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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극비수사' 실재 인물 공길용 형사 "당시 상황은.."
영화 '극비수사' 실재 인물 공길용 형사 "당시 상황은.."
입력
2015-06-2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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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15-06-23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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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를 살려 부모 품에 돌려보내야 했다."
유괴된 초등학생 소녀를 33일 만에 극적으로 구해낸 부산 경찰의 전설이자 '포도왕(捕盜王)' 공길용(74) 전 총경(당시 부산진경찰서 경사)은 당시 사건을 떠올리며 그때의 간절한 심경을 이같이 말했다.
개봉 4일 만에 누적관객 100만 명을 돌파한 곽경택 감독의 최신작 '극비수사'의 실재 인물인 공 전 총경을 제주시 자택에서 만났다.
퇴직 후 제주에 정착해 살고 있는 그는 과거 부산 폭력배들을 벌벌 떨게 했던 예전 '공 형사'의 강직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효주 양이 납치된 날 저녁 아이의 삼촌이 경찰서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가 갑자기 사라져 집안이 난리가 났을 텐데도 관할 경찰서에 신고도 하지 않고 나를 찾아온 거야…."
그는 38년 전의 일을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1978년 당시 유괴사건이 빈번히 일어났다.
경찰 수사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많은 어린 아이들이 목숨을 잃은 채로 가족에게 돌아갔기에 효주 양 부모는 아이에게 변이 생길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효주 양 삼촌은 믿을만한 형사를 물색하다 당시 포도왕으로 이름을 날리던 공 형사에게 연이 닿았던 것이다.
"효주 양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30분여 동안 정말 많이 고민을 했어. 사건을 맡겠다고 해야 하나 맡으면 공개수사를 해야 하나 하고…."
공 전 총경은 애타 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아이를 반드시 살려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에 극비수사를 결정했다.
영화 '극비수사'의 실제 상황은 이렇게 시작됐다.
공 전 총경은 "범죄자만 잡는 것이 다가 아니다. 범인을 잡더라도 피해가 복구되지 않는다면 그 사건을 해결된 것이라 할 수 없다"며 "아이가 죽고 나서 범인을 잡아 10년 100년 형을 살게 한들 무엇으로 가족의 한을 풀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당시 아이가 반드시 살아 있다고 믿었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33일간 끈질긴 추적 끝에 효주 양을 구하고 범인도 검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동료 경찰의 시기와 질투, 경찰 간 불협화음은 물론 수사과정에서 무속인의 도움을 받는 등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뒷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공 전 총경은 "38년간 묻어뒀던 이야기였지만 곽경택 감독이라면 국민과 경찰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요즘 너무나 많은 사건 사고가 터지는데 국민 각자가 자신의 역할만 제대로 수행한다면 큰 변을 막을 수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월호 사건 때 선장이라는 사람은 배가 뒤집어지는데도 도망이나 쳤다. 자신이 배와 함께 바닷속에 가라앉더라도 망치를 들고 유리창을 깨 배에서 나오지 못하는 아이 한 명이라도 더 밖으로 건져내야 했다"며 소신 있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효주양 유괴사건이 해결된 데는 33일간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형사들을 믿고 끝까지 기다려준 부모들, 경찰 수사과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범인이 검거될 때까지 보도를 자제하고 기다려준 언론, 자신의 역할을 해낸 경찰들 모두가 함께 이뤄낸 성과였다"며 "아이 한 명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함께 뭉친다면 대한민국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효주 양 유괴사건'은 부산에서 재력가로 알려진 정모(당시 42세)씨의 4남매 가운데 외동딸로 태어나 2번의 유괴라는, 불우한 유년시절을 겪은 소녀의 이야기다.
효주(당시 12세) 양은 1978년 9월 15일 낮 12시 20분께 재학 중이던 부산의 옛 남성국민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골목길을 내려오다가 대기 중인 검은색 승용차 운전자에 의해 유괴됐다.
범인은 1960년 12월 경무대 경호책임자로, 발포명령 혐의로 구속됐던 곽영주의 아들을 유괴하고, 1964년에는 100원짜리 위조지폐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전과 9범의 매석환(당시 42세)이었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공 전 총경은 무속인 김중산 씨의 도움을 받아 효주 양이 유괴된 지 33일 만에 사건을 해결했다.
공 전 총경은 효주 양 사건을 포함해 1971년 부산 송미장 여관 암달러상 살해범 검거, 1975년 영도 청학동 수출품 컨테이너선 도난사건, 이후 1980년 미국문화원방화사건 등을 해결하며 순경에서 경감까지 4번의 특진을 해 '포도왕'으로 불린 인물이다.
그는 지난 1998년 총경 승진을 한 뒤 제주지방경찰청 수사과장을 역임하면서 제주와 인연을 맺었다.
지난 2002년 퇴임한 뒤 답답한 도시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내와 함께 2009년부터 제주에 정착해 살고 있다.
유괴된 초등학생 소녀를 33일 만에 극적으로 구해낸 부산 경찰의 전설이자 '포도왕(捕盜王)' 공길용(74) 전 총경(당시 부산진경찰서 경사)은 당시 사건을 떠올리며 그때의 간절한 심경을 이같이 말했다.
개봉 4일 만에 누적관객 100만 명을 돌파한 곽경택 감독의 최신작 '극비수사'의 실재 인물인 공 전 총경을 제주시 자택에서 만났다.
퇴직 후 제주에 정착해 살고 있는 그는 과거 부산 폭력배들을 벌벌 떨게 했던 예전 '공 형사'의 강직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효주 양이 납치된 날 저녁 아이의 삼촌이 경찰서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가 갑자기 사라져 집안이 난리가 났을 텐데도 관할 경찰서에 신고도 하지 않고 나를 찾아온 거야…."
그는 38년 전의 일을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1978년 당시 유괴사건이 빈번히 일어났다.
경찰 수사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많은 어린 아이들이 목숨을 잃은 채로 가족에게 돌아갔기에 효주 양 부모는 아이에게 변이 생길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효주 양 삼촌은 믿을만한 형사를 물색하다 당시 포도왕으로 이름을 날리던 공 형사에게 연이 닿았던 것이다.
"효주 양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30분여 동안 정말 많이 고민을 했어. 사건을 맡겠다고 해야 하나 맡으면 공개수사를 해야 하나 하고…."
공 전 총경은 애타 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아이를 반드시 살려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에 극비수사를 결정했다.
영화 '극비수사'의 실제 상황은 이렇게 시작됐다.
공 전 총경은 "범죄자만 잡는 것이 다가 아니다. 범인을 잡더라도 피해가 복구되지 않는다면 그 사건을 해결된 것이라 할 수 없다"며 "아이가 죽고 나서 범인을 잡아 10년 100년 형을 살게 한들 무엇으로 가족의 한을 풀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당시 아이가 반드시 살아 있다고 믿었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33일간 끈질긴 추적 끝에 효주 양을 구하고 범인도 검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동료 경찰의 시기와 질투, 경찰 간 불협화음은 물론 수사과정에서 무속인의 도움을 받는 등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뒷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공 전 총경은 "38년간 묻어뒀던 이야기였지만 곽경택 감독이라면 국민과 경찰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요즘 너무나 많은 사건 사고가 터지는데 국민 각자가 자신의 역할만 제대로 수행한다면 큰 변을 막을 수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월호 사건 때 선장이라는 사람은 배가 뒤집어지는데도 도망이나 쳤다. 자신이 배와 함께 바닷속에 가라앉더라도 망치를 들고 유리창을 깨 배에서 나오지 못하는 아이 한 명이라도 더 밖으로 건져내야 했다"며 소신 있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효주양 유괴사건이 해결된 데는 33일간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형사들을 믿고 끝까지 기다려준 부모들, 경찰 수사과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범인이 검거될 때까지 보도를 자제하고 기다려준 언론, 자신의 역할을 해낸 경찰들 모두가 함께 이뤄낸 성과였다"며 "아이 한 명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함께 뭉친다면 대한민국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효주 양 유괴사건'은 부산에서 재력가로 알려진 정모(당시 42세)씨의 4남매 가운데 외동딸로 태어나 2번의 유괴라는, 불우한 유년시절을 겪은 소녀의 이야기다.
효주(당시 12세) 양은 1978년 9월 15일 낮 12시 20분께 재학 중이던 부산의 옛 남성국민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골목길을 내려오다가 대기 중인 검은색 승용차 운전자에 의해 유괴됐다.
범인은 1960년 12월 경무대 경호책임자로, 발포명령 혐의로 구속됐던 곽영주의 아들을 유괴하고, 1964년에는 100원짜리 위조지폐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전과 9범의 매석환(당시 42세)이었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공 전 총경은 무속인 김중산 씨의 도움을 받아 효주 양이 유괴된 지 33일 만에 사건을 해결했다.
공 전 총경은 효주 양 사건을 포함해 1971년 부산 송미장 여관 암달러상 살해범 검거, 1975년 영도 청학동 수출품 컨테이너선 도난사건, 이후 1980년 미국문화원방화사건 등을 해결하며 순경에서 경감까지 4번의 특진을 해 '포도왕'으로 불린 인물이다.
그는 지난 1998년 총경 승진을 한 뒤 제주지방경찰청 수사과장을 역임하면서 제주와 인연을 맺었다.
지난 2002년 퇴임한 뒤 답답한 도시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내와 함께 2009년부터 제주에 정착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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