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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안먼 20주년> ② 새롭게 드러난 사실들

<톈안먼 20주년> ② 새롭게 드러난 사실들
입력 2009-05-31 07:24 | 수정 2009-05-31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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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톈안먼(天安門) 사태는 중국 현대사의 한획을 긋는 중대사건임에도 그 진실은 아직 역사의 베일속에 가려있다.

    톈안먼 사태를 `반혁명 소요'로 규정하고 있는 중국 공산당이 톈안먼 사태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기로 여기고 있어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는 시도는 원천적인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톈안먼 사태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이처럼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탄압과 박해를 각오한 일부 반체제 인사나 중국의 민주주의와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는 서방세계의 언론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중국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더불어 중국 국민의 의식수준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어 중국 공산당이 정치개혁과 민주화의 시발점으로 불리는 텐안먼 사태에 대한 국내외의 재평가 요구를 언제까지나 묵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대두되고 있다.

    특히 톈안먼 사태 20주년을 맞아 올해에는 중국 외부에서 뿐 아니라 내부에서도톈안먼 사태에 대한 진상규명과 재평가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그 어느 해보다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톈안먼 사태의 한 복판에 서있던 자오쯔양(趙紫陽)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사후 회고록 `국가의 죄수'(The Prisoner of the State)은 진실 규명을 위한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는 게 중국문제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자오쯔양은 1989년 톈안먼 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을 주장한 덩샤오핑에 반기를 들었다가 권좌에서 쫓겨난 뒤 가택연금 생활을 하다 2005년 1월 사망한 비운의 정치가다.

    ◇ 자오쯔양 "텐안먼 민주화 시위는 리펑의 음모 때문에 격화"..."무력 진압 최종책임은 덩샤오핑" = 자오쯔양은 회고록에서 1989년 학생들의 톈안먼 민주화 시위가 격화된 책임은 당시 리펑(李鵬) 총리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자오쯔양은 리펑과 함께 당시 베이징 시장이던 천시퉁(陳希同), 부총리였던 야오이린(姚依林)을 강경 보수파의 핵심인물로 지목했다.

    회고록에서 자오쯔양은 1989년 4월 26일 중국 공산당의 대변지격인 인민일보가사설을 통해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학생들의 시위를 `반(反) 공산당, 반(反) 사회주의적'이라고 매도함으로써 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고 규모가 커졌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덩샤오핑(鄧小平)은 4월 25일 리펑 총리를 비롯한 당 지도부들과 내부 모임을 가졌다.

    덩샤오핑은 학생시위에 대한 자신의 발언(비판발언)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덩샤오핑의 발언은 다음날 인민일보에 각색돼 실렸다"면서 인민일보 사설의 배후에는 리펑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은 자신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자신의 발언을 공개한 리펑에 대해 다시는 그와 같은 행동을 하지 말도록 경고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자오쯔양은 무력진압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덩샤오핑이 져야 한다고 강조한 뒤 "덩샤오핑은 민주주의가 안정을 저해한다고 믿었기때문에 학생들의 시위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항상 강경책을 선호했다"고 말했다.

    ◇ 자오쯔양 "무력 집압 결정은 위법"..."중앙정치국 상무위의 표결절차 없었다" = 자오쯔양은 대학생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결정은 불법이라고 증언했다.

    `국가의 죄수'에 따르면 베이징(北京) 일부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기로 한 결정은 1989년 5월 17일 밤 당시 최고 실력자이자 중앙군사위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의 자택에서 이뤄졌다.

    당시 공산당 총서기였던 자오쯔양은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가 표결을 한 결과 3대2로 계엄령이 결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3대 2의 표결'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자오쯔양의 이 같은 증언은 톈안먼 사태 당시 중국 지도부의 계엄령 결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5명의 공식표결을 통해 이뤄졌다는 지금까지의 통설을 뒤엎는 것이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사의 `톈안먼 사태 보고서' 등 중국 당국의 공식문건에 따르면 5월 17일 덩샤오핑의 자택에서 이뤄진 중앙정치국 상무위 회의에서 자오쯔양 총서기와 후치리(胡啓立) 상무위원은 무력 사용에 반대한 반면 리펑 총리를 비롯해 야오이린

    부총리, 차오스(喬石) 부총리 등 나머지 3명은 찬성입장을 밝힌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자오쯔양은 1989년 5월 17일 밤 덩샤오핑의 자택 회동에는 5명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이외에 덩샤오핑과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겸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모두 7명이 참석했다고 밝힌 뒤 계엄령결정이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이뤄진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자오쯔양은 자신과 후치리는 학생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반 공산당, 반 사회주의 소요사태'로 규정한 인민일보의 4월 26일자 사설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리펑과 야오이린은 이에 반대입장을 표명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나머지 한명의 상무위원인 차오스는 특별한 견해를 밝히지 않은 채 중립을 지켰다는 것. 자오쯔양은 "물론 중앙정치국 상무위의 멤버가 아닌 덩샤오핑과 양상쿤까지 포함할 경우 그들이 다수파였던 것은 분명하다"면서 "그러나 중앙정치국 상무위의 공식적인 표결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덩샤오핑 자택에서 이뤄진 공산당 최고지도부의회동 이후 계엄령은 같은해 5월 20일 선포됐다.

    자오쯔양은 1989년 6월 4일 이뤄진 시위대에 대한 발포 명령도 비슷한 상황에서, 불법적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 전 신화통신 간부 "희생자 727명" 주장 = 톈안먼 사태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희생자수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톈안먼 민주화운동으로 자녀를 잃은 부모들이 만든 `톈안먼 어머니회'와 중국의 반체제 인사들은 톈안먼 사태에 대한 공식적인 조사 및 희생자 명단 공개,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보상,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고 있으나 중국 당국은 희생자 명단은 물론 정확한 희생자수 조차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중국 국무원측은 수년전 비공식적으로 톈안먼 사태의 희생자수가 300명 가량 될 것으로 추정한 바 있으며, 양상쿤 전 국가주석도 1998년 사망하기전 사적인자리에서 희생자수가 600명을 넘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반면 서방언론들은 희생자수가 2천명을 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톈안먼 사태 당시 중국 관영 신화통신의 국내뉴스부 주임으로 재직했던 장완수(張萬舒)씨는 최근 펴낸 `역사의 대폭발'(歷史的 大暴炸)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희생자수를 구체적으로 추정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장완수는 중국 홍십자사 고위간부의 말을 인용해 톈안먼 사태 희생자가 민간인713명과 군인 14명 등 727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장완수는 500페이지 분량의 이 책에서 중국 정부가 시위진압을 위해 동원한 군 병력이 10만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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