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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과학을 낳은 16세기 현장 기술

17세기 과학을 낳은 16세기 현장 기술
입력 2010-03-04 18:07 | 수정 2010-03-0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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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책에서 서양의 14~15세기는 르네상스 시대로, 17세기는 과학혁명의 시대로 조명된다.

    이에 반해 16세기는 별다른 이름도 없고, 그만큼 주목받지도 못했던 시대다.

    하지만, 일본의 재야 물리학자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16세기 문화혁명'(동아시아 펴냄)에서 16세기가 17세기 과학혁명을 이끌어낸 '지각변동'의 시기였다는 주장을 펼쳐낸다.

    16세기에는 엘리트층이 아니라 수공업 직인(職人)들에게서 변혁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도제식으로 훈련받던 예술가와 기술자 등 직인들이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16세기의 변화는 이들로부터 시작된 만큼 직인중심, 현장중심, (라틴어가 아닌) 속어중심이었다.

    화가와 조각가 등 예술가들은 고객의 지시에 따르는 밥벌이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작품활동도 하고, 원근법과 같은 작업 기술을 출간하기도 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르네상스 마지막 예술가로, 이런 16세기의 움직임을 이끌었다.

    하지만, 알베르티와 다 빈치가 여전히 직인들을 경시했던 데 반해 독일의 화가이자 수학자인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들의 성과를 받아들이면서 엘리트주의를 배격했다.

    16세기 직인들은 또 이론보다 현장을 중시했다.

    예술가들이 해부도를 그리거나 투시도법을 개발해낸 것도 이런 맥락이지만, 특히 의학 부문에서는 더 두드러졌다.

    '외과의(surgery)'로 불렸던 이발사들은 환자의 몸을 절개하는 실제 의료행위를 도맡았다.

    실제로 흑사병이 창궐할 때 대학교육을 받은 의사들은 귀족과 함께 피난하는 데 급급했던 반면, 외과의들은 나름의 치료법을 개발하는 등 활약을 보였다.

    16세기의 또 다른 특징은 '속어' 중심이었다.

    모든 학문이 라틴어로 진행되던 시절, 상업수학은 아라비아 숫자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으로 교육이 이뤄져 대수학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룩했다.

    이 시기에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을 프랑스어로 썼고 알베르티의 '회화론' 역시 중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어로 번역됐다.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역시 독일어로 번역되면서 파급력을 얻었다.

    하지만, 16세기 문화혁명은 직인 중심으로 이뤄졌기에 이론의 토대가 부실하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이어진 17세기 과학혁명은 16세기에 이뤄진 기술 발전과 실험 결과를 해석하고 이론을 입안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17세기부터 학문적 변혁의 주도권은 다시 엘리트층으로 넘어갔다.

    저자는 16세기 문화혁명은 현장과 자연에 대한 외경심이 살아 있었던 경험주의적 변혁이었지만, 17세기부터는 과학이 자연에 앞선다는 과신이 뿌리내렸다고 비교한다.

    이어 이때 시작된 과학 주도가 극단에 이른 사례로 핵폭탄을 든다.

    이를 토대로 저자는 '과학기술'의 무제약적 성장을 수정할 시대에 와 있다고 진단한다.

    1960년대 말 도쿄대 전학공투회의(全學共鬪會議ㆍ전공투) 의장으로 학생운동에 앞장서 '실천하는 지성'의 상징이던 저자의 이력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인공의 천국'이라 할 정도로 과학기술 만능주의가 퍼진 이 시대에 저자가 묘사하는 16세기 직인들은 자연에 겸손하면서도 정확성을 견지하는 태도로 시사점을 던진다.

    한편으로, 생업으로 바쁘면서도 혁명적인 진보를 보여줬던 16세기 직인들의 업적은 학원강사로 생계를 이으며 대작을 완성한 저자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940쪽. 3만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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