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시절 외교부 고위 관료들이 연일 언론에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관여했던 익명의 전직 외교관들인데요.
"2015년 협상 과정에 밝은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그해 12월 28일 한·일 외교장관이 협상을 타결하기 전 한국 측 협상팀 소속의 외교부 당국자가 직접 윤 당선인(당시 정대협 대표)을 만나 합의 내용을 사전에 설명했다고 전했다." - [중앙일보 2020-05-08 "2015년 일본서 약속한 10억엔, 윤미향은 사전에 알았다"]
"외교부 담당 국장이 (언론 발표 전) 윤미향 당선자(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에게 (일본 정부 출연금) 10억 엔 등 합의 뼈대를 설명했고, 당시 윤 당선자가 '(결과가) 괜찮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 [동아일보 2020-05-12 前 외교부 간부 "윤미향, 위안부 합의 사전설명 듣고 '괜찮다' 반응"… 윤미향 "들은적 없다"]
이런 기사들의 주 내용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대표였던 윤 당선인이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 내용을 외교부를 통해 사전에 충분히 전달 받았고, 심지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윤 당선인이 합의 발표 이후 뒤늦게 '반대'로 입장을 바꿔 한마디로 뒤통수를 맞았다는 주장입니다.
외교부 작성 '위안부' 단체 접촉 일지 살펴보니…
MBC가 외교부가 작성한 피해자 관련 단체 접촉 일지를 단독 입수해 이 주장을 검토해봤습니다.
이 문건에는 2015년 한해 모두 15차례 접촉한 '위안부' 단체와 일시, 주요 논의 내용이 정리돼 있습니다.
정대협의 경우 쉼터 방문을 포함해 합의 발표일까지 두 차례, '위안부' 할머니 여섯 분이 생활하는 '나눔의 집'은 네 차례 통화 또는 면담을 한 것으로 나옵니다.
외교부는 그때마다 피해자들과 의견을 교환하거나 의견을 청취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부풀려진 외교부 '의견 수렴' 일지
먼저 일지 가장 먼저 등장하는 2월 6일 나눔의집 방문.
외교부는 "거주 피해자들과 의견을 교환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나눔의집에 확인해봤습니다.
나눔의집 측은 "이 날 외교부 차관이 설 명절을 앞두고 찾아왔고 일본과의 협상에 대해 설명한 적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10월 5일, 국감 계기 외통위 의원과 제 1차관 나눔의집 동행-피해자측 요망사항 청취'라고 기록된 면담 내용도 물었습니다.
이 역시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은 "여야 국회의원들이 방문하니까 외교부 직원 4명이 동행했다"며 "(의원들) 의전이나 신경썼지 일본과의 협상을 얘기한 적 없다"고 말했습니다.
일본과의 협상이 막바지에 다다른 12월 23일, '단체 측의 의견을 청취'했다고 적혀 있는 세번째 만남은 달랐을까.
나눔의집 측은 "이날 역사관 준공식을 했다. 외교부 직원들은 인삿말 없이 행사 참관만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나눔의집이 협상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건 합의 발표 당일이었습니다.
네 번째 접촉으로 기록된 12월 28일, 외교부 동북아국 이상덕 국장이 전화를 해 "합의가 있을 것이고 할머니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합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다는 게 안 소장의 말입니다. 정대협 접촉 2차례…이때는 달랐을까?
문건대로라면 외교부는 한일합의와 관련해 정대협과는 2015년 2월 11일에 처음 만났습니다.
외교부는 이날 정대협 쉼터에서 '거주 피해자 및 단체와 의견을 교환했다'며 "피해자들로부터 올해가 가기 전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촉구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날 정대협 측도 방문 기록을 남겼습니다.
"김복동 할머니께서는 강제로 끌고 가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분노를 토로하며 일본의 망언을 질책했다. 할머니들께서는 올해 광복 70주년, 한일수교 50주년을 맞이한 만큼, 외교부가 새로운 각오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노력해달라고 요청했다."
비교해보면 외교부는 위안부 피해자의 '강제 연행' 인정 문제처럼 일본과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목소리는 삭제하고, 협상 명분이 될 수 있는 '올해 안 해결'만 기록으로 남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번째 접촉은 10월에 있었습니다.
외교부는 정대협이 "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요구하는 요구서를 전달"했고, "위안부 문제 해결 없는 한일 정삼회담 개최를 반대하며 피해 당사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다고 적었습니다.
정대협측도 이날 "한일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요구서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정부에) 전달했다"고 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 40여명이 연명한 이 요구서에는 당시 아베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가적·법적 책임을 인정하라'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특히 이용수 할머니는 "아베는 공식 사죄하고 법적 배상 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회담하러 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결과적으론 외교부가 요구서를 받아 놓곤 합의 과정엔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겁니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나?
일지에 남긴 공식 접촉이 아니어도 외교부가 윤미향 당선인에게 협상 내용을 사전에 전달해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 전직 외교부 최고위 당국자는 시점을 특정하지 않고 "일본 정부 책임 인정, 사죄 반성, 치유금으로 일본 국고 10억엔 거출을 담당 국장이 설명했고 (윤 당선인이) 괜찮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언론에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윤 당선인은 12일 MBC에 출연해 외교부로부터 합의 내용을 전해 들은 것은 발표 전날인 27일 밤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갑자기 한일 국장급 회의가 열린다는 보도를 보고 연락을 시도했는데 밤이 돼서야 담당 국장이 "일본 정부 책임 인정한다, 사죄한다, 국고에서 거출한다"는 내용을 알려줬다는 것입니다.
다만 10억엔이란 액수는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액수만 빼면 전직 당국자와 같은 얘기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2015년 위안부 합의가 국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사고, 재검토에 들어가게 된 세 가지 진짜 핵심 사항때문이었습니다.
윤 당선자는 '국제사회 문제제기 자제한다, 소녀상 철거, 불가역적 해결'에 대해선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15차례의 접촉…정말 '피해자 의견수렴과 동의 위한 과정'이었을까?
15차례의 접촉 단체 중 하나인 '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대구 시민모임'의 안이정선 전 대표는 합의 발표 당일, "일본이 지금까지의 태도보다 많이 전향적으로 해결할 의사가 있고 사과의 뜻을 밝혔다"고 짧게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미 자기들 다 진행시켜 놓고. 다 의견을 물었다 이런 식으로 진짜 구색갖추기 하는구나. 발표 보면서 욕 많이 했죠."
외교부의 '피해자 단체 15차례 접촉'에 대해 외교부 검증 TF 보고서 결론은 이렇습니다.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확인, 국제사회 비난·비판 자제 등 한국 쪽이 취해야 할 조치가 있다는 것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다. 돈의 액수에 관해서도 피해자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이해와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하였다."(27p)
2015년 한일합의는 박근혜 청와대와 전직 외교부 최고위 당국자의 판단과 전략에 따른 결과물이며 책임도 그들에 있다는게 명백합니다.
이제와서 "윤미향도 알고 있었다"는 증언으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그렇다면 그 책임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지 연일 언론에 등장하는 익명의 전직 관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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