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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가례'도 버틴 "장가간다"…지금은 왜 없을까

'주자가례'도 버틴 "장가간다"…지금은 왜 없을까
입력 2020-05-21 18:42 | 수정 2020-05-2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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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자가례'도 버틴 "장가간다"…지금은 왜 없을까
    1911년 한국을 방문한 독일의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출간했습니다.

    일제의 무단통치로 조선의 전통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한 겁니다.

    그리고 14년 뒤인 1925년 다시 조선을 방문해 함경남도 지역의 결혼식을 영상에 담았습니다.

    '한국의 결혼식'이란 제목으로 말이죠.

    장소는 '신고산 타령'이 탄생한 곳, 함경남도 안변군에 있는 내평성당이었습니다.

    이 무성기록영화에는 실제 신혼부부와 당시 결혼식에 쓰였던 혼례복과 납폐서, 잔칫상과 가마 등이 고스란히 찍혀 있습니다.

    결혼 상대를 이어주는 할멈 즉 '매파'가 남성들과 함께 맞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이색적입니다.

    결혼식 날만은 신분의 귀천도 없어 신랑 신부가 고위 관료나, 궁중의 복장을 했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신분사회에서도 이렇게 민중들이 허세를 부리고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남겨뒀습니다.
    '주자가례'도 버틴 "장가간다"…지금은 왜 없을까
    그런데 100년 전 결혼식 영상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됩니다.

    신랑이 말을 타고 신부 집으로 '장가'를 가는 전통혼례가 조선 후기도 한참 지난 1925년까지 어떻게 남아있던 걸까요.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시대는 모든 예법을 고려 후기 중국에서 들어온 관혼상제 예법인 '주자가례'에 따라 바꿨습니다.

    그리고 교조적 유교주의에 입각한 주자가례에서 혼례는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가 결혼식을 치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신랑 신부가 설 때는 신랑이 동쪽, 신부가 서쪽에 서라고 할 만큼 세세히 일러줄 정도죠.

    혹시 이 영상이 과도하게 연출되다보니 사실과 다르게 촬영된 것일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수백 년 넘게 이어온 민간의 전통은 위에서 예법을 바꾸라고 한다고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주자가례'도 버틴 "장가간다"…지금은 왜 없을까
    함경남도 안변군이 한양에서 멀어서, 왕가나 사대부의 전통이 닿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저항은 위에서부터 있었습니다.

    조선의 건국 이념이 유교 성리학에 있다고 주장한 황희 정승조차 주자가례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기 문중에서는 전통 방식에 따라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서 혼례를 올리라고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결국 신랑 집에서 혼례를 올리는 주자가례 방식의 혼례는 왕가와 일부 양반가에서만 이뤄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시대도 버틴 "장가간다"는 19세기 후반 개화기 이후 서구 문물이 유입되며 조금씩 흔들립니다.

    특히 베버 신부가 '한국의 결혼식'을 촬영한 1925년은 중매 결혼에 대한 젊은이의 반발이 커지고 전통혼례를 타파의 대상으로 여기는 등 서울을 중심으로 전통혼례가 사라지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마을에 교회와 성당이 들어서며 혼례를 치를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나타난 것도 주요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일 수 있다면 굳이 신랑 집이나 신부 집이 아니어도 상관없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 집에서 치르는 전통혼례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에도 꽤 오래 이어졌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1960년대나 70년대에 혼례를 올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지방에서는 서구식 결혼보다 신부 집에서 전통혼례를 치렀다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때는 이미 마을간 결혼을 넘어 전라도의 신랑과 경상도의 신부가 결혼을 할 정도였는데도, 신랑이 택시를 타고 '장가'를 가 초례를 마친 뒤 신부가 택시를 타고 '시집'을 갔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주자가례'도 버틴 "장가간다"…지금은 왜 없을까
    하지만 이렇게 명맥을 이어오던 "장가간다"도 결국 넘지 못한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아파트'입니다.

    장가를 가려면 신부집에 혼례를 치를 만한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복도를 공유하는 아파트에선 공간을 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겁니다.

    마당 같은 여유 공간이 사라지고 이웃과의 물리적 거리가 좁아지며 전통혼례는 마을의 잔치에서 점차 이웃을 불편하게 하는 민폐가 되어갔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나 성당에서 식을 치르는 서구식 예식이 점점 증가했고 도시에서는 '결혼식'을 전문으로 하는 예식장도 생겼습니다.

    필요에 따라 공간이 마련된 셈입니다.

    이제 신랑과 신부는 장가와 시집을 가는 대신 예식장에서 혼례를 치릅니다.

    그나마 함을 메고 신부 집을 찾는 함진아비 문화가 최근까지 명맥을 이어왔지만 역시 이웃간 소음 등을 이유로 점차 사라졌고, 지금은 서구식 예식을 치른 뒤 이어지는 폐백 만이 전통혼례의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국가가 예법으로 정했는데도 5백년 동안 쉽게 바뀌지 않았던 전통혼례가, 도시화로 인해 불과 수십년 만에 자취를 감추는 것을 보면, 전통이란 것은 어쩌면 현실이 상당히 반영되는 거울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영상제공]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도움말] 국립민속박물관 최순권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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