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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이트 34회 Full] 경찰특공대는 왜 용산으로 갔나?

[스트레이트 34회 Full] 경찰특공대는 왜 용산으로 갔나?
입력 2019-01-07 11:17 | 수정 2019-01-0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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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기자]

    권희진 / heejin@mbc.co.kr
    김정인 / tigerji@mbc.co.kr

    ◀ ST 1 ▶


    김의성 안녕하십니까. 스트레이트 김의성입니다.
    주진우 안녕하세요. 주진우입니다.
    김의성 2019년 새해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지난 한 주 많은 계획들을 세우면서 알차게 보내셨습니까? 주 기자는 새해 새로운 계획 있습니까.
    주진우 저는 새해마다 계획을 세우는데 누구를 구속시키겠다. 누구를 잡겠다. 이런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지난해 MB 구속 이후에 방황하고 나태해졌지 않나. 그런 생각해봅니다. 연말에 생각해보니까 할 일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열심히 뛰어보려고 합니다. 2019년 스트레이트, 진짜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김의성 네. 누구나 작은 희망을 꿈꾸게 하는 새해입니다. 하지만 해마다 1월이 되면은 오래 전의 아픈 기억, 받았던 상처, 고통 때문에 아직도 괴로워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올해로 10주기를 맞은 용산참사의 피해자, 그리고 유가족 분들입니다.
    주진우 10년 전이었는데요. 진짜 추운 날이었습니다. 불기둥이 치솟고 매캐한 연기가 그냥 거리를 뒤덮고, 물벼락이 쏟아지고 여기저기에서 울부짖음이, 아, 아직도 생생합니다. 너무나 처참했던 광경이 아직도 고통스럽습니다. 10년이 지난 일이고 다 끝났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끝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용산 참사는 아직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김정인 맞습니다. 최근 검찰 과거사위가 용산참사에 대한 재조사를 시작을 했죠. 근데 이번에는 확실히 진상규명이 될 거다. 이런 기대가 많았는데 지금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용산참사를 수사했던 당시 검사들이 지금 조사하고 있는 조사팀에 의견서를 보냈는데요. 저희가 이 문건을 단독으로 입수했습니다. 바로 이 문건인데요. 이 문건 이제 내용을 보면 과거사위가 허위 의혹을 제기해서 당시 수사가 잘못됐다. 라고 이렇게 명예를 훼손하면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겠다. 이런 내용까지 있었습니다.
    주진우 이거는 의견이 아니라 협박이네요. 제가 방금 전에 과거사위 관계자하고 전화를 했는데 당시 수사검사들이 워낙 세게 나와서 겁먹어서 사실 조사를 못했다. 이런 얘기도 하더라고요.
    권희진 사실상 재조사 하지 말라는 압박이죠. 실제로 이 문건 때문에 검찰 과거사위 조사가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김의성 아니, 스스로 떳떳하다면 얼마든지 재조사에 응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 당시 수사검사들은 왜 이렇게 용산참사에 대한 재조사를 막으려는 걸까요?
    주진우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검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습니다.
    권희진 네. 저희가 취재를 할수록 용산 참사는 무리한 과잉진압에 따른 사실상의 국가 폭력이었다. 라는 정황이 뚜렷해졌거든요. 그런데도 당시 검찰은 경찰이 수사했던 초기 수사기록 3천 쪽을 감추면서 이 내용을 은폐하려고 했던 거죠.
    김정인 네. 스트레이트는 방금 말씀하셨던 그 은폐돼 있던 검찰 수사기록 3천 쪽을 이제 확보해서, 네.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참사 전날에 경찰 무전 녹취록도 봤는데요. 놀랍게도 참사는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 END ▶

    ◀ VCR 1 ▶ 섣부른 과잉진압

    (영상구성)

    [ 2009.1.20 서울 용산구 남일당 건물 ]

    [ 철거민 5명, 특공대원 1명 사망 ]

    왜 이런 참사가 발생한 것일까.

    진압작전을 앞둔 2009년1월20일 새벽 3시.

    경찰특공대 중간 간부는
    진압 작전을 미뤄야한다고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화재에 대비해 준비하려던
    소방차 6대 가운데 4대가 부족하고
    옥상진입 작전에 쓸 대형 크레인도 구하지 못해
    소형 크레인 1대만 준비됐다는 것.

    즉, 진압작전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보고를 한 것이었습니다.

    지휘부도 이런 상황은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06:14 경찰 무전)
    ◀서울청 경비 1과장▶
    "준비된 크레인이 어제 우리 예정했던 것보다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 작전은 계단을 통해서 먼저...“

    하지만 경찰 지휘부는
    겁먹은 거냐, 밑에서 물대포로 쏘면서 진압하면 될 거 아니냐는 말로 경찰특공대를
    윽박질렀습니다.

    진압작전은 이렇게 준비가 부족한 채로
    서둘러 강행됐습니다.

    ---

    (06:00)
    새벽 6시,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06:14)
    ◀서울청 차장▶
    “진입 전에 기선을 제압해야 하니까 전 물포를 다 쏩시다.”

    (6:44)
    ◀특공대장▶
    "빨리 망루 쪽으로 이동하세요."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의 거센 물줄기가
    망루에 집중됐습니다.

    (06:57)
    ◀서울청 경비1과장▶
    "망루 가운데를 보면 창문이 있는데 그쪽으로 물포를 집중해서 쏠 수 있도록"

    ◀ I N T ▶ 김재호 / 당시 망루농성 참가
    "가까운데다가 집어넣고 쏴버리면 완전히 물 힘이 엄청 셀 거 아니에요. 최루액 같은 걸 안에다 쏴 넣어가지고선 저희가 처음에 매워서 견디지를 못했어요."

    7시, 경찰특공대가 망루 3층까지 진입했을 때,
    1차 화재가 발생합니다.

    (7:06)
    ◀서울청 경비부장▶
    "망루 안에 불이 많이 나서 끄고 있어요."

    (3D-CG) 철거민 대부분이 연행되고
    망루 4층에 철거민 몇 명만 남아있는 상황.

    경찰특공대의 진입으로 망루 2,3 층이 무너졌고 이 때 바닥에 쌓아뒀던 시너와 유사 휘발유 등
    수십 통의 인화물질이
    물 위로 쏟아져내렸습니다.

    망루 안은 유증기로 가득찼습니다. //

    ◀김OO 특공대원 진술조서 (음성대독)▶
    “옥상 위로 가득한 물 위로 불길이 이리저리 떠다니므로 비좁은 옥상에서 많은 직원들이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유독가스와 화염에 싸여 고통을 호소하는 이 상황은 생지옥과 비교될 정도였습니다.”

    작은 불꽃에도 망루가 폭발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이런 상황을 보고했지만,
    진압을 강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김OO 특공대원▶
    "(특공대장이) 어떻게 돼 가냐고 다그치는 투로 했었는데, 아직 멀었냐고, 내가 올라갈까? 하면서. 빨리 끝내라는 뉘앙스죠. 직원들이 듣기로는 빨리 해라, 내가 갈까? 이런 뉘앙스니까요."

    ---

    [특공대, 망루 2차 진입]

    이렇게 해서 7시 18분, 2차 망루진입이
    강행됐습니다.

    (7:18)
    ◀서울청 경비1과장▶
    "현재 이제 망루만 남았습니다. 시위대 검거하면서 미란다 원칙 반드시 고지하고..."

    특공대원들이 다시 진입하던 순간,
    망루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7:22)
    "물포 빨리 다 쏴 버리란말이야. 물포 있는 거 다 쏴"

    "지금 기름이기 때문에 물로는 소화가 안 됩니다. 소방차가 도와줘야 합니다. 이건 유류기 때문에 물로 소화가 안 됩니다." (외부R2-46)

    석유제품 화재에 대비한
    화학소방차 같은 장비들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

    "어떻게 해. 저거 어떻게 해"

    망루가 붕괴되자,
    그제야 사람이 다 나왔나 묻습니다.

    (7:25)
    ◀서울청 차장▶ "망루 안에 시위대들 다 나왔어요?"

    ◀특공대장▶"지금 확인이 안 됩니다. 우리 경력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같이 나온 것 같습니다." (외부R2-44)

    가까스로 망루를 탈출했어도 시위대를 구조할 소방사다리차도 없었고,

    추락에 대비한 안전매트도 모자랐습니다.

    망루에 올랐던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은 이렇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따뜻한 곳으로 가서 잘 살아. 따뜻한 데 가서 잘 살아"
    ◀ END ▶


    ◀ ST 2.▶ 급박한 상황이었나

    김의성 경찰 지휘부는 작전에 필요한 최소한의 안전조치조차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압을 시도했고 현장에 출동한 특공대 간부도 위험하니까 작전을 중단해야 한다고까지 보고를 했었군요.
    김정인 네. 그런데도 현장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경찰 수뇌부는 ‘겁나서 그러는 거냐. 내가 올라갈까.’ 라고 하면서 경찰특공대를 윽박질렀던 겁니다.
    주진우 경찰이 어떤 조직입니까. 경찰특공대는 또 어떤 조직입니까. 테러범 잡는 조직이에요. 그런데 상관이 명령하고 있습니다. 누가 안 들어가고 버티겠습니까.
    권희진 네. 그렇다면 당시 농성장의 상황이 특공대를 투입할 만큼 그렇게 심각하고 급박했던 상황이었는지를 따져봐야 될 텐데요. 투입 바로 전날, 그러니까 2009년 1월19일 농성장의 하루를 재구성해 봤습니다.

    ◀ END ▶


    ◀ VCR2 ▶

    2009년 1월 19일 새벽 5시쯤, 철거민 30여 명이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 망루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재개발 때문에 쫓겨나게 된
    일대 상가 세입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1인당 평균 보상금 2천5백만원.

    이 돈을 들고 생업 터전에서 쫒겨나면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거리에서 외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 I N T ▶김영덕 / 고 양회성 씨 (용산참사 희생자) 부인
    "2억을 넘게 투자를 해서 수리하고 또 권리금 주고 집기 들이고 이제 그렇게 해서 영업을 했는데 6100만원 나오니까 저희는 기가 막힌 거죠.//돈 6천만원 가지고 어디서 뭘하겠어요"

    망루에라도 올라가 농성을 하면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 I N T ▶이충연 / 당시 망루 농성 참가
    "저희의 억울함을 인허가권자였던 지방자치단체, 그 어느 곳도 저희의 얘기를 들어봐주지 않고 개발을 주도하는 삼성물산과 조합의 편을 들어서 저희 세입자들을 정말 떼쟁이로 그렇게 몰아갔잖아요."

    용역들의 무자비한 폭력을 피하려면
    차라리 망루가 낫다는 판단도 있었다고 합니다.

    ◀ I N T ▶김재호 / 당시 망루 농성 참가
    "(철거 용역들한테) 너무 막 많이 맞고 싸움하다 보니까 야 이거 이렇게 부딪히지 않고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없을까 하다 타 지역에서 옛날에 그런 망루 짓는게 있었다고 그래서 그거 한 번 해보자. 그래도 그게 용역과 맞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일상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용역,
    그리고 자신들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않는 경찰,
    철거민들에게는 모두 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 I N T ▶김영덕 / 고 양회성 씨 (용산참사 희생자) 부인
    "경찰이 우리 서민 편이 아니라 용역 편에 선 거에요. 그렇게하고 싸움이 붙으면 저희는 파출소에 집어넣고 그놈들을 풀어주고.."

    농성을 위해 망루를 짓기 시작하자마자
    용역의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속속 현장으로 증원됐습니다.

    경찰 무전 7시54분
    "새벽 5시 쯤에 기습적으로 5층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망루를 설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경찰의 허가를 받은 용역들은
    건물 진입을 시도했고,
    철거민들은 이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벽돌을 떨어뜨리며 저항했습니다.

    오전 9시쯤, 경찰 측이 철거민들을 향해
    물대포를 발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강추위 속에, 물대포에 몸이 젖은 철거민들은 경찰과 용역, 그리고 날아드는 물줄기를 향해
    골프공 등을 쏘았습니다.

    용역들의 건물 진입을 막기 위해 화염병도
    던졌습니다.

    경찰은 철거민들이 무차별적으로 골프공을 쏘고 화염병을 던졌다며 심각한 상황임을
    강조했지만 이날 부상자는 없었습니다.

    당시 현장의 용역 한 명은, 이날 농성장 주변에 일반 시민은 거의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 이OO / 당시 철거업체 직원
    거기서 그 시간에 저희들(철거업체 직원들) 밖에 더 있었나요?
    (근데 그 일반인들을 향해서 막 쏘지는 않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일반인 접근이 안 됐으니까요
    (아, 일반인 접근이 안 됐으니까)


    철거민들과 용역의 이런 대치 상황은 그러나 '다시 불붙은 화염병', '서울 도심 화염병
    재등장' 등의 제목으로 철거민들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기사화됐습니다.

    ◀ I N T ▶김재호 / (당시 망루농성 참가)
    "용역들 때문에 내가 던지지 내가 민간인한테 우리가 같은 국민인데 누가 그걸 던지겠어요. 그거는 말도 안되는 얘기고 결국은 한이 맺혔지 용역들한테. 하도 많아 맞아서, 걔들 얼굴만 보면 뭐 무슨 짓을 못하겠어요."

    용역들은 철거민들을 계속 자극했고,
    철거민들은 벽돌을 떨어뜨리며 맞섰습니다.

    물대포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경찰 무전 11시10분
    "물포 5호 살수하랍니다. 살수 하세요."
    경찰 무전 11시22분
    "물포 5호 망루 쪽 계속 발사하세요."

    진입을 시도하는 경찰과 용역에 맞선
    철거민들의 저항도 계속됐습니다.

    살수차와 용역을 향해 새총으로
    골프공과 유리구슬 등을 발사했습니다.

    이런 대치 상황에서 경찰 행정차량의 조수석
    유리창이 유리구슬에 맞아 파손됐고, 경찰
    채증 요원 1명이 골프공에 가슴을 맞기도
    했습니다.

    12시 10분, 망루설치가 마무리되가면서
    망루를 겨냥한 물포 살수가 중단됐고 이에 따라
    철거민들의 저항도 멎었습니다.

    경찰 무전 12시10분
    "현재는 소강상태이고 현재 교통 소통시키겠습니다."

    이후 별다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고,
    낮 12시 10분을 기해 남일당 건물 앞 대로의
    교통 통제마저 풀리면서 농성장 주변은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경찰 무전 13시37분
    "옥상에는 두 명, 세 명만 왔다갔다하고 있고
    다른 상황이 없습니다."

    오후 3시쯤 철거 용역들은,
    철거민들의 농성을 방해하기 위해
    폐타이어 등 쓰레기를 태워
    유독 가스를 옥상으로 올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철거민들의 별다른 저항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현장의 경찰 병력도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용역과 경찰, 그리고 철거민들의 충돌은
    이처럼 1월 19일 낮에 마무리됐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생계보장을 요구하는 철거민들이 하루 종일 화염병과 골프공 등을 던지며
    '도심 테러'를 벌여 강제진압을 할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김수정 서울경찰청 차장/2009.1.20
    “새총에다가 골프공, 또 무작위하게 무차별로
    투척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서울 시내 중심에
    이런 테러라고 칭할 만큼 과격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저희들이..."

    ◀ ST 3 ▶
    김의성 아무리 봐도 경찰이 저렇게 진입할 만한 급박한 상황으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철거민과 용역 간의 충돌이 있었지만 그것도 오전에 잠깐 있었던 것이고 저걸 경찰 말처럼 테러라고 부를 순 없지 않나요?
    권희진 네. 사실 이런 상황들은 돈을 주고 내보낼 사람하고 돈을 받고 나갈 사람 사이에 합의가 안 돼서 벌어지는 민사 분쟁 아닙니까? 재개발 철거현장에서는 늘상 일어나는 일이고요. 그런데 이런 민사 분쟁에 경찰특공대가 투입이 된 거죠.
    주진우 그 당시 그 일대는 철거 용역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지나가면 막습니다. 쇠파이프를 두들기거나 돌을 던지거나. 그래서 세입자들의 업소에 일반인들이 들어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래야 철거가 용이할 거 아닙니까. 경찰이 보는데도 상관없었어요. 제가 취재해서 확인한 바로는 철거 용역 가운데 현직 조직폭력배가 다수 섞여 있었습니다.
    권희진 네. 그런데도 경찰은 농성장에서 철거 용역들하고 충돌하는 철거민들을 테러리스트라고 규정을 하고 경찰특공대를 보내서 진압했던 거죠.
    주진우 철거용역 편들고요.
    김정인 네. 근데 이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스트레이트가 입수한 참사 전날의 경찰 무전 기록을 들여다보니까 더 놀라웠던 건 특공대 투입이 결정된 시점이었습니다.

    ◀ END ▶

    ◀ VCR 3 ▶ 의문의 경찰특공대 투입 결정

    망루농성 첫날인, 2009년 1월19일 8시 20분.

    망루를 짓던 철거민들과 건물로 진입하려는
    용역들 사이에 작은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08:19)
    <용산서 경비과장>
    "간혹 벽돌, 새총을 쏘고 있습니다. 큰 위협은 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각, 테러범을 제압하는
    최고 정예요원들인 경찰특공대는
    이미 출동 지시를 받았습니다.

    오전 9시 반, 경찰특공대는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박OO 특공대장 (진술조서)▶ (음성대독)
    "특공대가 도착했을 때는 시위대가 벽돌이나 염산병 등을 투척하지 않은 상태였고, 경찰도 별다른 대응 없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특공대는 왜 출동한 걸까?

    (09:33) 경찰 지휘망 (음성대독)
    <박OO 특공대장>
    "작전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해놓으세요. 도착하면 바로 현장 답사하고 논의를 할 수 있게"

    여기서 '작전'은 어떤 의미일까.

    ◀김OO 경찰특공대원▶
    "무전에서 작전이라고 하면 진압 작전을 원래 생각했었으니까. 장비를 갖고 간 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거니까요."//

    처음부터 철거민들을 강제 진압하는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날 낮 12시 반쯤, 경찰 지휘부는
    테러 진압을 전문으로 하는
    경찰특공대를 투입해 철거민들을 진압하기로 사실상 결정을 내렸습니다.

    철거민 측과 경찰이 협상을 위해
    처음 접촉했던 바로 그 시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바탕 충돌이 끝난 낮 1~2시 사이
    강제 진압 방침을 까맣게 모르는 철거민들은
    건물 밖의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경찰 지휘부는 이 때 망루가 세워진
    남일당 건물에 다량의 시너와 유사 휘발유 등
    위험 물질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 S Y N ▶ 경찰 채증팀
    "저쪽에 가면 더 확실히 보이거든. 시너통이야."

    그런데 현장의 특공대원들은 망루 안에
    위험 물질이 가득하다는 정보를 받지 못한 채
    작전에 투입됐습니다.

    ◀이OO 특공대 작전팀장 (진술조서) ▶ (음성대독)
    "현장 답사를 가서 새총, 화염병, 돌멩이가
    있다는 건 확인했지만 가스통과 염산, 시너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누구도 망루의 구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

    명령을 충실히 따랐던 서른 두 살의
    특공대원은 불길에 휩싸여 목숨을 잃었습니다.

    ---

    경찰특공대원인 아들이
    망루에서 불에 타 숨지던 그 시각,
    아버지는 택시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김권찬 / 고 김남훈 특공대원 아버지▶
    "개인택시를 할 때...이 정도면 사람 많이 죽겠구나하는 걸 제가 손님하고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사망자가) 우리 아들로 판명이 됐어요. 그래서. 아 눈물이 나네."

    남일당 앞 도로를 지나갈 자신이 없어
    아버지는 택시 운전사 일을 그만뒀습니다.

    ◀김권찬 / 고 김남훈 특공대원 아버지▶
    "그때 그걸로 인해서 저희 집사람도 병원에 지금까지 있어요. 나이 32살에 다 키운 자식을 부모보다 먼저 보냈다는 게 너무 가슴이 아프죠. 눈물을 안 흘리래야 안 흘릴 수가 없어요."

    대량 인명 피해의 가능성이 커서
    강제 진압 작전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서둘러 경찰특공대를 투입해 강제 진압한다는
    결정을 내린 경찰 책임자는 누구일까?

    ◀김석기 서울경찰청장 (2009.1.21 국회)▶
    "(서울경찰청) 차장으로부터 특공대를 투입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받고 결정을 하셨죠.) 네, 그냥 보고를 받았습니다. (아니, 받았습니까? 지시를 하셨습니까? 최종 결정을...) 보고를 받았습니다."

    ◀김유정 / 당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의원▶
    (그러면 이 사인은 누가 한 겁니까?)

    ◀김석기 서울경찰청장 (2009.1.21 국회)▶
    "제가 사인했습니다."

    ◀김유정 / 당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의원▶
    (사인해서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보고만 받았다고 결정 안 했다고 지금 발뺌하시는 겁니까?)

    ◀김석기 서울경찰청장 (2009.1.21 국회)▶
    "제가 보고를 받았다는 것,
    그 자체가 승인이 아니겠습니까?"

    끝까지 책임지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당시 김석기 서울경찰청장.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 된 김석기 전 청장을
    찾아가 왜 무리한 진압을 강행했는지
    물었습니다.

    ◀김석기 /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경찰에서 얼마 전에 용산참사가 과잉진압이었다고 조사결과를 발표했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정하십니까?)
    ...

    (경찰청장 내정자셨고 서울청장이셨으니까 말씀을 해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거 대법원 판결이 다 난 사안 아닙니까? 대법원 판결보다 더 중요한 결정이 있습니까?

    (참사 전날 아침회의부터 특공대 투입을 논의하신게 맞는 건가요?)
    ...

    (시위 올라간지 25시간 만에 진압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빨리 진압하신 건 왜 그러셨던 건가요?) ... "///

    ◀ END ▶


    ◀ ST 4.▶ 경찰이 서둘렀던 이유는?

    김의성 김석기 전 청장의 저 짧은 영상에서, 영상 안에서 무책임과 무능과 악의를 다 볼 수 있어서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주진우 표정이 너무 오만하지 않습니까.
    김의성 네.
    주진우 김석기 전 청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가장 아끼던 경찰이었습니다. 경찰청장이 되기 전부터 경찰에서는 최고 실세로 꼽혔습니다.
    김의성 사실 철거민들이 저 옥상 높은 곳에 올라간 것은 무슨 거대한 싸움을 준비한다기보다는 몰리고 몰려서 좀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대화를 해달라고 마지막으로 그곳에서 버틴 거 아닙니까?
    주진우 살려달라는 얘기죠.
    권희진 심지어 망루 농성을 준비하던 아주 그 초기에, 경찰특공대 투입을 결정을 했고요. 그래서 협상이라는 거는 시작하기도 전에 경찰특공대 투입부터 결정해서 진압을 할 계획을 하고 있었던 거죠.
    김정인 네. 당시 협상을 담당했던 서울청 정보관은 나중에 법정에서 울면서 증언을 하기도 했었는데요. 대화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여러 사람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면서 모든 사람이 한 번 쯤은 만나서 얘기해봐야 되는 거 아니냐. 이렇게 요청은 했었습니다.
    권희진 당시 검찰이 감추려고 했던 초기수사기록 3천 쪽을 보면요. 여기도 경찰 지휘부 스스로가 이게 상당히 무리한 진압이었다. 라는 거를 인정하는 진술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주진우 스트레이트가 단독으로 입수한 내용입니다.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김정인 네. 그 안에는 김석기 청장의 서면 답변서도 있었고요. 경찰 지휘부의 진술조서가 빼곡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당시 진압 담당자였던 서울경찰청의 경비부장은 참사 당일 농성자들을 고립시킨 채 한나절만 놔뒀어도 모두 손들고 나왔을 거다. 이러면서 무리한 진압이었다는 거를 스스로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주진우 그래서 숨겼군요.
    김정인 그러니까 철거민들을 해산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들어가서 부숴서 진압하는 게 목적이었던 거네요.
    권희진 네. 이렇게 철거민들하고는 조금의 소통도 하지 않고 무리한 진압만을 서두르던 경찰이 긴밀하게 소통하던 대상이 있었습니다. 바로 철거 용역이었습니다.

    ◀ END ▶



    ◀ VCR4 ▶

    용산참사 전날인 철거민들의 농성 첫날,
    망루를 세우는 철거민들을 향해 소방 호스로 물대포를 발사하는 이 사람.

    경찰도, 소방대원도 아닌,
    철거용역업체 직원입니다.

    경찰은 용역업체 직원을
    방패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경찰과 철거용역이 한 몸이 돼
    철거민들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용역들은 심지어 경찰 방패를
    함께 나눠 쓰기도 했습니다.

    -경찰 무전 1월19일 9시04분
    "철거반원들이 우리 방패를 가지고 있는데
    경력들이 방패 달라고 방패 주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철거업체는 심지어 경찰에 신속한 진압작전이 필요하다는 조언까지 했습니다.

    철거용역업체 간부/검찰진술조서 중(대독)
    "제가 서장님에게 '망루가 완성이 되고 나면 나중에 상황이 장기화될 수 있으니까 망루가 완성되기 전에 진압을 해야 할 겁니다'라고 하자 서장님이 '철거회사들은 움직이지 말고 개별행동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사 당일에는 경찰과 용역업체가 아예 함께 움직인 정황도 드러납니다.

    -경찰 무전 1월20일 06시09분
    "용산서장, 건물 2층에 철거반들 아직도 대기하고 있죠?"
    "그렇다 지금 대기 중에 있습니다."

    철거반원으로부터 상황 보고도 받았습니다.

    -경찰 무전 1월20일 06시10분
    "철거반원들이 3,4층 사이에 장애물 설치가 돼 있었다고 어제 보고를 했었는데.."

    경찰은 철거 용역들을 아예 진압 작전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작전을 펼쳤습니다.

    -경찰 무전 1월20일 06시25분
    "철거반원들이 3,4 층에 있는 장애물 없애야지, 가급적이면 철거반이 장애물 조치하도록 하고."

    -경찰 무전 1월20일 06시29분
    "용역 경비원들 해머 등 시정장비를 가지고
    우리 경력 뒤를 따라서 3층에서 4층 시정장치를 해정할 예정입니다."

    경찰과 진압작전을 펼친 이 철거업체들은
    도대체 어떤 회사들일까.

    이 업체들의 철거용역 계약서.

    철거업체인 을이 명도집행, 즉 철거민을
    쫓아내는 작업을 시공사인 병이 관리 감독한다고 돼 있습니다.

    시공사는 바로 삼성물산과 대림, 포스코건설로 구성된 컨소시엄.

    주간사는 삼성물산.

    삼성물산 컨소시엄이 철거민을 쫒아내는 작업을 매일 세세하게 관리 감독한다는 것입니다.

    ◀ S Y N ▶ 재개발사업 관계자(대독)
    "보고의 형식으로는 조합에다 매일 보고죠.
    근데 주간사가 삼성이니까 매일 그걸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거죠.//삼성이 조합 사무실에서 볼 수가 있는 거죠."

    삼성물산은 철거업체를 관리 감독한다는 것은 철거 진행 상황을 보고받는 것이지,
    철거 작업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습니다.

    ☎ 삼성물산 관계자
    "철거공사가 이렇게 얼만큼 진행되고 하는 것들을 알아야//철거공사가 끝난 다음에 그 중단 없이 실제 착공이 진행될 수 있도록하는 일정 수립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그런데 경찰과 긴밀하게 협력했던
    이 철거업체는 삼성물산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 S Y N ▶재개발사업 관계자(대독)
    "00은 주로 그러니까 삼성 협력업체였고요. 00이 그래서 주로 삼성 현장을 맡는
    회사였고.."

    조합 측 관계자는 철거업체 선정에
    삼성물산이 관여했다고 기억합니다.

    ☎ 당시 용산4구역 재개발조합 간부
    "00하고 00하고가 철거업체였는데 그
    업체들을 삼성물산 측에서 소개를 했습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아 그쪽에서 업체를 삼성물산 측에서.."
    "그때 그 시공사(삼성물산 컨소시엄)에서 낙찰을 시켰을 거에요."

    삼성물산 컨소시엄은 2009년 2월까지
    철거를 마치고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었습니다.

    철거가 마무리돼야 분양을 할 수 있고,
    그래야 돈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 S Y N ▶재개발사업 관계자(대독)
    "원래 착공이라는 건 분양 (시작)을 또 의미하거든요. 일반 분양을. 착공 허가가 떨어져야지만 일반 분양이 되기 때문에 착공허가가 안 나면 일반 분양이 법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바로 착공되면 곧 그러니까 일반 분양 수입이 어마어마하게 창출이 되는 건데.."

    그런데 1월 19일, 철거민들이 기습적으로
    장기 농성에 돌입하면서
    삼성물산 컨소시엄의 분양 계획에는
    당시 심각한 차질이 빚어졌습니다.

    이렇게 삼성물산 컨소시엄과 재개발조합,
    그리고 철거민들의 이해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경찰은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농성 진압에 나선 것입니다.

    ◀ I N T ▶김형태 변호사 / ‘용산참사’ 변호인단
    "나갈 이유가 있는지 법적 이유가 있는지 시기가 됐는지 적당한 보상을 받았는지 이런 거는 민사 재판에서 해야되는데 그런 거 없이 경찰이 무조건 들어오는 거는 우리 근대 시민법의 대원칙, 경찰력이 민사에 개입하면 안된다는 원칙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거고요"

    당시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는
    사인 간의 분쟁,
    즉 민사재판으로 해결할 사안에
    왜 경찰특공대를 투입했던 것일까.

    ◀ I N T ▶김석기 자유한국당 의원(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
    "그렇게 조기진압하게 된 건 삼성물산의
    이익 때문이셨습니까?"
    "삼성은 또 무슨 얘깁니까?"
    "삼성물산이 그때 당시 시공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삼성물산의 이익 때문에 경찰이 빨리.."
    "시공사가 삼성인지 나는 알 수도 없고 지금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현재 경찰도 똑같은 그런 원칙을 가지고 하지 않을까요?"

    ==================================

    ◀ ST 5.▶

    김의성 지금도 재개발 현장에서 저런 분쟁이 생기면 철거민들을 테러리스트로 몰겠다. 이 말 아닙니까? 현직 경찰을 모욕하는 발언을 하고 계시네요.
    주진우 사실 세입자들이 이렇게 격렬하게 맞선 데에는 절박한 사정이 있습니다. 재개발을 하고 이사를 가면 권리금과 인테리어 비를 하나도 못 받거나 아주 일부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달라고, 더 달라고 이렇게 애원했던 겁니다.
    권희진 특히 용산참사가 일어났던 용산4구역은요. 모든 절차가 아주 이례적으로 빠르게 진행이 됐습니다. 철거를 해도 된다. 라는 관리처분인가도 보통 4-5년 빨라야 그 정도 걸리는데 여기는 2년 만에 관리처분인가가 났고요. 그러다 보니까 세입자들은 어느 날 갑자기 준비할 시간도 없이 보상금 얼마 줄 테니까 세 달 만에 나가라. 이런 통보를 받게 된 거죠.
    김의성 그 보상금이 평균 2,500만원이라고.
    권희진 네. 아주 작은 돈이죠.
    김정인 네. 그런데도 이런 상황에서 당시 용산 구청장은 이 억울한 세입자들을 떼쟁이라고 규정하면서 전혀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조합 역시 철거 보상비로 500억 원 정도를 책정을 해놨는데 실제로는 1/3정도밖에 집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의성 그런데 이 철거 현장들은 굉장히 많지만, 재개발 현장들이 많은데 이 용산 4구역은 정말 좀 특이한 케이스였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왜 이곳에서 이런 비극이 일어났을까요. 이건 그냥 우연한 일인가요?
    권희진 좀 더 큰 틀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데요. 용산 참사는 어느, 서울의 어느 지역에서 벌어진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불어 닥친 뉴타운과 재개발 광풍이라는 흐름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 END ▶


    ◀ VCR5 ▶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용산 참사 당시, 서울역에서 한강까지 용산
    일대에는 대규모 부도심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발표한
    50조원 규모의 이 개발 프로젝트의 핵심은
    용산역세권 개발 사업.

    31조 규모의 용산역세권 개발사업의
    컨소시엄 주간사는 삼성물산.

    용산역세권 개발로만 삼성물산이 얻게 될
    이익을 당시 대우증권은
    1조4천억원 정도로 추산했습니다.

    참사가 일어난 용산 4구역만 해도
    2조원 규모의 개발 사업이었는데 이 구역의 대표 시공사도 삼성물산이었습니다

    이원호 책임연구원/한국도시연구소
    "결국에 이게 용산참사 문제를 용산 4구역 개발 문제로만 봐서는 안된다. 이 전반적인 서울 부도심 개발 계획 프로젝트와 맞물린
    용산역세권 개발 프로젝트 이런 속에서 사실은 용산이 아주 빠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개발이 진행되었다라고 봅니다."

    용산참사 석달 전인 2008년 9월,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 직속
    국가경쟁력강화위에 참석해
    법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 S Y N ▶ 이명박 대통령 국가경쟁력강회위원회 모두발언 / 2008년 9월 25일
    "제 임기 중에 정말 법 질서를 지키는 사회를 만들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외가 있을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여기서 예외는 있을 수 없다고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대통령 직속 국가경쟁력강화위는 이 자리에서 “불법 폭력시위 등을 극복하고, 법 질서가 확립될 경우 우리나라 브랜드 가치가 크게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예외없는 엄정한 법질서를
    강조한 이 시기,
    삼성은 이명박 대통령의 회사 다스의
    미국내 소송비를 대신 내주고 있었습니다.

    법원은 2008년 4월부터 삼성이 대신 내준
    다스의 소송비 58억원은 뇌물이라고
    판결했습니다.

    ===============================

    ◀ ST 6 ▶
    김의성 참 이 시점이라는 게 공교롭게, 기가 막히게 서로 맞아 떨어지네요.
    주진우 기가 막히네요.
    김의성 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아주 공교롭게도 이명박 전 대통령이 예외 없는 법 집행을 강조하고 계실 때 삼성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계셨고요.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과 삼성이 이렇게 끈끈한 관계일 때 용산참사가 발생한 거죠.
    주진우 이상한 거는 또 있습니다. 언론의 논조인데요. 용산참사가 처음 일어났을 때는 과잉 진압이라고 경찰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언론의 논조가 확 바뀝니다.
    김정인 네. 맞습니다. 다들 좀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었었는데요. 경찰이 조직적으로 언론을 접촉했던 정황이 최근에 드러났습니다. 스트레이트는 그 언론 접촉 리스트를 접수했습니다.

    ◀ END ▶

    ◀ VCR 6 ▶ 경찰의 '언론 접촉 리스트'

    용산참사 당일 오후부터
    경찰은 과잉진압이라는 비판 여론에
    은밀히, 하지만 신속하게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청 수사국이 중심이 됐습니다.

    <스트레이트>가 입수한
    경찰의 언론 접촉 리스트입니다.

    수사국의 계장급 이상 간부들이
    언론사 편집국장이나 기자들에게
    접촉한 내용이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시위농성자들의 폭력성,
    경찰력 투입의 필요성을
    설명했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언론사 간부들의 반응도
    적었습니다.

    ◀경찰 대응문건▶ (음성대독)
    "MBC 국제부 부장 김OO 전화통화. 경찰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법질서 확립을 위해서는 엄정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공감하며 후배기자들에게도 같은 취지로 조언하겠다는 반응"//

    당시 MBC 국제부 부장은
    김장겸 전 MBC 사장.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전화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아...'

    전화를 받는 대신, 문자로 누군지 묻더니
    다신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

    리스트에는 국내 주요 일간지도 적시됐습니다.

    ◀경찰 대응문건▶ (음성대독)
    "중앙일보는 경찰이 금번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최대한 우호적 논리를 견지해 나가겠음."

    이 언론사 고위간부를 접촉한 걸로 적시된
    경찰 간부는 어떤 부탁을 했던 것일까.

    ◀경찰청 OO과장▶
    "제가 경찰에 있을 때는 그런 것들이 가끔 있었어요. 근데 제가 구체적으로 우리 김OO한테 그런 부탁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납니다. 내가 만약에 했다면 우리 경찰 너무 어렵지 않게 보도가 잘 됐으면 좋겠다. 뭐 그런 정도는 내가 했을 수 있어요.“

    기사는 실제 바뀌었을까.

    '경찰이 좀 더 유연하게 대처했어야 한다',

    '진상부터 규명해야 한다'던 논조는

    '불법폭력을 용인해선 안된다'고
    불과 이틀만에 달라졌습니다.

    ◀중앙일보 고위간부 A▶ (음성대독)
    "경찰청 과장이 전화해가지고 이런 저런 보도 좀 해달라 그러면 통하는 겁니까, 터무니 없는 얘기입니다. 상식으로 그게 가능합니까?"

    ---

    '망루 내부구조도 모르고 전격 돌입'했다며,
    경찰의 과잉 진압을 지적했던
    조선일보의 논조도 달라졌습니다.

    '전철연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사실에 입각한 폭력성을 부각할 필요가 있다'는
    문건 내용과 비슷하게 바뀌어갔습니다. ///

    ◀조선일보 기자 B▶
    "(이렇게 반응을 써 놓았어요. 이런 얘기했던 것 혹시 기억나시나요?) 어디에다가요, 제가? (안OO 수사과장에게 얘기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글쎄, 전혀 기억은 안 나는데."

    ---

    이뿐만이 아닙니다.

    경찰의 여론 조작은
    조직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참사 직후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는
    '공권력이 정당하게 집행됐다는 걸
    국민들에게 홍보'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9백명의 경찰이
    설 연휴에도 인터넷에 댓글을 달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홍보 활동 상황을 자세히
    보고해야 했습니다.

    구청이나 시청에는 용산참사와 관련한
    경찰의 홍보 영상이 뿌려졌고,

    심지어 아파트에도 경찰의 홍보 문건이
    나붙었습니다.

    ---

    용산참사에 대한 비판 여론을 바꾸기위한
    이런 공작은 과연 경찰 조직의
    단독 행동이었을까.

    용산참사 4일 뒤인 1월 24일,
    연쇄살인범 강호순이 검거됐습니다.

    그러자 청와대는 이를 '절호의 기회'라며
    적극 활용하라는 홍보지침을 내려보냈습니다.

    ◀청와대 '홍보지침' 이메일▶ (음성대독)
    "용산 참사로 빚어진 경찰의 부정적 프레임을 연쇄살인사건 해결이라는 긍정적 프레임으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언론이 경찰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실정이니 계속 기사거리를 제공해 촛불을 차단하는데 만전을 기해주시기 바랍니다." ///

    ◀ END ▶


    ◀ ST 7 ▶
    김의성 네. 인터뷰 중에 경찰간부가 기억이 안 난다고 얘기하네요. 기억이 안 날 땐 뭐다?
    주진우 네. 진실입니다.
    권희진 네. 경찰청에는 보통 7-8년차 정도의 젊은, 비교적 젊은 사회부 기자가 출입을 하고요. 경찰은 보통 이 출입 기자를 통해서 자기들의 입장을 언론사에다가 알려오거든요. 그런데 이 경우에는 굉장히 예외적으로 경찰이 직접 언론사에 고위간부에게 접촉을 한 거죠.
    주진우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김정인 네. 그것도 홍보를 담당하는 경찰이 아니라 수사국 간부들이 전화를 했던 겁니다.
    주진우 전방위로 나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의성 이거는 경찰 단위의 움직임만이라고 보기는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더욱 큰 정권 차원의 개입이 있지 않았나. 하는 그런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네요.
    주진우 이때 경찰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임무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댓글 달기였습니다. 설 연휴 동안에도 경찰은 댓글 달기에 바빴습니다.
    김정인 네. 용산 참사 이후에 철거민들에게 비교적 동정적이었던 언론, 그리고 여론마저 돌아서면서 철거민들은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게 됐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직접 만나봤습니다.

    ◀ END ▶


    ◀ VCR 7 ▶ 용산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남일당 건물 망루에 오르기 전,
    김재호 씨는 작은 금은방의 주인이었습니다.

    1984년부터 꾸려온 금은방은 생활의 터전이자 외동딸과의 추억이 켜켜이 밴 곳이었습니다.

    ◀ S Y N ▶ 김재호 / 당시 망루농성 참가
    "두 살, 세 살 하여튼 그때부터 (금은방에서) 키운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얘는 가게가 완전히 집이지."

    보상금 2천만원을 받고 나가라고 했을 때,
    김재호 씨는 망루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밤만 자고 돌아오겠다고 했던
    딸아이와의 약속을 교도소에 수감된 4년 동안
    지킬 수 없었습니다.

    ◀ S Y N ▶ 김재호 / 당시 망루농성 참가
    "학교 가는데도 아빠 사진을 이렇게 몰래 가지고 가서 화장실 가서 보고 그런대요.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

    교도소 담장 안에서 그리움을 담아
    그림 편지를 딸에게 보내고 또 보냈습니다.

    (eff) "혜연아, 우리 딸도 아빠 많이 좋아하지? 아빠는 네가 아빠를 좋아하는 것만큼의 백 배...아니 천 배 더 사랑한단다." //

    '딸바보' 금은방 아저씨는 망루에 오른 뒤,
    '도심 테러리스트'가 됐습니다.

    ◀ S Y N ▶ 김재호 / 당시 망루농성 참가
    "간첩이나 아니면 무슨 지시를 받고 폭파했을 때 내려오는 이런 사람들 잡는 특공대들 아니에요? 근데 저희가 뭐 동네 장사하던 사람들인데 사람이 나쁘면 얼마나 나쁘겠어요."

    ---

    (eff) "어서오세요" "얼마에요?"

    100평이 넘는 식당의 주인이었던 김영덕 씨는
    지금 사라진 남일당 건물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 S Y N ▶ 김영덕 / 고 양회성 씨(용산참사 희생자) 부인

    (어머니, 용산을 떠나지 못하고 계시네요)

    "어떻게 떠나겠습니까, 마음은 항상 이 자리에 가 있죠."

    "남편이 망루에 올라가는 날 저한테 궁금하고 보고 싶으면 길 건너편에서 보면 내려다보겠노라고 그러고 얘기를 하고 그 길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내려다보고 있느냐고, 나 자신 용기를 주라고...그러고 여기서 일하고 있어요."

    ---

    법원은 농성자들이 던진 화염병 때문에 불이 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며 이들에게
    4~5년의 징역형을 선고했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도
    화재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의견을 냈고

    농성 철거민들 누구도 망루 안에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다고 항변했지만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 I N T ▶ 권영국 / ‘용산참사’ 변호인단
    그런 상황에서 불을 지를 수 있느냐..그건 자기 스스로가 죽음을 택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거에요"

    발전기의 스파크 같은
    다른 화재 원인을 증명할 수 없으니
    철거민이 던진 화염병이 화재의
    원인이라는 게 법원의 판단.

    ◀ I N T ▶이충연 / 당시 망루농성 참가
    "망루가 어두워서 제가 발전기를 켰습니다.
    그런데 (증거물인) 그 발전기의 스위치를 국과수에서 분실해요.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어처구니 없는 얘기예요."

    망루에서 살아남은 철거민 9명에게
    이런 이유로 징역형을 확정한 인물은
    양승태 대법관.

    이듬해, 양승태 대법관은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으로 임명됐습니다.

    ◀ S Y N ▶ 신지호 법제사법위원회 의원 (2011년 9월 6일)
    (용산참사와 관련해) 대법원장에 대한 비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S Y N ▶ 양승태 대법원장 후보자 (2011년 9월 6일)
    "저는 공직자는 어떠한 비판이라도 경청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비판이 있다면 저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혹시 뭔가 잘못된 것 있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경찰을 수사했던 초기 수사기록 3천 페이지.

    경찰 수뇌부와 경찰특공대원들을 조사한
    용산참사 사건의 핵심 수사자료입니다.

    그런데 검찰은 이 중요한 수사기록을
    1심 법원에 끝까지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 S Y N ▶ 정병두 / 검찰 특별수사본부장 (2009.2.9)
    "검찰은 고귀한 생명이 희생된 이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사망자들의 사인과 화재원인, 그리고 농성자와 경찰의 책임을 철저히 밝히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수사 책임자, 정병두 차장검사는
    이후 대법관 후보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경찰특공대를 동원한
    무리한 진압 결정을 내려
    참사의 책임자로 지목됐던
    당시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

    용산참사 직후, 대규모 경찰 댓글부대를 동원해 여론조작을 했다는 의혹이 최근 새롭게
    제기됐습니다.

    이랬던 그는 오사카 총영사,
    한국공항공사 사장을 거쳐
    지금은 자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 END ▶

    ◀ ST 8.▶
    김의성 피해자들은 계속 회한과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른바 가해자라고 부를 만한 당시의 검찰, 경찰, 그리고 법원의 수뇌부들은 그야 말로 승승장구 했군요. 강경진압을 한 책임자들에 대해서 처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죠.
    주진우 경찰 한 명과 철거민 다섯 명이 숨졌습니다. 근데 살아남은 철거민들은 경찰을 죽였다고 다 처벌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4년, 5년씩 이렇게 갔습니다. 그런데 죽은 다섯 명의 철거민에 대한 사과, 반성, 위로 아무 것도 없습니다.
    김의성 가해자에 대한 처벌도 없었고요.
    주진우 국가는 없었고요. 외면했고 오히려 짓밟았습니다.
    김정인 네. 최근 경찰 진상조사위는 관련 조사를 다 마쳤는데요. 경찰특공대 진압 명령을 내렸던 당시 김석기 서울경찰청장이나 핵심 지휘부들을 한 번도 소환조사도 못해보고 끝냈습니다.
    권희진 네. 그리고 검찰 과거사위에서 조사를 하고 있지만 당시 수사 검사들의 반발에 부딪힌 상태죠, 지금.
    주진우 10년 만에 주어지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용산참사의 진실을 밝힐 그런 아주 소중한 기회입니다. 그래서 검찰 과거사위 조사가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김정인 네. 용산참사 철거민들을 이제 만나면서 공통적으로 하신 말씀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10년이 지났으니 경찰이든 검찰이든 그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발 진실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주진우 진실을 알아야 가슴에 묻을 거 아닙니까.
    김정인 네. 내 남편이, 내 아버지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이제라도 그 진실을 알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권희진 네. 검찰 과거사위의 재조사 기한은 오는 3월까지입니다. 용산참사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질 수 있을지. 과거사위의 발표 지켜보겠습니다.

    ◀ 클로징 ▶
    김의성 일어나서는 절대 안 될 참사였습니다. 국가가 더 철저히 지키고 보호해야 했던 건 부동산 개발과 그로 인한 누군가의 이익이 아니라, 그 틈바구니에서 희생되었던 세입자들, 철거민들이었습니다.
    주진우 2019년 새해에는 갈 곳 없는 이들이 더 이상 낭떠러지로 내몰리지 않기를. 용산참사의 진실이 밝혀져 상처 받은 피해자들이 조금이나마 위로 받을 수 있기를. 스트레이트가 함께 소망합니다.
    김의성 끈질긴 추적 저널리즘 탐사기획 스트레이트. 저희는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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