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세계
기자이미지 홍콩=연합뉴스

6.4 톈안먼 사태란

6.4 톈안먼 사태란
입력 2010-06-04 14:46 | 수정 2010-06-04 14:46
재생목록
    중국 `민주화의 상징'인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발발한지 4일로 21주기를 맞았다.

    톈안먼 사태란 1989년 6월 4일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베이징(北京) 시내 중심가인 톈안먼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대학생, 노동자, 시민들을 중국 공산당과 정부가 탱크와 장갑차 등을 동원해 무차별적으로 진압한 사건을 말한다.

    톈안먼 사태는 개혁주의 성향을 보이다 1987년 실각한 '비운의 정치가' 후야오방(胡耀邦)이 1989년 4월15일 사망하면서 촉발됐다.

    천체물리학자였던 팡리즈(方勵之)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주도로 후야오방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것이다.

    특히 베이징대학과 베이징사범대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과 노동자, 시민들은 같은 해 5월 13일부터 톈안먼 광장에서 대규모 연좌농성에 돌입했으며, 5월 17일에는 시위대의 규모가 100만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톈안먼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지난해 5월 발간된 사후 회고록 `국가의 죄수'(The Prisoner of the State)에서 민주화 시위가 격화된 책임이 당시 총리였던 리펑(李鵬) 에게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자오쯔양은 리펑과 함께 당시 베이징 시장이던 천시퉁(陳希同), 부총리였던 야오이린(姚依林)을 강경 보수파의 핵심인물로 꼽았다.

    자오쯔양은 1989년 4월 26일 중국 공산당의 대변지격인 인민일보가 사설을 통해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학생들의 시위를 `반(反) 공산당, 반(反) 사회주의적'이라고 매도함으로써 시위가 격화되고 규모도 커졌다면서 인민일보 사설의 배후인물로 리펑을 지목했다.

    시위가 격화되자 5월 17일 밤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들은 당시 최고 실력자이자 중앙군사위 주석이었던 덩샤오핑(鄧小平)의 자택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는 자오쯔양 총서기와 리 펑 총리, 후치리(胡啓立) 상무위원, 야오이린 부총리, 차오스(喬石) 부총리 등 5명의 상무위원 이외에 덩샤오핑과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겸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 모두 7명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에서 자오쯔양 총서기와 후치리 상무위원은 무력진압에 반대했으나 대세는 무력진압쪽으로 결론 났다.

    결국 5월 20일 베이징 시내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온건파였던 자오쯔양은 실권을 상실하게 됐다.

    이어 주도권을 장악한 리펑 총리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6월 3일 밤 인민해방군을동원, 무차별 발포를 하면서 시위대에 대한 해산에 나섰다.

    6월 4일까지 진행된 진압작전에서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죽거나 부상했다.

    톈안먼 사태에 대한 진상규명이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사상자수를 알 수 없지만 사망자만 수백명이 넘는다는 게 관련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중국 국무원측은 수년전 비공식적으로 톈안먼 사태의 희생자수가 300명 가량 될것으로 추정한 바 있으며, 양상쿤 전 주석도 1998년 사망하기 전 사적인 자리에서 희생자수가 600명을 넘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특히 톈안먼 사태 당시 중국 관영 신화통신의 국내뉴스부 주임으로 재직했던 장완수(張萬舒)씨는 지난해 펴낸 `역사의 대폭발'(歷史的 大暴炸)이라는 책에서 희생자수를 727명으로 추정했다.

    장완수는 중국 홍십자사 고위간부의 말을 인용해 톈안먼 사태 희생자가 민간인713명과 군인 14명 등 727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장완수는 또 500페이지 분량의 이 책에서 중국 정부가 시위진압을 위해 동원한 군 병력이 10만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신의 의견을 남겨주세요

      인기 키워드

        취재플러스

              14F

                엠빅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