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칠하다 끝났다"…이회창의 고백
지난 2002년 대선이 끝난 뒤, 당시 낙선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분칠하다 끝난거 같아요."
당시 이회창 후보의 수행역을 맡아 전국을 함께 누볐던 정병국 전 미래통합당 의원은 최근 통합당 초선의원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 "그 때 이회창 후보의 수행팀에 저, 오세훈, 나경원 등등 젊은 의원들이 있었어요. 유세장 가면 지지자들 모여있는데 우리는 이회창 후보랑 함께 무대에 올라가서 후보를 둘러싸는거죠. 함께 율동도 하고, 웃으면서 사진도 찍고, 그게 우리의 역할이었어요. 이회창 후보를 젊어 보이게 하려고 우리를 쭉 옆에 세운 거죠. 선거 끝나고 나니까 그걸 이 후보가 분칠(화장)이라고 표현한 거에요."
비록 낙선했어도 당시 한나라당의 청년들은 혼신을 다해 이 후보를 도왔는데, 청년들에게 돌아온 말은 "분칠"이라는 황당한 일갈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정 전 의원은 상당히 놀랐다고 했는데요.
20년 전에도 지금처럼 청년 정치를 하겠다며 한나라당이 영입한 정치 초년생들은 결국 대선 후보를 위해 분칠하는 도구에 불과했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 2020년 통합당 청년위원의 "XX스캔들" 발언
- "이제 진실을 밝힐 때입니다. 그 첫번째는 박원순 성추행 서울시 XX스캔들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회의실이 술렁였습니다. "여당이 '피해호소인'이라는 표현을 썼다"며 성인지감수성 부족을 질타하던 통합당 지도부 회의에서 권력형 성추행 의혹을 'XX스캔들'로 규정했으니 말입니다.
- "아까 말씀드린 XX스캔들은 성범죄로 제가 규정하고 싶습니다. 피해 여성이 관계를 했다는 증언은 없지만, 여전히 서울시 내에서 자행되고 있는 여러 성추문들이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쪽지를 황급히 전달받고 앞선 스캔들 발언을 수습한건데,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다시 회의실이 술렁였습니다. '피해여성이 관계(?)를 했다는 증언이 없기 때문에 XX스캔들은 아니'라는 취지의 해명이 오히려 화를 부른 겁니다.
발언의 주인공은 1988년생, 올해 만 32살의 통합당 정원석 청년 비대위원입니다. 정 위원은 그동안에도 공식 회의석상에서 화려한 입담과 각종 비유법으로 현 정부를 거침없이 비난해 주목을 끈 인물인데요.
결국 스캔들 발언 다음 날, 정 위원은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으로부터 '활동정지 2개월'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청년 위원으로서 그나마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던 정 위원에 대한 징계에 당 안팎에선 "꼬리표처럼 따라다닐텐데...", "2개월 뒤에도 과연 돌아올 수 있겠냐" 등의 탄식이 터져나왔습니다.
보수정당인 통합당 비대위 안에 청년 비대위원 3명이 포함돼 있긴 하지만, 사실상 김종인 위원장 1인 체제로 당이 굴러가는게 현실입니다. 하물며 김 위원장은 '사고(?) 치는 걸 싫어하는 성향'이니 이런 걱정이 나올 만하죠.
아이러니하게도 정 위원은 김 위원장이 직접 영입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같은 신속한 징계가 다소 의외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는데요.
- "자네는 언론 노출을 안해서 참 좋아."
김 위원장이 정 위원을 영입하며 했다는 이 말은 현 상황의 안타까운 역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스 기질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김 위원장은 소위 튀지 않고, 잘 안나서고, 그래서 언론에도 자주 노출되지 않는 청년 정치인을 원했으니 말이죠. 김 위원장은 2020년에 일 잘하고 조신한 청년을 원했던 걸까요?■ 자객공천과 장부의 굴욕
- "젊은 사람들은 정치 경험이 일천하니까 당선이 용이한 지역에 공천하든지 자객공천을 했어야죠. 그럼 상대가 거물일 경우에는 설령 당선안되더라도 이 사람의 네임밸류가 올라가요. 그렇게 젊은 정치인들을 띄워줬어야 했는데, 이번 총선에서 통합당은 그게 안됐어요."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신율 교수가 최근 통합당의 총선 참패 원인을 분석하면서 한 말입니다. 당이 청년의 목소리를 듣겠다더니, 청년들을 험지에 공천해서 별 의미없이 다 떨어뜨렸다는 분석입니다. 이래놓고 청년정당이 되겠냐는 지적과 함께요.
그런데 이는 청년이 '자객'으로만 소모되는 부작용을 간과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지난 2012년 19대 총선 당시 부산 사상구에 문재인 민주당 후보가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문 후보는 대선 출마를 앞둔 야당의 거물이었죠. 당시 새누리당은 현역인 장제원 의원이 아닌, 27살의 정치신인 손수조 후보를 이른바 자객공천합니다.
'박근혜 키즈'라는 별명과 함께 손 후보는 일약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는데요. 하지만 높은 관심과 달리 선거는 문재인 후보의 무난한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후 새누리당은 4년 뒤인 2016년, 20대 총선에서 또 다시 장제원 후보를 배제하고 31살의 청년 정치인 손수조 후보를 재공천하는데요. 이에 반발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장 후보에게 손 후보는 또 패배합니다.
'박근혜 키즈' 꼬리표가 붙어있는 손 후보는 결국 기성 정치인의 벽을 넘지 못하고, 같은 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함께 쓸쓸히 정계를 떠났고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전국구 스타로 올라선 인물은 손 후보가 아니라 장제원 의원이었습니다.
장 의원은 훗날 이 과정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 "제가 손수조 공천을 2번이나 경험하면서 겪은 수모와 굴욕은 다 말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저는 다 감수하고 참았어요. 언젠가 내가 다시 일어설 때를 기다리겠다고요. 장부의 굴욕이라는 말이 있어요. 장부의 굴욕. 그 굴욕이 저를 키운 겁니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그런 공천이 감사하죠."
청년 자객공천이 오히려 기성 정치인에겐 승리의 무용담이 되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학도병 공천'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요. 선거철에만 반짝 소비되는 현행 청년정치는 모두에게 상처가 될 뿐입니다.
■ 청년 보좌진과 청년 영입인사
통합당은 '막말 프레임'에 갇히지 않기 위해, 정원석 청년 비대위원을 신속하게 방출했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인 지난 20일 '청년조직특위'라는걸 구성했고, 위원장에는 또 다른 청년 비대위원인 김재섭 위원장을 임명했습니다.김재섭 위원장은 MBC와의 통화에서 "청년중앙위원회와 대학생위원회 등으로 분리된 당내 청년 조직을 재정비하고, 청년정당으로 가는 토대를 마련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10명의 위원들 중 3명을 기존 활동중인 현역 보좌진들로 채우겠다고 말했는데요. 이는 매우 흥미로운 결정입니다.
당에서 10년 이상 혹은 10년 가까이 일했던 보좌진들의 눈에 그동안 외부에서 영입된 청년 인사들은 달갑지 않았던게 사실입니다. 최근 두세차례 총선을 치르면서 통합당 보좌진들 사이에서는 청년 공천을 두고 이런 말이 돌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 "내가 해도 ㅇㅇㅇ보다 잘 할 수 있다."
- "누가 되더라도 ㅇㅇㅇ보다는 낫다."
청년 몫으로 영입된 인사들이 비례대표로 배지를 달거나, 이른바 자객공천으로 주목받는 정치인이 돼도, 청년 정치의 눈높이로는 낙제점이었다는 평가입니다.
- "청년 몫으로 당선되면 뭐해요. 당선되면 끝. 다들 자기 살 길 찾아서 줄서고 우리한테 눈 길 한번 안주죠. 기성 정치인들처럼 변해가는 걸 여러번 봤어요. 그저 자기 정치 하는거에요."
청년조직특위 위원으로 임명된 또 다른 인사는 "보좌진들이 하는 말만 들어도 당은 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가장 큰 청년 그룹인 보좌진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고, 그들과 소통하겠다는 겁니다.
소위 '꼰대정당'이라고 비난받아온 통합당의 내부 청년과 외부 청년간의 화학적 결합. 그리고 청년정당을 향한 변화의 시도는 순항할 수 있을까요? 선장은 외부에서 영입된 청년 정치인입니다.
■ "신데렐라는 이제 없다."
- "소액의 활동비 외엔 당에서 급여처럼 받는 돈은 없습니다.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혹시 당에서 급여를 지급받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청년 비대위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식사비 정도만 지원받고, 청년 비대위원들은 자체적인 열정을 바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정 위원에 대한 통합당의 즉각적인 징계가 서운하다는 청년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자기 돈 써가며 당을 위해 일했는데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꼬리자르기를 당하는 청년의 현실을 자칭(?) 청년정당에서 느껴야하니 말입니다.
사실 통합당 청년 비대위원들은 모두 원외인사들입니다. 그렇다보니 국회에 오면 머물 곳도 마땅치 않고, 최근에야 당에서 공유 오피스 개념의 작은 사무공간을 마련해줬지만 그 전에는 사무공간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청년이라고 해서 받는 혜택은 비대위원들이 내야 할 80만원 상당의 특별당비를 면제해주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 "일단 생활이 돼야 정치를 하죠. 알바비 정도도 보전되지 않고, 식대받는 수준으로 무슨 청년정치를 하나요?"
통합당 청년 정치인들은 국회 안에 있든, 국회 밖에 있든 생활 정치를 구현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이건 여야가 같은 상황일 거라고 합니다. 그래야 정치판을 떠나지 않고 10년, 20년 학습하고 훈련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는 얘기죠.
주호영 원내대표도 최근 만 34살의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 "그 사람들은 나이가 30~40대로 젊을 뿐이지, 고등학생 때부터 당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20년 넘게 훈련된 사람들이에요. 내가 이제 정치 경력이 17년째인데 나보다 정치를 더 오래 한 사람들이에요. 정치도 전문영역이라 아무리 각 분야에서 일인자라고 해도 훈련되지 않으면 갑자기 정치판 들어와서는 잘 못하는데 한 20년 정도 훈련되면 30~40대라고 해도 정치하는데 문제없죠."
주 원내대표의 이 말을 전해들은 통합당 청년 보좌진들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오랫동안 당에 헌신한 청년들이 외면받거나 버림받는 구도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청년 조직을 또 만든다고 해도 의미가 없을 겁니다. 그런 청년들이 대우를 받는 제도적 개선이 있어야죠. 당에서 20년 정치할 수 있는 환경이 우선 마련돼야 하는것 아닌가요?"
백발 후보의 분칠용으로 소모되든, 액세서리로 쓰이든, 말 실수를 하든.. 청년이 통합당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4년 뒤 총선 출마를 일찌감치 준비중인 통합당의 한 청년 정치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기자님, 신데렐라는 이제 밖에 없어요. 그런데 또 신데렐라를 찾으러 다니면 도돌이표 되는거죠 뭐.. "
과연 '분칠' 수준을 넘어 '청년정당'으로 변신은 가능할까요? 청년정당이 되기 위한 미래통합당의 좌충우돌, 시행착오는 20년째 현재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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