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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2580
기자이미지 노경진 기자

마지막 사법시험 보는 날

마지막 사법시험 보는 날
입력 2017-06-26 10:14 | 수정 2017-06-26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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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제59회 사법시험 제2차 시험이 치러졌습니다.

    50명의 법조인을 선발하는 이번 시험을 끝으로 사법시험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법조 등용문이자 인생역전의 대표적 수단이었던 사법시험이 폐지되면서, 법조인이 되기 위해서는 유일한 관문인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야만 됩니다.

    수천만 원의 학비와 나이 제한, 학별 차별 등 높은 진입장벽으로 인해 법학전문대학원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의 법조계 진입을 어렵게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사법시험을 준비해 온 '고시생'들은 노력과 실력으로 법조인이 될 수 있는 공정한 제도가 사라졌다며, 여전히 사법시험 존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사법시험은 어떤 의미였는지, 또 사법시험 폐지를 둘러싼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를 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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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세대학교 백양관 건물의 긴 계단을 천천히 밟아 오릅니다.

    제59회 사법시험 2차 시험장을 향한 발걸음.

    공부할 때 신던 슬리퍼,

    헐렁하고 편안한 차림새.

    하지만,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맑고, 잘 간 칼날처럼 버려져 있습니다.

    저 고시장 문이 말 그대로 자신의 등용문이 될 수 있을까.

    아직 앳돼 보이는 20대 초반 남학생은 7전 8기까진 아니어도 이미 3전 4기째라며 각오를 다집니다.

    [이승우/사법시험 응시자]
    "3번 떨어졌으니까. 4번째는 꼭 붙겠다. 이런 각오로."

    [박지숙/사법시험 응시자 가족]
    "(응원 한 말씀) 그동안 많이 고생했고 그리고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잘 될 거라고 믿고요. 그리고 다른 학생들도 힘들고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시험장 바로 앞까지 딸을 배웅하던 아버지는

    책이 잔뜩 든 가방을 그제서야 어깨에서 벗어 딸에게 단단히 매어줍니다.

    시험장으로 들여 보내고도 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정원식/사법시험 응시자 가족]
    "좀 안쓰러운데 해줄 게 없어요. 가방 들어주는 거 뭐 그 정도 밖에, 그거밖에 없어요. 별로 해줄 게 없어요.(따님한테 응원 한마디 해주신다면?) 잘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시험엔 지난해 1차 시험 합격자들 가운데 186명이 도전했습니다.

    최종합격자는 50명입니다.

    이번 사법시험이 관심을 받은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불합격자에겐 다시 도전할 사법시험이 없습니다.

    [송중영/사법시험 응시자]
    "최선을 다해서 꼭 합격하겠습니다. (마지막 시험이라서 관심들이 많은데 임하시는 각오는?) 각오는 뭐 마지막 시험이든 아니든 간에 열심히 해서 그거 신경 안 쓰고 최대한 열심히 해야죠. 별생각 없습니다."

    어제까지 나흘간 치러진 제59회 사법시험 2차 시험을 끝으로

    사법고시는 한국 사회에서 사라졌습니다.

    예정대로 법조인 양성은 로스쿨 제도로 완전히 대체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고시 신화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고 지금의 사회분위기도 공정성, 평등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계층 사다리의 대표격인 사법고시를 폐지한다는 것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윱니다.

    어제 오후.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오후에 걸쳐 서술형 필기시험으로 진행된 2차 시험을 완전히 끝내고 나오는 길.

    홀가분함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옵니다.

    [김대홍/사법시험 응시자]
    "4일 만에 끝나서 홀가분하고요. 그냥 지금 빨리자고 싶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드는 게 그냥 시원섭섭하네요. 5년 정도 준비했는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가족과 지인들은 대견함 반, 안쓰러움 반의 심정으로 길었던 준비 기간과 지난했던 시험을 끝낸 이들을 끌어안고 격려합니다.

    응시생 모두 최선을 다했겠지만 합격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이들은 1/3 이 채 안 됩니다.

    [정우진/사법시험 응시자]
    "마지막인 게 너무 아쉽고요. 공정한 사회라는 어떤 표현이잖아요. 사법시험도. 그래서 계속 유지가 됐으면 좋겠고 내년에도 다시 또 봤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또 보면 안 되지."

    이번에 떨어지면, 선배 고시생들과 달리, 재도전의 기회는 없다는 아쉬움도 진하게 배어 나옵니다.

    [이병길/사법시험 응시자]
    "되게 아쉽죠. 전 되게, 그래도 여기 중에서는 대다수는 70%는 떨어지거든요. 어차피. 그러니까 좀 존치가 됐으면 좋겠어요."

    시험장 한쪽에선 사시존치를 바라는 고시생 모임이 기자 회견을 열었습니다.

    [이종배 대표/사법시험 존지 고시생 모임]
    "성명서. 사법시험과 로스쿨을 병행하라. 사법시험은 공정한 제도의 상징이자..."

    지난 70년간 법조인 배출의 유일한 관문이었던 사법고시는 1950년 고등고시 사법과로 출발했고,

    1963년부턴 지금의 사법시험으로 전환됐습니다.

    지금까지 응시자는 총 70만 8천여 명.

    하지만, 2만 7백 명만이 법조인의 꿈을 이뤘습니다.

    사시는 출신이나 학력, 성별 등에 상관없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고, 또 다른 배경 없이 오로지 점수, 즉 실력으로 평가된다는 점에서 '개천에서 용 난다', '흙 수저 신화' 등의 대명사로 자리 잡아왔습니다.

    가난을 딛고, 신체적 장애를 딛고, 동시에 합격한 형제의 이야기.

    [대한뉴스/1972년]
    "모든 어려움을 의지로써 이겨낸 형제가 제14회 사법시험에 나란히 합격했습니다. 형은 신체가 부자연스럽고, 올해 19살의 아우는 이번 사법시험 합격자 가운데 최연소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는데.."

    구두닦이 출신 늦깎이 대학생의 성공 신화.

    [뉴스데스크/1994년 10월 27일]
    "시련과 도전 그리고 극복의 인생을 쉴새 없이 달려온 서정암 씨는 오늘도 꽉 다문 입과 결연한 눈빛으로 새로운 출발선에 섰습니다."

    [서정암/제36회 사법시험 합격자]
    "당장 자기가 공부로 한 번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목표를 세웠다면 그 목표를 향해서 정진을 하면 어떤 겨로 가든 반드시 나오거든요."

    역경을 뚫고 합격한 이들의 사연은 그 자체로 미담이어서 국민들의 마음을 적시곤 했습니다.

    상고 출신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감옥에서 합격 소식을 들었던 문재인 대통령과 '모래시계 검사'로 불리며 얻은 인기가 큰 정치적 자산이 된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역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시 신화를 써내려간 이른바 '개천용'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백원기 교수/인천대 법학과]
    "대학에 안 가도 충분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야학을 하면서 직장을 어렵게 다니면서 사법시험을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이거든요.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이 법조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을 배려할 수 있는 판결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사법시험은 실력만 있으면 누구나 '출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했지만, 될 거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해 청춘을 시험에만 쏟아붓는 이른바 '사시 낭인'을 양산하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합격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사법연수원의 기수 문화와 '가장 어려운 시험을 뚫었다'는 그들만의 특권 의식은 전관예우 등 법조 비리의 근원이라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또 사법시험 한번 합격으로 그 사람의 '많은 부분이 달라진다'고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바람직하냐는 가치관적 문제도 제기됐습니다.

    여기에 다양한 분야의 법률 수요가 급증하면서, 2천 년대 초반, 사법시험 제도 개혁 작업이 본격화됐습니다.

    [이형규 원장/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사법시험처럼 오로지 시험만 붙으면 법률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전공을 하고 그다음에 법률 지식을 습득했기 때문에 전문가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그 분야에 대한 식견, 그리고 법률적인 지식, 이런 걸 바탕으로 법률문제를 해결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해서 도입이 되었고요."

    법학전문대학원 이른바 로스쿨과 변호사 시험을 골간으로 하는 개혁안이 확정되면서,

    2009년, 로스쿨이 문을 열고 학생을 선발했습니다.

    동시에, 사시 준비생들을 위해 8년간은 시험을 유지하기로 해, 2009년부터 올해까지 로스쿨과 사시가 공존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작년 사시 폐지 조건의 변호사 시험법이 합헌 판결을 받으면서 사법시험은 되돌릴 수 없는 폐지 수순을 밟게 됐습니다.

    하지만, 시민들 상당수는 아직 사법고시가 완전히 폐지된다는 것을 잘 모르거나 알아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윤상욱/서울시 영등포구]
    "(이번에 사법고시가 마지막으로 치러졌거든요. 혹시 아시고 계셨나요?)아뇨 저 전혀 몰랐어요."

    [장원제/서울시 양천구]
    "사법고시 없어지면 대체할 만한 수단이 있나요?"

    이렇게 적잖은 이들에게 사법고시가 없어진 현실이 납득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사법고시생들은 사라지겠지만, 공무원시험 준비생 즉 공시족으로 불리는 이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2차 시험이 한창 치러지고 있던 지난 금요일의 신림동 고시촌.

    고시생들로 북적이던 예전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지 오래입니다.

    [OOO 신림동 고시촌 주민]
    "사시 없애버렸잖아요. 그래서 지금 이 동네가 죽어가지고 난리예요. 집값도 지금 난리고 애들 엄청 빠져나갔죠."

    하지만, 여전히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사시생들도 있습니다.

    법대를 졸업했지만 다른 직업을 가졌다가 30대 중반 나이에 뒤늦게 사시를 준비하게 된 이 모 씨.

    [이 OO 사법시험 응시자]
    "그 질서를 내가 신뢰하니까 그런 질서를 여기서 나를 떨어뜨렸으면 아 내가 실력이 부족하구나 라고 믿고. 내가 붙었으면 어, 내가 좀 더 나았나 보네. 그 공신력이 있으니까요. 그걸 믿고 저는 공부만 하면 되는 거죠."

    앞으로 치를 시험이 사라졌기 때문에 고시생이란 명칭도 무색해졌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 OO 사법시험 응시자]
    "그렇죠. 기회만 있으면 나도 저렇게 될지 모르는 건데 무슨 고시 낭인이라는 이유로, 사법 개혁이라는 이유로 나는 전혀 수긍할 수 없는 이유로 나한테 기회를 포기할 것을 강요하니까 너무 화가 나죠."

    사법시험 존치 운동에 적극 나서고 있는 이 씨.

    하지만, 로스쿨엔 전혀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비싼 등록금도 부담이지만,

    로스쿨 입학 전형 서류에 부모나 친척이 법조계 고위직 출신이라고 적는 사례가 적발되는 등, 로스쿨 전형의 공정성을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이 OO 사법시험 응시자]
    "떨어졌어요. 그분은. 근데 그 원인을, 이유를 알려 달라고 하는데도 그 이유도 모르고 돈만 왕창 들고 결과만 나오니까 이걸 과연 내가 이런 비용을 들여가 지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사시생들이 떠난 자리는 다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이나 회계사, 노무사 준비생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사시와 행시, 각종 자격증 시험 류의 공통점은 안정적이고 명예도 따라올 수 있는 직업이라는 점 외에 오로지 시험 성적으로만 평가돼 공정하다는 겁니다.

    [김중곤/공무원시험 응시자]
    "네, 그냥 시험 점수대로 자르는 거예요. 다른 스펙이 필요 없고."

    [김종하/공인회계사 시험 응시자]
    "아무래도 다른 건 약간 좀 음서제라는 것도 많이 나오고 하니까 이런 시험으로 딱 보고 내가 공부한 만큼 나오는 거니까."

    지난 4월 국가공무원 9급 필기시험은 5천 명을 뽑는 데 무려 23만 명이 몰려, 46대1의 경쟁률이었습니다.

    어제 치러진 서울시 7급과 9급 공무원 필기시험 경쟁률은 그 두 배인 86대 1입니다.

    공무원 시험이 경쟁률은 높지만 노력의 결과로만 평가된다는 점은 흙 수저를 자처하는 평범한 청년들에겐 오히려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1점으로도 등락이 결정되는 치열한 시험이지만 1점만 더 올리면 된다는 희망도 된다는 얘깁니다.

    [한영정/공무원시험 응시자]
    "1점 차이로 떨어지는 사람도 주변에 많고 전 조금 많이 부족해서 떨어졌었는데 이번에 그래서 뭔가 더 열심히 해서. 근데 막상 해 보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게 있으니까 좀 더 희망을 갖고 공부하게 되는 거 같아요."


    이들이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높은 경쟁률이 아니라 언젠가 사시처럼 이들 시험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외무고시는 이미 2013년 사라졌고, 행정고시도 폐지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김종하/공인회계사 시험 응시자]
    "아 많이 안타깝죠. 여기 있다 보면 사시 없어지는 걸 봤으니까 보면 이게 행시도 없어진다는 말도 돌고 하니까 여기 살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요. 그러면 하나씩 없어지다 보면 이제 우리 차례가 오진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좀 씁쓸하죠."

    사법고시 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고, 폐지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의견들이 적지 않습니다.

    마지막이란 점에서 언론의 관심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의견과 관심의 방향은 '무엇이 바람직한 법조인 양성 제도냐'가 아니였습니다.

    '계층 사다리가 사라져 간다'는 안타까움이었고, 우리 사회가 공정함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단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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