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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2580
기자이미지 정영훈 기자

"나는 원폭 피해자입니다"

"나는 원폭 피해자입니다"
입력 2017-08-16 16:49 | 수정 2017-08-1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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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월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잇따라 원자폭탄이 투하됐습니다.

    수십만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한국인 원폭 피해자가 일본인 다음으로 많다는 사실은 오랜 세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한국은 광복을 맞이했지만 한국인 피해자들은 원폭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남은 이들은 피폭자라는 냉대, 여기에 한국인이라는 차별 속에 통한의 세월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원폭 1세대의 평균 나이는 80대를 훌쩍 넘겼고, 갈수록 그 수도 줄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폭 후유증은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원폭 2세들은 부모의 피폭으로 인한 후손들의 유전적 영향이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무런 보상과 혜택도 받지 못합니다.

    원인조차 모르는 희귀질환에 평생 지워지지 않은 상처가 몸과 마음을 할퀴었지만 일본은 물론, 우리 정부로부터도 외면 받고 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폭자 자격 소송을 제기하며 스스로 권리 찾기에 나선 것도 이 때문입니다.

    광복 72주년, 이들의 절박한 사연을 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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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그리고 사흘 뒤 나가사키에 투하된 두 발의 원자폭탄.

    [박임순/ 원폭 피해자]
    "(하늘에서) 반짝반짝 내려오는 게 (폭탄이) 바늘만 한 게 내려오는 게, 내려오니 이렇게 크데요. 땅이 꺼진 게 아니라 이렇게 팍 꺼졌어요."

    [한차수/ 원폭 피해자]
    "소리가 꽝 나더라고. 연기가 해를 가려서 깜깜해 옆에 아무것도 안 보이고. 지붕이 내려앉으니 우리 엄마는 머리가 박살 나고 피가 막 흐르고."

    당시 두 도시에 있던 74만 명이 원폭 피해를 당했고, 이 중 10만 명 정도가 강제징용 등으로 일본에 끌려와 있던 한국인들이었습니다.

    피해자 일곱 여덟 명 중 한 명은 한국인인 셈입니다.

    [히라노 노부토 전 회장/일본 피폭2세단체연락협의회]
    "핵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지만 피폭자는 일본인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걸 일본인도 모릅니다. 한국인들도 모릅니다. 그래서 한국 피폭자는 방치돼 왔습니다."

    원폭 이후 71년이 흐른 지난해 5월.

    오바마 전 대통령은 미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히로시마에 있는 원자폭탄 희생자 위령비를 찾아 헌화했습니다.

    이어진 연설에선 이례적으로 한인 피해를 언급했습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이곳에서 죽은 수십만 명의 일본인과 수천 명의 여성, 어린이, 수천 명의 한국인."

    반쯤 무너져버린 외벽과 철골만 간신히 남은 건물.

    1945년 8월 원자폭탄이 투하됐을 당시 유일하게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일본 히로시마의 원폭 돔입니다.

    한국인을 포함한 수십만의 민간인들이 사망하거나 크게 다쳤습니다.

    원폭 이후, 한국은 광복을 맞이했고, 이후로 70여 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한국인들은 원폭 후유증으로 인한 통한의 세월을 견뎌야 했고, 그 고통은 후손들에게까지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히로시마에 살고 있는 박남주 씨,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출근 시간, 시내 중심부에 투하됐을 때, 박 씨는 두 동생과 전차를 타고 있었습니다.

    빛과 폭음에 놀라 정신을 잃었다가 깨보니, 주변은 피투성이였다고 합니다.

    [박남주 /원폭 피해자]
    "그 순간 빛하고 큰 폭음이 전차 안에 환한 빛하고 폭음이 전차 안이 흔들렸죠. 조금씩 연기가 거쳐지고 보니 전차에서 내린 사람들 어른들이 모두 피투성이였어요."

    리틀보이는 폭발 지점 중심으로 반경 1.6km 이내의 모든 것을 파괴했습니다.

    [박남주 /원폭 피해자]
    "환해져 주변을 보니 집이 무너져서 서 있는 게 없었어요. 그런 상황이 폭심지(원자폭탄이 터진 지점)에서 1,800미터 떨어진 곳이었어요."

    학생들에게 피폭 증언 활동을 하고 있는 박 씨에게 고통은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원폭 피해를 입은 부모와 동생이 갑자기 암에 걸려 숨졌고, 이 씨 역시 두 차례나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박남주/원폭 피해자]
    "전쟁 후에 유방암과 피부암. 피부암은 최근이에요."

    또 다른 원폭 피해자 87살 이정근 씨.

    [이정근/원폭 피해자]
    "전차 타고 폭심지 쪽을 10분 전에 통과했어요. 10분 후에 저 다리를 건너서 가니까 확, 터졌어요."

    간발의 차로 폭발 지역을 벗어났던 이 씨는 목숨을 건졌지만, 폭발 지점에서 가까웠던 누이는 그 시신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정근 /원폭 피해자]
    "(누나가) 일본 군대에 구두 만드는 공장에 있었습니다. (군수공장?) 네 군수공장...거기서 일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피폭을 당한 한인들에게, 냉대와 차별이 이어졌습니다.

    일본말로 피폭자를 뜻하는 '히바쿠샤'.

    전후 일본 사회는, 잊고 싶은 패전을 되새기게 한다는 이유로, 전염병 같은 느낌이 든다는 이유로, 피폭자들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봤다고 합니다.

    특히 한국인 피폭자들에겐 더욱 차가웠다고 합니다.

    [박남주/ 원폭 피해자]
    "그런 환경 속에서 '지금'을 사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어요. 특히 우리 재일교포들은 갈 곳이 없었어요."

    박 씨가 꺼내 든 피폭자 건강수첩.

    [박남주/원폭 피해자]
    "원폭 지점에서부터 2km 이내가 1호. 1이라는 건 2km 이내에 피폭한 사람."

    일본 정부가 발급한 이 수첩이 있어야만 치료비 등 원폭 피해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일본인들과 동일한 의료비 혜택을 받기까지는 전후 15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광복 이후 귀국한 피해자들의 경우, 원폭 이후 반세기 가까이 일본 정부로부터 단 한 푼의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곳 일본 히로시마는 원폭 당시 일본군 수만여 명이 주둔했던 군사요충지이자 조선소와 군수 공장이 밀집했던 병참기지였습니다.

    전체 원폭 희생자 가운데 20%인 5만 명이 강제징용자를 포함한 한국인들이었던 건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 상당수는 경남 합천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광복 이후 고향으로 되돌아왔고, 이 때문에 합천은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렸습니다.

    지난 6일 합천에서 문을 연 국내 최초의 원폭 자료관.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공식 집계한 일본 정부의 유일한 문서도 이곳에 있습니다.

    "(아 여기 있다 재일 한국인 수)...사망자, 생존자 이렇게 나와있죠."

    1945년 일본 내무성 자료.

    한국인 피폭자 수는 모두 10만 명, 이 가운데 5만 명이 숨졌고, 4만 3천 명은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현재 한국 원폭 피해자 1세대의 평균 나이는 83세.

    정부에 공식적인 원폭 피해자로 등록된 이들은, 지난달 기준으로 2천4백여 명에 불과합니다.

    [히라노 노부토 전 회장 / 일본 피폭2세단체연락협의회]
    "한국인이 (전체) 피폭자의 약 10% 정도 차지하는데, 겨우 2천5백 명 정도만 (피폭자) 건강수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원폭은 72년이 지난 과거사가 됐지만, 피해자들에게는 대를 이어 괴롭히는 현재진행형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한정순 씨는 부모가 모두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이고, 부모가 한국으로 귀국한 뒤 태어난 '피폭 2세'입니다.

    한씨는 중학생 때부터 원인 모를 다리 통증에 시달렸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대퇴부 무혈괴사증', 관절이 녹아 없어지는 무서운 병이란 걸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한정순/원폭 피해자 2세]
    "50대 60대 정도 돼야 이게 괴사가 되는, 그게 발견을 할 수 있데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15살 때부터
    아마 괴사가 시작이 된 것 같거든요."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셋째 언니를 포함해, 한씨의 7남매 모두 각종 병에 걸려 젊은 시절 죽었거나, 난치병을 앓고 있습니다.

    피폭 3세대인 한 씨의 아들은 뇌성마비 장애를 앓고 있는데, 한씨는 이런 가족의 질환들이 피폭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한정순/원폭 피해자 2세]
    "세상에 태어나서 제대로 세상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늘 누워서."

    문택주 씨는 태어나면서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았는데, 20대 초반, 갑자기 눈이 안 보이더니 얼마 지나 완전히 시력을 잃었습니다.

    [문택주/원폭 피해자 2세]
    "옛날에 그때는 눈이 괜찮았는데, 밝았는데, 환했는데 요즘은 눈이 앞이 안 보여...환갑이 다 돼도 고치지도 못하고."

    임준경 씨도 30대 때 근육이 없어지는 병마가 찾아와 몸에 힘을 주지 못했고 급기야 이제는 눈꺼풀을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습니다.

    [임준경/원폭 피해자 2세]
    "다 불편해요. 머리에서 발끝까지 다 불편해요. 서서히 굳어져 가는 병이기 때문에. 요새는 손이 굳어가지고 잘 쥐지도 못하고요. 옛날에는 애들 축구도 가르쳐주고 했는데."

    문씨와 임씨 모두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에 노출됐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원인도 모른 채 각종 난치병에 시달려 온 원폭 2세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건 지난 2002년.

    선천성 면역 글로불린 결핍증이라는 희귀 유전병을 앓고 있던 고 김형률 씨가 스스로를 원폭 2세라고 밝히면서부터입니다.

    [故 김형률(2005년 사망]
    "저희 어머니께서는 1940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1945년 8월에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피폭당하셨습니다."

    이때부터 많은 원폭 2세들이, '자신의 병이 원폭 때문일 수 있다'는 문제 제기에 나섰습니다.

    [故 김형률(2005년 사망]
    "일본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의해 지금 이 시간까지도 그 광기의 역사가 한국 원폭 2세 환우들의 몸과 마음을 관통하고 있는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5월, 우리 정부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했습니다.

    하지만, 원폭 2세대에 대한 지원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주영수 교수/한림대 성심병원 직업환경의학과]
    "2세들의 문제는 1세들보다 알려진 게 없기 때문에 일본 정부조차도 2세 문제에 관해서는 굉장히 소극적입니다. 하물며 우리 피폭자 2세 문제를 일본 정부가 그대로 받아주거나 하진 않을 것으로 보고요."

    원폭 2세대 문제가 처음으로 공론화된 지 15년이 지났고, 2011년 헌법재판소가 '원폭 피해자를 구제하라'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지만 정부 차원의 전수조사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심진태 지부장/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
    "일본도 (원폭 2세 인정) 안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왜 하느냐 이렇게 말해요. 일본한테 설움 받고 억압받았으면 (이제부터라도) 우리나라 국민을 섬겨야 될 거 아닙니까."

    일본 히로시마 외곽에 있는 원폭 피해자 진료소.

    이 진료소가 만들어진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요시다 료준 원장/히로시마 고요제1진료소]
    "피폭 2세 분들이 백혈병에 의해 잇따라 사망했습니다. 1970년쯤이었습니다. 그게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일본인 원폭 2세들이 불안감에 스스로 모금해 병원을 지은 겁니다.

    [카쿠다 다쿠 /원폭 피해자 2세]
    "어릴 적에 저는 죽으면 백혈병으로 죽는 건가, 암으로 죽는 건가 그런 생각을 계속해왔습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원폭 피해에 대한 책임과 배상은 1세대에 한정돼 있습니다.

    일본 내에서도 피폭자 자손들과 관련 '유전적 영향성'을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오타키 메구 교수/ 히로시마대학 원폭방사선의과학연구소]
    "지금까지 여러 연구가 있었는데 원폭이 2세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지금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요시다 료준 원장/히로시마 고요제1진료소]
    "암에 걸리기 쉬운 연령이 되었기도 하지만 피폭당하지 않은 쪽과 비교하면 (피폭자가) 몇 배의 확률로 암에 걸립니다."

    지난 3일 대구지방법원.

    고 김형률씨의 아버지 김봉대씨 등 원폭 피해자들이 정부와 원자폭탄 제조와 관련된 미국 기업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기 위한 조정 신청을 냈습니다.

    [김봉대 /故 김형률 씨 아버지]
    "대한민국 정부는 사실 이름만 정부이지 원폭 피해자에 대해서는 하등 관심이 없고 책임을 지지도 않기 때문에 여태까지도 원폭 피해자들이 수난과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원폭 당시 신원을 알 수 없는 희생자들의 유해를 합동으로 안치한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한 봉분.

    피폭자 이정근 씨는 이곳을 자주 찾습니다.

    시신도 못찾은 누이가 이곳에 묻혔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정근/원폭 피해자]
    "혹시 누님이 여기에 계실까봐. 그래서 나는 여기 오면 참배하고."

    70여년 전, 피폭의 상처를 입고 일본에서 또는 한국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과 그 후손들.

    사회의 편견과 무관심 속에 지내온 이들은, 외롭고 힘겨운 법정 싸움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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