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아시겠지만, '천천히 걷는 빠르기로', '느리게'를 뜻하는 음악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 '안단테'가 곧 아파트의 벽면에 새겨집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 LH의 새로운 아파트 브랜드로 올 하반기 경기도 하남 위례에 처음 내걸릴 예정입니다.
'안전을 최우선 삼아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게 짓겠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하고, '안:안락하고, 단:단단하며, 테(태):큰 아파트'란 포부라고도 합니다.
이렇게만 지어진다면 최고의 아파트일 겁니다.
'안단테'는 LH의 다섯번째 아파트 브랜드입니다. 지난 2000년 그린빌을 시작으로, 뜨란채, 휴먼시아, 천년나무까지...LH는 다양한 브랜드를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변신을 했다는 건, 그만큼 이런 저런 이유로 브랜드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 만큼 이번 '안단테'에 거는 기대가 큰 것 같습니다. 이 브랜드를 위해 나름 돈도 많이 썼습니다. 연구 용역비만 4억 8천만원을 투입했습니다. 야심차게 내놓은 ‘안단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고급, 더 고급…브랜드는 분화 중
지난 주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재건축 단지 '르엘 신반포 파크애비뉴'의 청약이 진행됐습니다. 경쟁률은 무려 114대 1.
그런데 이 아파트 이름, 조금 생소합니다. 시공사는 롯데건설. ‘롯데캐슬’이 아니고 ‘르엘’?
'르엘(LE EL)'은 리미티드 에디션(Limited Edition)의 약자인 'LE'와, 시그니엘, 애비뉴엘 등 롯데가 써온 명칭에서 'EL'을 합쳐 만들었다고 합니다. 앞서 청약이 진행된 '르엘 신반포 센트럴', '르엘 대치'에서 알 수 있듯, 서울 강남 재건축, 재개발 단지에 특화한 하이엔드 브랜드입니다.
강남을 겨냥해 새롭게 만든 최고급 브랜드는 '르엘'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상당 지역을 차지한 대림산업의 '아크로', 현대건설의 '디에이치', 대우건설의 '푸르지오 써밋'은 익히 알려진 'e편한세상', '힐스테이트', '푸르지오'의 업그레이드 버전입니다. 이렇게 특화된 브랜드는 더 고급스럽고 특별함을 원하는 주민들의 욕구와 맞아 떨어졌습니다. 전통의 강호로 불리는 삼성물산의 '래미안', GS건설의 '자이'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경쟁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화건설 역시 새로운 브랜드 '포레나'를 등장시켜 큰 효과를 봤습니다. 프리미엄 아파트 브랜드 '갤러리아 포레'와 유사한 이 이름으로 바꾼 이후, '꿈에 그린' 당시 미분양이었던 경남 거제, 충남 천안 단지는 완판됐습니다.
'차별화' 욕구를 겨냥한 전략
기억하시겠지만, 과거엔 건설사 이름이 그냥 아파트 이름이었습니다. 주공, 삼성, 현대 이런 식이었죠. 여기에 숫자로 몇 단지만 덧붙이면 됐습니다.
지난 1998년 분양가 자율화 이후, 고급스럽고 다양한 아파트 건설이 가능해지면서 독자적인 브랜드들이 속속 생겨났습니다. 아파트 선택의 기준에서 브랜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커졌고, 브랜드는 곧 집값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됐습니다. 한참 전에 지어진 아파트조차 너나 할 것 없이 새 브랜드로 바꿔 달려고 했습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는 독자 브랜드에 더해 단지의 고유성을 담은 일명 펫네임으로 차별화했습니다. 그 탓에 아파트 이름은 갈수록 길어지고, 복잡해지고, 어려워졌습니다. 열 자가 훌쩍 넘을 정도로 난해해졌지만, 그 자체가 특별함을 대변해주기 때문에 주민들은 대체로 환호했습니다.
이제는 아예 새로운 고급 브랜드가 등장하면서 정점을 찍는 모습입니다. 차별화 욕구를 자극하는 건설업체의 전략에 안 그래도 복잡했던 아파트 브랜드는 더 세분화, 서열화되고 있는 겁니다.
서열화된 브랜드, 신분도 서열화?
최근 아파트 선택의 기준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브랜드 이미지'란 답변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브랜드 순위와 분양가의 순위는 거의 동일합니다.
브랜드가 경쟁력이 있다는 건 좋은 아파트란 명성을 쌓아올린 건설사의 노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브랜드' 그 자체에 많은 사람들이 구속돼 있단 점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어느 브랜드의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적 분위기. 그렇다 보니 브랜드의 분화는 신분의 분화를 추동합니다. 더 고급화된 브랜드가 생겨나면 기존의 브랜드는 상대적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기존 브랜드 주민들은 돈을 더 주고 개별적으로 1등 브랜드를 쫓으려 합니다. 집단적으로 기존 브랜드를 새 브랜드로 바꿔 달려고도 합니다. 어찌됐든 평균적인 눈높이는 더 높아집니다. 브랜드로 사람들을 줄세우고, 신분 상승의 욕망을 자극해 더 큰 이익을 꾀하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나은 브랜드에 속하고 싶은 마음은 최상위층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최근 GS건설이 자회사 자이S&D를 통해 만든 '자이르네'란 브랜드가 곧 영등포의 도시형생활주택에 첫 선을 보입니다. 도시형생활주택은 300세대 미만, 전용면적 85제곱미터 이하의 소규모 단지입니다. 중소 건설사들이 주로 담당했지만, 이제는 GS건설 뿐 아니라 다른 대형 건설사들도 브랜드 파워를 앞세워 파고들고, 그 브랜드를 선망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반면 브랜드 가치가 낮은 곳은 차갑게 외면받습니다. 아파트 이름은 주민들이 서면으로 80% 이상 동의하면 바꿀 수 있는데, LH나 SH 등은 엄연한 시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아파트 이름에서 빼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경기도시공사의 브랜드 '자연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보니 아파트의 이름만 보고는 정확한 시행사, 시공사 정보를 파악할 수 없는 경우도 생깁니다.'안단테'가 씁쓸한 이유…
몇 해 전, 초등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LH의 '휴먼시아'를 다른 용어와 조합해, 그곳에 거주하는 친구들을 놀리고 비하한다는 게 알려진 적이 있습니다. ‘엘사’(LH에 사는 사람)라고도 불렀습니다 큰 충격이었습니다. '아파트 브랜드=신분'이란 우리 사회의 안타까운 현실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단면이었기 때문입니다.
LH가 새로운 브랜드를 통해 경쟁력을 제고하려는 고민도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이렇게 층층이 서열화된 아파트 브랜드 구조를, 단순히 새로운 브랜드로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라면 성공 가능성이 낮아 보입니다.
특히 '안단테'를 공공임대아파트엔 적용하지 않고, 공공분양 아파트에만 쓰기로 한 것은 더욱 씁쓸함을 남깁니다. 나름 고급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겠다는 건데, 공공성이 핵심 가치인 LH조차 차별화, 서열화의 수단으로 브랜드를 이용한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냉혹하게 줄 세워진 현실에 억지로 편입하려는 것보다, 아파트의 품질과 기능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을 새로운 '브랜드'로 만들어갈 수는 없을까요. 당장은 어렵겠지만, ‘안단테’란 뜻처럼 천천히, 묵묵하게 자신만의 가치를 쌓아간다면 진정한 '브랜드'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이런 생각은, 아직 우리 사회가 그런 진정한 가치를 알아봐 줄 거란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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