 그 힘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견디고 있습니다.

    [강 모 씨]
    "결과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부모님들도 제가 고향 내려가는 것조차도 눈치를 보게 되더라고요. 내몰리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하나. 여기도 제 공간은 아니잖아요. 잠깐 있는다 뿐이지."

    한 고시촌 식당의 저녁 식사 시간.

    35살 김 모씨가 접시를 닦고 있습니다.

    부페식 식당이다보니 닦아야 할 접시는 쉴새 없이 몰려옵니다.

    하루 세 시간, 정신없이 설겆이를 하고 나면 하루 2만 1천원을 벌 수 있습니다.

    [김 모씨]
    "힘들지 않으세요?"
    "안 힘들어요. 시간이 짧잖아요."
    "그래도 쉬지도 못하고.."
    "쉬는데...한 달에 두 번 쉬는데.."

    사범대학을 졸업한 김 씨는 고향을 떠나 4년째 경찰직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식당에서 버는 매달 50여 만원의 돈으로 주거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며 공부를 합니다.

    [김 모씨]
    "정말 하소연할 데도 없고 그래도 나는 일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매일 조금이라도 남들보다는 시간투자는 많이 못하지만 공부는 하는데 점수가 왜 이것밖에 안나올까 자괴감도 들고.. 씁쓸하죠 많이.."

    몇 차례 시험에 실패하자, 수험생이 된 지 4년이 지나갔습니다.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그에게 다른 선택은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김 모씨]
    "사회적으로도 여기서 공무원시험을 뭐 5,6년 했다 그러면 뭐 병신으로 생각을 해요. 정말 얘는 뭐한거냐. 인생 헛살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요."

    끝을 기약할 수 없는 막막함과 외로움을 이겨내야 하는 게 가장 힘들다고 합니다.

    [김 모씨]
    "수험생활 시작한 이후로 시간이 자기 인생의 시계가 정지한 것 같다고 얘기하거든요.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요. 시험합격하기 전까지. 자기가 얼마나 노력했던 얼마나 간절하건."

    그렇지만 이곳을 떠나 김 씨가 돌아갈 곳은 없습니다.

    [김 모씨]
    "내가 돌아갈 곳이 없는 거예요. 늪이라는 게 나가려고 하면 더 빠지잖아요. 내가 여기서 정말 간절히 나가고 싶은 의지는 있게 되는데. 그걸 사회가 받아주지 않고 부모님이 안아주지 않으니까 그 사람들은 그냥 계속 낙오자로 찍혀 있는거예요. 인생을 허비하는."

    30살 구준생 나영진씨도 작년, 노량진으로 들어왔습니다.

    매일 밤 10시 반부터 2시간 정도, 독서실을 청소하며 용돈을 벌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늘 불안감이 따라다닌다고 말합니다.

    [나영진]
    "매사 다 불안하고 공부를 하든 안하든 다 불안해요. 매일 불안해요.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공부를 해도 스트레스고 안해도 스트레스고 그래요."

    합격이 모든 걸 보상해줄 거라고 믿고 있을 뿐입니다.

    [나영진]
    "지금 시대가 뭐 공무원만한 게 없다고 하니까. 거의 뭐 정말 일류 명문대 나오지 않은 이상은 거의 이렇게 다들 생활하고 있지 않은가. 취업 준비하면 거의 다 일순위가 공무원을 생각하고 있고.."

    갑자기 직장을 잃은 중년들도 9급 공무원 시험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사업 실패로 직업이 없어진 게 5년전.

    50세 구준생 김 모씨는 9급 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늦은 밤, 국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김 모씨(50세)]
    "이거 아니면 할 게 없거든요. 다른거 갈데가 없으니까 내가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 그러면 너무 막막한 거에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명문대학 법학과를 나왔다곤 하지만 40대 중반의 실직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대형 마트에서 월수입 100만원의 비정규직으로 일을 해봤지만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김 모씨(50세)]
    "계약직, 정직원, 비정규직 이렇게 나눠질 때 젊은애들이 대하는 그런 모습들이..나도 배울만큼 배운 사람인데..아들벌쯤 되는 애들이 그렇게 하면 누가 자존심이 안 상하겠습니까."

    9급 공무원의 첫해 월급은 127만원.

    올해 합격하더라도 정년인 60세에 받는 월급은 190만원 정도에 불과하지만 김 씨는 3년째 9급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김 모씨(50세)]
    "저희 어머니는 제가 이렇게 생활하는 거 몰라요. 어머니는 직장에 다니는 줄 알아요. 아침에 나가면 일 잘 다녀와라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데 속으로 어머니께 죄송스럽죠."

    김 씨는 가끔 독서실 옥상에 올라 환하게 빛나는 여의도의 고층 빌딩과 한강 다리를 바라봅니다.

    [김 모씨(50세)]
    "여기 올라와서 차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그런거 보니까 나도 빨리 이런 사회에 적응해야겠구나.."

    지난 2009년 공무원 시험의 연령제한이 폐지됐습니다.

    이후 40대 응시자의 숫자는 그동안 3배 이상 늘어 올해는 8천명 이상이 시험을 봤습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 출산 등으로 경력이 단절된 기혼 여성까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9급 공무원에서 희망을 찾고
    있습니다.

    [김 모씨(50세)]
    "할 것도 없어요. 대학간다고 해서 만사형통이었던 20년 전 그게 대학가라가 그냥 공무원해라로 바뀐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풍요로 향하는 사다리는 가팔라지고, 취업의 문턱은 높아만 갑니다.

    높은 연봉은 아니지만 밀려나지 않는 일자리, 9급 공무원이 되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탈출구라는 구준생들의 희망은 간절합니다.

    노량진역을 벗어난 열차가 한강철교를 건너 서울역으로 향합니다.

    길고 고단했던 구준생들의 오늘이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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