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군의 편지…"한국이 도와달라"
지난달, 중동 지역 한국대사관에 '은밀히' 편지 한 통이 도착했습니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한국의 도움과 협력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보낸 이는 내전 중인 예멘의 반정부군.
정식 외교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예멘 후티 반군이 비선을 통해 코로나19 진단 키트의 지원을 요청해 온 것입니다.
아프리카중동 지역을 담당하는 외교관은 MBC에 "곳곳의 반군들이 우리에게 방역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며 코로나19 확산 초기와 확연하게 달라진 한국의 위상이 느껴진다고 전했습니다.
'코리아 포비아'에서 '어메이징 코리아'로
앞서 지난 2월 대구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 내 확진자 수가 급증하면서, 한국인들은 세계 각지에서 갇히고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공항에 도착한 한국인 130여 명을 그대로 비행기째 돌려보냈습니다. 베트남은 이미 이륙한 하노이행 항공기에게 다른 공항으로 가라고 일방 통보하기도 했습니다. 외교부는 일부 언론으로부터 또 한번 '외교 참사'란 비난을 들어야했습니다.
그러나 '개방성'과 '투명성' 그리고 '적극적인 검진'을 기반으로 한 한국의 방역 정책이 대외적으로 성공적인 평가받으면서 관계는 역전됐습니다.
연일 입국제한 조치를 취한 상대국에 "강함 유감"을 밝히느라 분주하던 외교부는 이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바쁩니다.
지난 달만 봐도, 에스토니아·몰디브·과테말라 외교장관, 세계식량계획 사무총장, 유엔사무부총장, 유엔난민기구 대표, 유럽연합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가 강경화 외교장관에게 통화를 부탁했습니다. 외교부 관계자는 "총리부터 장관급까지 '한국의 경험을 듣고 싶다' '지원을 받고 싶다'는 사연이 절절하다"고 했습니다.
전례없는 환대…한국 외교의 방향은?
그러나,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전례없는 환대엔 분명 시한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성공사례가 등장할 것입니다. 한국 외교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이번 코로나19 경험을 계기로, 첫째, 한국 외교가 질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가, 둘째, 방역 모범국으로서 한국이 국제 사회에 기여할 바가 있는가."
이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위해 지난 주 외교부는 신국제협력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켰습니다. 8-9월까지 서너달 동안 외교적 역량을 투입할 예정입니다.
강경화 장관은 다음과 같은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①보건 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협력을 보다 능동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한다.
②국제사회의 보편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국제협력의 틀을 모색한다.
③이를 위해 신국제협력 TF는 양자·소다자 협력과 지역·국제기구 외교를 잇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
한국이 국제 기준을 제시한다고?
관건은 ②번입니다. 한국이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겠다는 포부가 담겼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번 코로나19 확산 과정에서 국제사회는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보건규칙(IHR)은 "국제적 이동이나 교역에 대한 불필요한 제한을 금지한다"는 원칙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공포에 휩싸인 국가들은 앞다퉈 예고도 없이 입국제한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방역 실패의 책임을 외부로 돌리려는 각국 정부의 정치적 목적도 작용했습니다. 예를들어 이스라엘이 한국인 여행객들을 거칠게 몰아낼 때, 다가온 총선 때문이라는 후문이 무성했습니다. 한국의 성공 사례가 각광을 받는 건 이 때문입니다. 내부의 비판, 국내 정치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본 원칙을 지켜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인들은 지금, 한국의 말을 들어줄 준비가 돼 있다는게 외교부의 판단입니다. '신뢰' 자산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한국 외교부는 새로운 보건 협정 모델을 만들어 제시하려고 합니다. 양자간 혹은 소다자간 맺을 협정에, 감염병 위기 상황에서 입국 제한을 하려면 적어도 이러한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든지, 발령 일정 기간 전에 상대국에게 알려야 한다든지 등 입니다. 만약 성공한다면 한국 외교가 국제 사회에 기준을 제시하는, 유례 없는 일이 되는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협력을 제도화할 틀도 만들어보겠다고 합니다. 이번 코로나19 대유행 국면에선 강대국과 국제기구가 제 역할을 못하면서 위기가 커진 면이 있습니다. 이점을 한국이 나서서 개선하겠다는 겁니다.
지난 2014년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에볼라가 급속히 번질 때, 국제사회의 대응은 지금과 달랐습니다. 특히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심각한 국가 안보 사안'이라고 보고 재빨리 CDC의 전문가와 3천 명의 군 인력을 보냈습니다. 유엔도 '에볼라 대응 미션'을 꾸리고 안보리 차원에서 문제를 다뤘습니다.
이때 유엔에서 근무한 한 외교관은 "발병국가들이 '살려달라'며 유엔을 찾아왔다. 반기문 당시 사무총장과 미국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국제 사회의 대응이 빨랐다"고 기억했습니다. 반면 그때와 비교해 지금은 "유엔이 움직이도록 추동할 그룹이 없어서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다들 손을 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보건 안보 우호그룹 결성하고 운영하겠다는 것은 이 공백을 한국이 주도적으로 채워보겠다는 취지입니다.
'니 탓' 치고받는 미중, 한국이 협력 끌어낼까?
그러나, 이런 논의를 주도해야할 최강대국, 즉 G2인 미국과 중국은 여전히 협력보다는 갈등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보상을 받기 위해 1조달러의 관세를 물릴 수 있다고 위협하고, 중국은 미국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홍보 영상을 올려 공격했습니다.
이렇게 양 강대국이 갈등하는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우려하는 외교관도 있습니다. "지금은 괜히 튀다가 정 맞지 말고 내실을 다질 때"라는 것이죠. 중국이 방역 물품을 지원하는 이른바 '마스크 외교'에 시동을 걸었지만, 체제 선전에 중점을 두면서 역풍을 맞은 사례를 들어, 신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반면, 지금이야 말로 한국과 같은 나라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시선도 존재합니다. 특히 군사 위협처럼 전통적으로 국가가 중요한 안보가 아닌, 전염병, 빈곤과 같은 '인간 안보' 문제에선 한국과 같은 중견국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죠.
이수훈 한국국방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질병엔 경계가 없다. 오히려 선진국에서의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전염병으로부턴 전통적인 강대국이라고 안전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한 나라만의 대응으론 위기 종식이 어렵다는 점이 이번에 드러났다는 것이죠.
전 세계가 전염병의 위기가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 지 깨달은 이때, 한국이 기존과 다른 역할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한국 외교가 '모난 돌'이 될 지, 아니면 코로나 이후 '뉴노멀'의 기준을 제시할 지, 새로운 문 앞에 선 한국 외교가 주목됩니다.
정치
나세웅
[외통방통] 반군도 한국에 코로나 SOS…한국 외교 새 지평 열까
[외통방통] 반군도 한국에 코로나 SOS…한국 외교 새 지평 열까
입력
2020-05-04 11:05
|
수정 2020-05-04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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