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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가 속한 '장악원'은 어떤 곳일까?

동이가 속한 '장악원'은 어떤 곳일까?
입력 2010-04-13 18:50 | 수정 2010-04-13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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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7회 만에 월화드라마 왕좌에 오른 <동이>.

    주인공 동이는 아버지와 오빠를 잃고 포청의 추격을 피하는 한편, 나비 문양의 장신구를 가진 항아님을 찾기 위해 장악원에 들어간다.

    동이의 오빠 최동주(정성운 분)가 악공으로 있었던 이곳은 연주 중 음율이 무너지는 '음변'으로 초비상을 맞기도 한다.

    궁안의 음악을 관장했던 그곳, 장악원은 어떻게 생겨났고 어떠한 일을 했을까.

    장악원(掌樂院)은 글자 그대로 ‘음악을 관장’했던 예조(禮曹) 소속의 정3품 관청이다.

    조선 건국 후 궁중음악의 활동은 고려의 전통을 이은 전악서와 아악서, 관습도감과 조선 초 새로 설치된 악학에서 담당했다가 1457년(세조 3년) 전악서와 아악서를 장악서, 악학과 관습도감을 악학도감으로 개편했다.

    그리고 1466년 장악서가 악학도감의 업무를 흡수하면서 궁중음악과 무용에 대한 행정과 연주활동이 일원화되었고 이것을 1470년(성종 1년) 이전에 장악원으로 개칭하였다.



    장악원 건물이 완공된 뒤 장악원 제조를 지냈던 성현(1439~1504)이 기록한 <장악원제명기>를 보면 “사람으로서 가히 음악을 알지 못할 수 없을 것이니 음악을 모른다면 우울하고 폐색되어 무엇으로도 그 기운을 펼 수가 없을 것이요, 나라에 하루 동안이라도 음악이 없을 수 없으니 음악이 없다면 침체하고 야비하여 무엇으로도 그 화기를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왕이 음악의 방법을 세우고 음악의 관원을 설치하여 인심의 같은 바로 감발하고 징계하여 가다듬게 하는 바가 있게 한 것이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렇듯 조선은 백성을 교화하여 다스리는 ‘덕치’를 지향했기 때문에 예(禮)와 악(樂)을 중시했고 이에 음악을 통치 방편의 하나로 인식하여 별도로 음악을 담당하던 기관을 두었던 것.

    더불어 이러한 이치로 ‘음변’이 일어났을 때 조정은 물론 백성들까지 일대 소란이 일어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장악원에서는 주로 국가와 왕실의 공식적인 행사의 음악과 춤을 맡았다.

    종묘, 영녕전, 문소전, 연은전, 소경전의 제례는 ‘속부제악’, 풍운뇌우, 사직, 우사, 선농, 선잠, 문선왕의 제례는 ‘아부제악’, 국왕이 문무백관과 조회하거나 국왕과 왕비의 생일, 문무과의 전시와 생원, 진사과 급제 발표 등에는 ‘전정고취’ 등을 연주했다.

    또, 노인들을 위한 양로연과 외국 사신들을 위한 연향에서 연주자들과 기녀, 무동 등이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었으며 왕이 특별히 민간에 음악을 내려줄 때 악공들이 양반의 사가로 가 연주를 하기도 했다.

    더불어 교육과 연구 및 정책기관으로서 경륜이 깊은 악공들이 악사가 되어 후배 악공들을 가르치는 한편 예악에 밝은 제조 이하 악관들은 음악 정책과 제도, 악장(가사), 의례와 음률, 춤 쓰임의 옳고 그름과 악기 제작 등에도 관여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장악원에는 악사와 악공, 기녀 등을 통틀어 약 1천여 명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장악원은 1895년 궁내부 장례원으로 이속되었다가 1897년(광무 1년) 교방사로 개칭되었으며 1907년에는 장악과로 바뀌었다.

    직제는 음악 행정을 담당한 관리로 제조 2명, 정(정3품)1명, 첨정 1명, 주부 1명, 직장 1명을 두었고 음악의 교육과 연주를 담당한 체아직 녹관으로 전악(정6품) 1명, 부전악(종6품) 2명, 전율(정7품) 2명, 부전율(종7품) 2명, 전음 2명, 부전음 4명, 전성 10명, 부전성 23명을 두었다.

    이 중 체아직 해당자는 악사 2명, 악공 26명, 악생 14명, 관행명 4명 등이었으며 그 밖에 잡무를 담당했던 차비노 7명, 행정관리를 수발했던 근수노 5명을 두었다고 전해진다.


    장악원은 일정한 건물이 없다가 성종 대에 비로소 건물을 얻게 되었는데 집과 뜰이 넓어 신정과 동지 때 왕이 백관의 조하(朝賀: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는 일)를 받는 의식을 연습하거나 과거시험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장악원은 현재 을지로2가 외환은행 앞에서 옛터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음악 행정 관리들인 당상관과 낭청들의 사무실, 악기보관소와 악공, 기생 등 수천 명의 각각의 거처가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엄청났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장악원을 중심으로 했던 궁중음악의 전통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 되다가 일제강점기 때 장악원이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로 개편되면서 일부 이어졌으며 광복 후에는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로 고쳐졌다가 1951년 국립국악원의 설립과 함께 ‘장악과’라는 공연부서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엄호식 기자|사진제공 MBC, MBC방송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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