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식사는 하루에 반미(飯米) 3말(斗), 수꿩아홉 마리였다. 경신년 백제멸망 후로부터는 점심을 제외하고 아침, 저녁으로만 하였다. 그러나 모두 합하여 하루 미(米) 6말, 꿩 10마리나 되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제29대왕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식사량(603-661)이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춘추의 식사량은 백제 멸망 후 많이 늘어났다.
식사 횟수는 일일 3식에서 2식으로 줄었지만 쌀과 꿩의 양은 늘었으며 술(6말)도 상에 올랐다.
쌀은 하루 3말(말은 오늘날 '되'에 해당)에서 6말로, 꿩은 하루 9마리에서 10마리로 늘었다.
권주현 계명대 학술연구교수는 "식사량의 증가와 함께 다양한 요리가 술과 함께등장했다"면서 "통일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시기에 (식사가) 이미 달라지고 있다면 통일전쟁이 끝난 후 안정된 사회 기반이 구축된 상황에서는 더 말할 나위 없을것"이라고 추정했다.
권 교수는 오는 10일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에서 발표할 논문 '통일신라시대의 식문화 연구-왕궁의 식문화를 중심으로'에서 문헌자료와 고고학 자료 등을 토대로 통일신라시대 식문화를 조명했다.
삼국통일은 정치적 안정, 영역 확대 등 식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다.
권 교수는 고구려와 백제 땅에서 나는 각종 토산물이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유입되면서 음식의 가짓수와 양이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특히 "백제 고구려 유민에 의한 식문화 유입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라면서 "전쟁은 서로 간의 문화적 충격이 되기도 하거니와 상대국의 음식과 식문화를 접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 왕실의 식문화는 화려하고 다채로웠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에 소속된 요리사를 통솔한 식척전(食尺典), 조리용 숯의 공급을 담당한 두탄탄전(豆呑炭典) 등 통일신라 왕궁에서 식사와 의식을 담당했던 직책은 24개, 총인원은 104명에 달했다.
식재료도 그 종류가 다양했다.
안압지 유적과 경주박물관부지 내 우물에서는 소, 말, 돼지, 개, 노루, 산양, 사슴, 멧돼지, 꿩, 오리, 닭, 기러기, 거위, 조개류, 버섯, 토끼, 참새류, 잉어, 붕어, 연어, 복어, 숭어, 대구, 농어, 방어, 도미, 민어, 고등어, 광어, 상어, 잣, 밤, 복숭아 등은 물론 오늘날 음식으로 먹지 않는 개구리, 쥐, 두더지, 고양이, 뱀, 까마귀, 매, 개똥지빠귀 등의 유체도 발굴됐다.
신라인들은 또 깊은 바다로 들어가 전복 등을 채취해 먹었다.
신문왕이 왕비를 맞으면서 신부 집에 보낸 음식은 곡물을 비롯해 술, 기름, 꿀,장류, 포 등 무려 135수레에 달했다.
여기에는 가오리젓, 돼지젓, 가오리식해, 사슴식해 등 발효 저장 식품도 포함돼 있었다.
권 교수는 "통일전쟁과 복속 과정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식문화가 신라에 유입됐을 것"이라면서 특히 고구려 유민의 신라 영토 내 이주로 "통일 무렵에도 신라보다 더 앞서 있었을 고구려의 식문화가 신라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분석했다.
문화연예
서울=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신라 삼국통일 후 음식도 삼국통일"
"신라 삼국통일 후 음식도 삼국통일"
입력 2012-11-07 13:40 |
수정 2012-11-07 13:40
당신의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