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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신도비 귀부는 '신라 귀부'

18세기 신도비 귀부는 '신라 귀부'
입력 2011-01-20 10:39 | 수정 2011-01-2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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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신도비 귀부는 '신라 귀부'
    "웬 조선시대 신도비에 신라시대 귀부가?"

    18세기 조선시대 경주에 선 한 신도비(神道碑) 중 몸돌인 비신(碑身)이 꽂힌 거북 모양 받침돌인 귀부(龜趺)가 늦어도 8세기 이전 신라시대 비석의 귀부로 드러났다는 이색적인 주장이 제기됐다.

    신라고고학 전공자들인 이은석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실장과 조현경 우리문화재연구원 조사원은 최근 발간된 국립문화재연구소 계간 기관지인 '문화재' 제43권제4호에 투고한 '경주 남산 이조리 귀부에 관한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들은 남산 기슭 용산서원(龍山書院) 남서쪽 50m 지점에 위치한 조선 중기의 무신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1568~1636)의 공적을 기리고자 영조 16년(1740)에 건립한 그의 신도비 귀부를 조사한 결과 결코 조선시대에 만든 작품일 수 없으며, 신도비 제작 내력을 기록한 문헌 검토와 귀부에 보이는 양식적 특징으로 볼 때 늦어도 8세기 중엽 이전의 신라시대 작품임이 확실하다고 밝혔다.

    이 신도비 건립 내력을 기록한 '문루일기'(門樓日記)라는 조선시대 문헌을 보면글자를 새긴 몸돌은 치술령에서 캐 온 반면 구판(龜板), 즉, 귀부는 남산 백운대에서 구한 것으로 나온다.

    나아가 귀부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특징이 태종무열왕릉 귀부와 경주 사천왕사터 귀부를 비롯한 신라시대 귀부와 상통하지만, 도저히 조선시대 귀부에서는 보이지않는다는 점에서 최진립 신도비 귀부는 신라시대 귀부를 그대로 가져와 재사용했음이 확실하다고 이들은 말했다.

    그 구체적인 제작 시기는 7세기 후반 작품으로 간주되는 경주 사천왕사터 신라시대 귀부와 거의 동시기이거나 8세기 중반 성덕왕릉 귀부보다는 이른 시기로 판단했다.

    귀부는 전체 크기가 너비 190㎝, 길이 200㎝, 높이 60㎝이며 거북 머리 길이는 70㎝다.
    18세기 신도비 귀부는 '신라 귀부'

    귀부가 원래 있었다는 남산 백운대에는 이 산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축대(높이5.3m)를 비롯해 신라시대 맷돌과 석조 연화대좌가 남아있으며 7~8세기 신라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최진립 신도비 귀부는 신라의 특징을 농후하게 보인다는 점에서 그간 학계에서 여러모로 주목을 받았지만, 문루일기에서 1740년에 일괄로 제작됐다는 기록이 보여 조선시대 석공이 신라시대 귀부를 모델로 삼아 만들었다는 식으로 이해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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