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5일 제27기 KBS바둑왕전에서 이세돌 9단이 강동윤 9단을 이기며 시작된 2009년 프로바둑이 12월 30일 제11기 맥심커피배본선 2회전 최철한 9단 대 안조영 9단의 대결을 마지막으로 모두 끝났다.
22개 대회에서 총 3천451국의 공식대국이 벌어졌던 올해, 한국바둑계 화제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김지석 6단, 이창호 9단, 그리고 이세돌 9단을 들 수 있다.
2009년 한국바둑계 대표 3인을 한자어로 풀어본다.
◇화려(華麗) 김지석 김지석에게 2009년은 화려(華麗)한 해였다.
243명의 프로기사 중 가장 많은 경기에 나섰다.
12개 대회에 출전한 김지석은 총 91국을 치러 2위 이창호 9단(76국)을 15국 차이로 멀찌감치 따돌리고 최다대국 1위에 올랐다.
토너먼트가 대부분인 바둑계에서 대국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지석은 71승 20패를 거두면서 최다대국, 다승, 승률(78%), 연승(17연승)등 총4관왕에 올랐고 물가정보배에서 우승하며 생애 첫 타이틀을 따내는 등 2003년 프로데뷔 이후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KB국민은행 2009한국바둑리그에서는 정규리그 10승으로 최다승을 올렸고 포스트시즌에서도 2승을 거둬 소속팀인 영남일보의 3연패(連覇)를 이끌며 MVP에 등극했다.
그동안 국제전에 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으나 농심신라면배에 선봉장으로 출전해 야마시타 게이고 9단, 딩웨이 9단, 다카오 신지 9단을 연파해 강한 이미지를 심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들어 박카스배 천원전 결승에서 자신보다 4살 어린 16세의 박정환 4단에게 0-3으로 무너지며 마무리에 실패한 것은 '옥에 티'였다.
◇부활(復活) 이창호 '돌부처' 이창호의 극적인 부활(復活)도 2009년 바둑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제였다.
연초에 이세돌을 이기고 바둑왕전에서 우승했던 이창호는 이후 응씨배, 춘란배,후지쓰배 등 메이저 세계대회에서 잇달아 준우승에 그치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더니 8월에는 한국물가정보배 결승에서 김지석에게 마저 패하며 깊은 준우승 징크스에 빠졌다.
10월 들어서는 자신의 최저기록인 4위까지 랭킹이 떨어졌고 삼성화재배 준결승에서 한수 아래로 여겨지던 중국의 추쥔 8단에게 패하며 탈락, 이창호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냐는 평가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9단은 추쥔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며 극적인 부활에 성공했다.
삼성화재배 패배 후 4일 만에, LG배 8강전에서 추쥔을 다시 만난 이창호는 리벤지에 성공하며 그 여세를 몰아 결승까지 진출했다.
"패했다면 충격이 컸을 것이다"고 스스로 밝혔을 정도로 절체절명의 고비였던 추쥔과의 복수전에 성공한 이창호는 이후 13경기에 나서 12승1패의 눈부신 성적으로부활을 알렸다.
우승상금 1억원으로 국내최대 타이틀인 '하이원리조트배 명인전'에서 우승하며 6년만에 명인에 복귀, 2관왕에 올랐고 12월 랭킹에서도 26개월만에 1위에 올랐다.
신산(神算)이라는 별명답게 '끝내기'에서 승부를 뒤집은 셈이다.
◇공권(空拳) 이세돌 '풍운아' 이세돌에게 2009년은 4관왕에서 맨주먹(空拳)의 무관으로 추락한 한해였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중국의 쿵제를 누르고 삼성화재배에서 우승, 2연패에 성공할 때 까지만 해도 이세돌에게 2009년도 순조로운 한해가 될 것처럼 보였다.
국내최고(最古) 전통의 국수전에서 목진석의 도전을 3-1로 물리치며 2연패해 1월에만 두 개의 타이틀을 거머쥐며 거칠 것 없는 기세를 이어나갔다.
2월은 이세돌 침몰의 조짐이 나타난 달이었다.
동문후배 강동윤에게 대역전패를 당하며 박카스배 천원전을 잃을 때만 해도 그럴 수 도 있다고들 했다.
그러나 세계1인자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합하던 중국의 구리 9단과의 LG배 결승은 이세돌 왕국의 균열을 가져왔다.
백담사에서 열린 동갑내기 라이벌간의 대결에서 구리는 모친과 동행하며 착실하게 컨디션을 조절한 반면, 이세돌은 대국 당일 새벽에 택시로 도착하는 등 석연치 않은 행동을 보이며 0-2로 완패 당했다.
본인은 입을 굳게 다물었지만 이틀 전에 대국장에 가겠다는 자신의 요청을 사무국에서 거절한데 대한 항의표시였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기원 사무국에서는 세계대회 결승전을 앞둔 선수가 자신의 컨디션조
절을 위한 요청사항을 거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해 바둑계에서는 무언가 이세돌과 사무국사이에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이후 이세돌은 KBS바둑왕전 결승에서 이창호 9단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고 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 준결승에서도 입단동기 조한승 9단에게 막혀 결승진출에실패하는 등 난조를 보였다.
4월에 열린 한국리그는 세계바둑계를 호령하던 이세돌의 추락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국발 경제한파가 한국바둑계에도 미쳐 한국리그는 총예산의 1/3이 삭감되고 참가팀수도 한 개가 준 7개팀으로 어렵사리 출범하게 되었다.
공교롭게 그 시점에서 이세돌은 1인자에 대한 처우문제, 중국리그에 전념, 소속팀이었던 제일화재의 해체 등을 이유로 한국리그 불참을 선언했다.
이세돌의 고향인 신안군에서 이세돌 영입을 염두에 두고 창단했던 ‘신안태평천일염팀’뿐만 아니라 전체 바둑계가 그의 불참선언에 크게 동요했다.
마침내 기사회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5월 26일에 열린 총회를 통해 한국리그불참, 중국리그 대국료 일부의 기사회 납부거부, 각종 시상식과 개막식 불참 등을 사유로 이세돌에 '뭔가 조치를 해야 한다'는 사실상의 징계결의안을 찬성 86표 대 반대 37표로 통과시켰다.
그러자 이세돌은 이에 반발하며 7월부터 1년 6개월간 장기휴직에 들어가겠다고 휴직계를 제출하는 초강수를 들고 나왔다.
결국 7월 2일 한국기원 이사회에서는 이세돌에게 자숙을 권고하며 휴직계를 받아들여 바둑계는 1인자의 장기휴직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됐다.
지난 12월 17일에 복직원을 제출하며 이세돌 휴직사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이세돌은 그동안 많은 것을 잃었다.
총 8차례의 기권패로 23개월간 지켜온 1위자리를 내줬고 국수(國手)타이틀을 반납하며 4관왕이었던 그의 신분은 무관으로 전락, 졸지에 적수공권(赤手空拳)이 되고말았다.
비록 6개월간의 공백은 있었지만 복직원이 받아들여져 이세돌이 조기 복귀한다면 중국세에 고전하던 한국바둑계에 큰 힘이 될 것만은 분명해 바둑팬들의 눈은 그의 행마에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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