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스포츠
기자이미지 서울=연합뉴스

유수호 아나운서 "28년 만에 농구 중계"

유수호 아나운서 "28년 만에 농구 중계"
입력 2010-02-06 08:06 | 수정 2010-02-06 08:06
재생목록

    지난달 30일 여자프로농구 부천 신세계와 용인 삼성생명의 경기가 시작되기 3시간 전인 오후 2시. 경기도 부천실내체육관 중계석에는 나이가 지긋한 스포츠 캐스터가 혼자 앉아있었다.

    야구와 배구 중계로 스포츠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유수호(63) KBS N 방송위원이었다.

    최근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의 인터넷 방송 WKBL-TV에서 농구 중계를 맡은 유수호 위원은 "원래 모든 중계에서 현장에 3시간 전에 도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면서도 "그런데 농구는 해보니까 한 2시간 전으로 줄여야겠어. 너무 일찍 오는거 같아"라며 껄껄 웃었다.

    1969년 TBC에 입사한 유수호 위원은 이후 KBS로 옮겨 2005년 정년퇴임을 했지만 스포츠 전문 채널인 KBS N에서 야구, 배구 위주로 계속 마이크를 잡고 있다.

    "농구 중계는 28년만"이라고 말했다.

    "1982년인가 원래 잠실에서 야구 중계를 하기로 돼 있었는데 같은 날 잠실 체육관에서 농구 중계를 맡았던 아나운서가 갑자기 펑크를 냈다"고 세월을 되짚어본 유수호 위원은 "야구는 저녁 6시30분이고 농구는 낮 2시니까 농구 한 다음에 야구장으로 가라고 해서 덜컥 대타를 맡았다"고 말했다.

    유수호 위원은 "연세대와 고려대의 경기였는데 그날따라 판정 시비도 나오고 경기가 길어져 6시 다 돼서야 겨우 야구장에 도착했다"며 "연세대 김현준이 던지는 대로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그날 이후로 종합대회에 가서 가끔 농구 중계한 것 외에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베테랑' 소리를 듣는 야구, 배구 중계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유수호 위원은 "지금은 코트 보기가 바쁘다. 조금 더 하면 벤치도 보이고 선수들 움직임도 보이겠지"라며 "그 정도 되면 경기 도중에 비평도 하고 그러겠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며 손을 내저었다.

    유수호 위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스포츠 최다 중계 아나운서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969년 입사해 지금까지 꾸준히 마이크를 잡아온 경력을 앞지를 사람을 찾기가 좀처럼 어렵기 때문이다.

    "처음 TBC 들어갈 때부터 스포츠 중계와 뉴스, 시사프로그램 외엔 안 하겠다는 마음이었다"는 유수호 위원은 "1970년부터 오전 업무 마치면 바로 동대문야구장으로 나갔다.

    중계가 있어서 간 게 아니고 그냥 좋아서 갔다.

    가면 당시 라디오와 TV 중계를 하던 박종세, 이장우 아나운서가 '어쩐 일이냐'고 묻고 나는 '그냥 경기 보러 왔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대학생이던 1960년대에 이미 야구 기록법을 스스로 터득할만큼 야구광이던 유수호 위원은 당시 아나운서 실장이던 박종세 아나운서의 눈에 들어 중계석 근처에서 일을 돕다가 연차에 비해 일찍 중계 데뷔를 하게 됐다.

    "내가 기록을 잘하니까 아나운서랑 해설자 옆에 있다가 기록 이야기가 나오면 마이크를 잡곤 했다"는 유수호 위원은 "당시 택시를 타면 기사들이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유수호 해설자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며 웃었다.

    40년 중계 인생에서 재미있는 일화나 실수담도 많다.

    가장 큰 실수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나왔다.

    유수호 위원은 "양궁 여자개인전 결승이었는데 중계석 위치가 안 좋아서 모니터를 보면서 중계를 해야 하는데 모니터도 햇빛이 들어서 거의 안 보이는 상황이었다"며 "금메달 조윤정, 은메달 김수녕이었는데 그걸 반대로 중계했다. 거의 바로 수정을 했지만 다음날 일간지 사설에서 비판을 받았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종합대회에 가면 금메달 현장을 중계하는 것이 영광이지만 유수호 위원은 "한 대회에서 많으면 2개 정도 따고 그만 해야 한다"고 자신의 '방송 철학'을 말했다.

    "아나운서가 올림픽 금메달 현장의 감동을 시청자들에게 최대한 전해야 되는데 한 대회에서 세 번 이상 금메달을 따면 더 이상 써먹을 '멘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잘 해보자'는 취지로 금메달을 땄을 때 예상 대본까지 만들어 그대로 했지만 맛이 안 났다"는 유수호 위원은 "미리 써놓고 하면 좋은 점도 있지만 현장감이나 감동이 줄어든다"고 지적했다.

    "요즘은 주위에 함께 하던 선후배들이 많이 없어져 빈 자리를 느낀다"고도 말했다.

    현장을 떠난 경우는 거의 대부분이고 세상을 떠난 선후배들도 꽤 있다는 것이다.

    "2008년에

    세상을 뜬 김재영 선배도 친하게 지냈다.

    그분은 꼭 중계할 때 '당당2루타' 이런 표현을 많이 써서 내가 '형, 그 당당 소리 좀 그만 하슈'라고 면박도 줬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유수호 위원은 "나는 그런 표현이 없는 줄 알았는데 몇 해 전부터 중계 스태프들이 나만 보면 '오바~' 그러기에 생각해보니 나도 중계할 때 '세컨 오바~' 이런 표현을 많이 쓰고 있더라"며 "건강이 허락한다면 50년을 채워서 중계방송 명예의 전당이 생기면 거기에 오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스포츠 중계의 산 증인인 유수호 위원은 "이 나이에 농구라는 새로운 종목에 도전을 했는데 '빅 매치'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맡은 중계가 최고의 경기라는 자세로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신의 의견을 남겨주세요

      인기 키워드

        취재플러스

              14F

                엠빅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