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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2580
기자이미지 노경진 기자

더 짧게, 더 얕게

더 짧게, 더 얕게
입력 2015-05-26 11:20 | 수정 2015-05-2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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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컷도 길다, 이젠 3컷으로 줄어든 웹툰.

    1시간짜리 드라마를 볼 시간이 없으니 5분으로, 심지어 캠핑도 시간이 없으니 반나절 고기만 굽고 오는 시대.

    전문가들은 이렇게 모든 것이 짧게 생산되고 소비되는 세태에 '스낵컬처(snack culture)'라는 이름까지 붙였습니다.

    짧아서 편하고 다양해서 좋다지만 정작 그 사이에 놓치고 있는 건 없을까.

    무엇이든 쉽게, 빨리, 짧게 습득하는 현대인, 그 많은 것들은 과연 우리 머릿속에, 마음속에 얼마나 저장되고 있을까?

    2580이 서울의 한 대학병원 연구팀과 진행한 실험에선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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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쇠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돼지고기.

    야외에서 흔히 그렇듯 아빠가 굽고,

    아이들은 기대감에 가득차 맛보기 시작합니다.

    휴대용 가스버너에 라면도 끓여 먹고 캠핑용 테이블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여느 캠핑장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자연 속 캠핑장이 아니라 서울 도심 한복판의 고깃집입니다.

    바쁜 아빠, 더 바쁜 엄마.

    일요일 저녁이나마 집 앞의 캠핑형 고깃집에서 기분을 내 본 겁니다.

    [김유숙]
    먼 곳으로 오가는 것은 사실 좀 직장인으로서 부담이 되고 그런데, 집과 되게 가까운 곳에 이런 기분을 느길 수 있는 곳이 있으니까 와서 마치 캠핑온 것 같이 먹으니까 아주 재미있네요.

    교외로 나가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피우며 하룻밤 이상 머무르는 캠핑을 1시간여로 압축해 즐긴 셈.

    [김재은]
    여기 딱 왔을 때 장비 챙겨서 캠핑하러 가는 건 줄 알았는데 여기서 먹으니까 좀 뭔가 이상한 생각 들기도 했는데 먹으니까 또 맛있고..

    일상으로 복귀하면 엄마 김유숙 씨의 삶은 더욱 빠르게 돌아갑니다.

    업무 중 잠시 짬이 나도 휴식을 취하기보단 스마트폰으로 SNS 뉴스를 훑어가며 하루 소식을 정리하거나 짧은 강의 동영상을 보면서 유용한 지식을 쌓기도 합니다.

    [김재은]
    해야할 일도 사실 많은데 메시지 혼자 제가 볼 내용들을 오랜 시간 투자해서 하긴 그렇고요. 잠깐잠깐 짬을 내서 볼 때는 너무 길지 않은 내용 그런 것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출퇴근 지하철에서도, 횡단보도 앞 신호를 기다릴 때조차도 우리는 손 안의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무엇을 보고 계신가요?

    동영상, 웹툰, 카드뉴스..

    단 1초라도 우리의 시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콘텐츠들은 점점 더 다양해지고 또 짧아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만 방영되는 이른바 '웹 드라마' 촬영 현장입니다.

    한 편 당 길이는 10분 내외.

    일반 텔레비전 드라마의 1/6 수준입니다.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출퇴근, 등하굣길의 지하철, 버스 안 10분을 공략했습니다.

    [윤인완 대표]
    스토리 전개도 되게 빠르고 소재 자체도 무겁지 않아요. 10분 안에 스토리를 담아야하기 대문에 스토리 안에 내포되고 있는 어떤 이야기의 스트레스라든지 캐릭터성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일반적인 드라마 보단 라이트한

    짧은 만화의 기본틀인 4컷 만화를 한 컷 더 줄인 3컷짜리 웹툰도 출현했습니다.

    읽는데 3초만 달라며 시작한 웹툰 '하루 3컷'.

    기승전결 4단계에서 한 단계를 빼버리고 바로 결론으로 갑니다.

    화장실 유머부터 철학, 사회 풍자까지 가볍게 접근하는데, 연재 넉 달만에
    인기 웹툰 반열에 올랐습니다.

    [배진수 작가]
    출퇴근 하면서 잠깐, 친구 기다리느라 잠깐, 그렇게 볼 수 있는 그런 가벼운 만화를 만들면 독자층들이 많이 좋아하겠구나. 기승전결에서 승 정도를 빼버리죠. 이렇게 빼버리면 일단 보는 사람이 좀 더 그런 포인트가 있는 것 같아요. 허무하다는? 허무하달까?

    한 포털사이트에선 야구를 즐기는 데는 3분이면 충분하다며 3분 야구를 선보였습니다.

    3시간은 족히 걸리는 야구를 매 회 중요 장면 중심으로 짧게 편집한 겁니다.

    한 시간 짜리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도 재미있는 장면만 잘라놓은 몇 분 짜리 영상으로 즐기는 것도 익숙한 모습입니다.

    [전미영 교수]
    현대인들의 시간이 조각조각 나있어요.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 그리고 우리가 출퇴근 시간에서 보내는 시간, 이런 시간들이 조각돼 있고, 풀 콘텐츠를 즐길만한 여유가 없다보니, 자기 나름대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이렇게 짧은 시간 간편하게 누리는 문화 생활을 요즘 '스낵컬처'라고 부릅니다.

    과자나 분식을 먹듯이 가볍게 즐긴다는 뜻입니다.

    원래 지하철역 작은 음악회, 당일 캠핑 같은 간이 문화체험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스마트기기가 대중화되면서 스마트폰으로 보는 대다수의 콘텐츠를 일컫는 말로도 쓰입니다.

    최근엔 오락물 뿐 아니라 뉴스나 교양, 인문학 강의까지도 이런 흐름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펙트]CM
    "우주의 얕은 지식"

    답을 구하되, 깊지는 않습니다.

    이미지 한 컷에 내용도 한 두 줄.

    다루는 분야는 다양하지만 자기소개서 작성이나 연애 같은 실생활에 활용할 정도만 지식을 가공해 내놓는 편집싸이트입니다.

    [하재근]
    "인터넷을 통해서 수많은 것들이 쏟아지기 때문에 옛날처럼 자기 분야의 지식만 알아가지고서는 인터넷 시대에 적응을 하기가 어려운 거죠. 일종의 한 분야를 가볍게 일종의 매뉴얼 형식으로 지식요약 이런것들이 인기를 많이 끌다보니까..

    [이펙트] 지대넓얕 팟캐스트

    최근 인기몰이 중인 이 인터넷 방송은 이름부터 넓고 얕음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4명의 화자가 인문학, 철학, 과학, 종교 등의 무거운 주제를 동아리 세미나하듯 가볍고 재치있게 다룹니다.

    '인문학은 어렵다'는 인식때문에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부담을
    '얕음'을 내세워 한결 덜어낸 겁니다.

    [양형백]
    얕게 가는 거는 어쩔 수 없다고 봐요. 책을 읽을 때도 한 권을 다 끝까지 정독해서 읽는게 물론 가장 좋겠지만, 저도 주위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목차만 보더라도 성공한거고 단 한페이지만 보더라도 성공한거고..

    OECD 국가 중 어린이 만족도가 꼴찌라는 뉴스.

    본 기사는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운 분량이지만, 사진과 그래프를 전면에 배치하고 핵심어 몇 개만 집어넣어 한 컷만 봐도 주된 내용은 알 수 있게 편집합니다.

    스마트폰 사용자들을 겨냥한 '카드 뉴스'로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공급하고 있습니다.

    [임나래 ]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게 컷은 5컷부터 시작해서 10컷 정도로 작업하고 있고요. 컬러는 최대한 단순하게 하고 이미지도 고를 때에는 궁금을 유발할 수 잇는 이미지를 많이 선택해서 작업을 하는 편이어요.

    짧고 쉬워서 더 빨리 더 많이 접하게 되는 콘텐츠.

    이 넘쳐나는 정보들은 과연 우리 머릿속,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까.

    2580은 한 대학병원 연구팀과 함께 성인 남녀에게 스무 개의 문장을 주고 스마트폰으로 참인지 거짓인지 찾아보게 한 뒤 30분 후 시험을 치렀습니다.

    단, 시험 중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미리 알렸습니다.

    두번째는 다시 새로운 스무개의 문장을 준 뒤 시험 볼 때 기억이 안나면 스마트폰을 쓸 수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 결과 첫번째 시험에선 각각 13개, 12개의 문제를 맞췄던 이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다고 미리 말해준 두번째 시험에선 4개, 11개로 정답률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굳이 기억하지 않으려할뿐더러 아무리 많은 정보를 찾더라도 머릿속에 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빠르게, 쉽게 습득하는 콘텐츠들이 우리의 지식과 감성을 그만큼 풍부하게 해주는 건 아니라는 얘기.

    [김종석 차움병원 교수]
    검색을 많이 함으로써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이해도를 높일수는 있습니다. 정보에 대한 이해도는 높일수 있는데 정확하게 그 정보를 기억하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정확하게 기억하는 능력은 상당히 떨어질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초를 다퉈가며 더 많은 걸 보고 경험해야 한다는 강박은 우리 생활 속에서 더해지고 있습니다.

    2580이 국내 한 빅데이터 분석회사와 최근 4년 동안 국내에서 기록된 블로그 4억6천만건을 검색한 결과,

    '출퇴근길에 무언가를 하느라 바쁘다'란 표현은 2012년 68위에서 올해 43위로 25계단이나 뛰었습니다.

    '시간을 갖는다' 보단 '시간이 없다'란 표현도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있으면 더 여유있게 일을 처리할 것 같은데, 실상은 더 바빠졌다는 겁니다. ]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
    시간이 없는 게 시간이 물리적으로 준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옵션이 늘었기 때문에 이제 더 많이 조급해 한다는게 1번이고, 두 번 째는 그 때 더 많이 사용되는 것이 지금까지 버려졌던 시간들 예를 들어 이동이라는 시간이 지금까지 버려졌잖아요. 그걸 채우기 시작했다는 것. 세번째로는 그런 형태의 강박이 무엇인가를 봐야한다는 것들로 변화돼서

    빠른 속도와 감각적인 접근으로 보다 많은 이들이 편리하게 다양한 문화를
    누리게 됐지만, 다른 한 쪽에선 창작자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웹툰작가 김풍 씨.

    주로 코믹한 캐릭터가 활약하는 짧은 웹툰을 그려왔지만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픈 마음에 작년부터 장편만화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쉽고 짧은 만화를 선호하는 웹툰 독자들의 눈에 들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풍]
    이게 처음에 순위가 되게 바닥이었어요. 시작할 때 거의 밑에서 2위 3위 이랬거든요. 너무 떨어지니까 이게 사람이 조바심이 나더라고요. 그러면서 아 이거를 어떻게든 끌어올려야겠다라고 고민을 되게 많이 했죠.

    그래서 시선을 더 끌기 위한 장면과 대사를 만들어 넣는데 예전보다 공을 많이 들이게 됐습니다.

    [김풍]
    짤방이라 그러죠? 저도 이제 의도를 해서 만드는 경우가 있거든요. 몇 컷 안에서 어, 너무 재미있다는게 빵 터져줘야지 사람들이 이런 만화가 있구나 해서 찾아보게 되거든요.

    전자책 업계도 고심하고 있습니다.

    디지털기기로 접하는 콘텐츠가 가볍다는 인식에 따라

    전자책도 주로 판타지나 로맨스 등의 장르물에만 치중해 있다보니 일반서적을 펴내 독자층을 넓히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석원 이사]
    사실 우리 국민 대다수는 예전보다 이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생긴 이후로 사실은 더 많은 텍스트들을 보고 있습니다. 근데 문제는 그게 자극적인 콘텐츠냐 아니면 정제된 생각을 유도하는 콘텐츠냐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할 것 같습니다.

    창작자들이 대중화와 본질 추구란 선택의 기로에 서는 건 늘상 있는 일이지만, 스낵컬처의 가속화는 선택을 한쪽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짧게 줄이고, 빠르게 전하는데만 몰두하는 사이 콘텐츠 창작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는, 그래서 괜한 걱정이 아닙니다.

    [전미영 교수]
    짧게 짧게 즐기려면 기본적으로 자를 수 있는 어떤 문화 콘텐츠가 존재해야 합니다.그것이 존재할 때 사람들이 그것을 새로 엮어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속도와 효율성을 요구하는 사회분위기와 기술발전이 결합하면서 일상에 빠르게 정착한 스낵컬처.

    가볍고 자극적인 맛으로 결국엔 문화 전반을 얄팍하게 만들게 될 지,

    풍성하고 다채로운 문화의 정찬으로 안내하는 입맛 돋구는 전채요리의 역할을 하게 될 지.

    문화의 소비자인 우리가 이 새로운 음식을 어떻게 즐기느냐가 그 방향을 정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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