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15 선거에 즈음해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에 각각 이승만과 이기붕을 내세운 자유당은 선거 홍보 벽보에서 이렇게 썼다.
"나라 위한 八十 평생! 합심하여 또 모시자."
이런 이승만을 사진 아래 부통령 후보 이기붕에게는 "이번에는 속지 말고 바로 뽑자 부통령"이라는 문구를 내걸었다.
자유당은 선거 한 달 전인 그 해 2월에는 '트집마라! 건설이다'는 또 다른 선거홍보물을 배포하고 특히 이기붕의 업적을 강조했다.
부정으로 얼룩진 선거는 부통령까지 자유당 몫으로 돌아가게 했다.
선거 직후 부통령 이기붕은 자유당 당원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발송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4.19혁명이 일어남으로써 자유당 정권은 붕괴한 것이다.
혁명은 정권을 지키고자 하는 측은 물론이고, 무너뜨리려는 측에도 모두피를 불렀다.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4.19의거 사망자 및 부상자 명부를 보면 경찰 4명을 포함해 모두 115명이 사망하고 277명이 부상했다.
걷잡을 수 없는 혁명의 소용돌이를 이승만 정권은 4월21일 국무위원 일괄사표와 이틀 뒤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의 사퇴로 무마하려 했지만, 결국 4월26일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이튿날 그의 사임서가 국회에서 즉각 수리됨으로써 혁명의 기운은 극점으로 치달았다.
이승만의 사임서는 다음과 같다.
"나 리승만은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의 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
단기 4283년 4월27일 리승만." 하지만 대통령에서 물러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 여생을 받치고자 한다는 그의 바람은 하와이 망명과 그곳에서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학생혁명, 시민혁명은 일단 부패정권을 타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가야 할 길은 멀었다.
혁명 발발 한달이 채 되지 않은 5월10일, 계엄사령관 육군중장 송요찬(宋堯讚)은 '공고문'을 내고 "국내 정세의 중대한 전환기에 처(處)하여 각 부분에서 야기되는 혼란을 미연 방지하고 안녕질서를 유지하고저 모-든 집회는 좌기(左記. 다음)와 같은 절차를 취할 것을 공고함"이라는 말과 함께 모든 집회를 엄격히 통제하기 시작한다.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에서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표방하는 포스터를 내건다.
"4.19민주정신으로 멸공통일 이룩하자." 4.19혁명에서 보여준 민주정신이 향할 곳은 이제는 공산당을 때려잡고 통일을 이룩하는 데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시립대박물관(관장 박희현)이 4.19혁명 50주년을 기념해 오는 19일 개막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큰 함성' 특별전은 자유당 선거홍보물과 이승만의 대통령직 사임서, 송요찬의 집회금지 공고문을 비롯해 시민혁명의 전개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들로 꾸며진다.
전시는 8월20일까지.
문화연예
서울=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서울시립대박물관 4.19혁명 특별전
서울시립대박물관 4.19혁명 특별전
입력 2010-04-16 13:45 |
수정 2010-04-1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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