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를 놀라게 한 김종인의 무릎 사과
섭씨 34도. 뜨겁게 달궈진 광주 5.18 추모탑 바로 앞 돌바닥 위에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80대 정치인의 갑작스러운 무릎 사과에 현장에 있던 기자들도 놀랐고, 5.18 관계자들도 놀랐다고 합니다.
무릎을 꿇은 김 위원장은 약 20초 동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다 일어났는데, 김 위원장을 수행한 송언석 비서실장과 김선동 사무총장, 김은혜 대변인 등도 뒤에서 함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빌리브란트 오마주?
바닥에 무릎을 꿇었지만, 허리는 꼿꼿이 세우고 눈을 감은 모습.
1970년대 폴란드를 찾은 서독 수상 빌리브란트의 오마주라는 평이 이어졌습니다.
'오마주'는 '존경'이나 '경의'를 뜻하는 프랑스어인데, 보통 영상이나 영화에서 다른 감독이나 작가가 만든 영화의 대사나 장면을 인용해 존경이나 경의를 표할 때 사용됩니다.
김 위원장의 모습에서 당시 빌리브란트 수상이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추모지을 찾아 젖어있는 추모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과했던 모습을 떠올린 겁니다.
김 위원장도 이런 반응을 기대했던 걸까요?
광주 일정을 수행한 통합당 관계자는 MBC와의 통화에서 "광주로 이동하던 도중 김 위원장이 수행원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하겠다고 했고, 수행한 의원들 모두 동의해 함께 무릎을 꿇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김 위원장이 미리 무릎사과를 구상했고, 먼저 이를 제안했다는 설명입니다.
실제로 김 위원장은 사과문에도 빌리브란트의 말을 인용하는 등, 이 날 사과가 빌리브란트로부터 영감을 받았음을 시사했습니다.
"벌써 1백번이라도 사과하고 반성했어야 마땅한데 이제야 첫걸음을 뗐습니다. 작은 걸음이라도 나아가는게 한걸음도 나아가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빌리브란트의 충고를 기억합니다." (김종인 위원장 사과문 中)
통합당의 한 초선 의원 역시 MBC와의 통화에서 "빌리브란트가 무릎꿇고 사과했던 1970년은 김 위원장의 독일유학 시절"이라며, "김 위원장이 당연히 빌리브란트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유대인 추모지 앞에 무릎 꿇은 빌리브란트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추모지를 당시 서독 수상이던 빌리브란트가 방문했습니다.
그리고는 당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
헌화를 하던 도중 무릎을 꿇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사죄하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서독 수상의 용기있는 과거사 반성은 당시에도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고 두고두고 귀감이 되고 있지만, 당시 서독 내 여론은 빌리브란트의 무릎사과에 반대하는 의견이 더 많았다고 하는데요.
반대 여론을 뚫고 사과를 감행한 빌리브란트는 훗날 무릎 사과에 대해 "헌화를 할 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말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이 행하는 바로 그것을 했다"며 미리 계획한 행위는 아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국경을 넘어 사과한 건 아니지만, 영남에 정치적 기반을 둔 보수정당 대표가 광주 5.18 묘역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한 건 매우 이례적이고 보기드문 장면입니다.
통합당은 보수정당 대표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는데요.
하지만 여당에선 곧바로 "빌리브란트 흉내내기", "전광훈발 코로나 국면 전환용"이라며 혹평을 쏟아냈고요.
야당에선 "늦었지만 다행이다", "진정으로 국민통합을 향해 나가겠다" 등의 엇갈린 평가를 내놨습니다.
"김 위원장이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을 연출했다. 그가 독일에서 공부했으니 빌리브란트 수상의 무릎 사과를 어깨너머로 보았을 것이다. 역사를 훔치지 말라."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의원 페이스북 中)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이다. 더이상 우리당이 5.18 정신을 말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정당이 됐으면 좋겠다."(미래통합당 장제원 의원 페이스북 中)■ 5.18 단체들 "통합당 5.18 특별법 약속해야"
통합당은 최근 호남 민심에 다가가려는 행보 중 하나로 5.18 유공자 연금지급 법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5.18 유공자라고 밝힌 일부 광주 시민들은 지난 19일 5.18 민주묘역을 찾아 김 위원장의 방문을 환영한다고 밝혔습니다.
"5.18은 연금이 없어. 1년에 12~13명씩 자살해. 5.18 인정해주는 뜻에 감사하고 연금 추진해달라고 건의하기 위해 왔어." (박판석 5.18민주유공자연금법제정추진위원회 상임공동위원장)
"우리 삶에 가장 시급한 게 연금법이라는 거 알고 추진하는데 누가 환영 안하겠나. 죽을 때까지 해결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눈물)" (박영순 5.18연금법제정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5.18 유공자 연금법뿐이 아닙니다.
최근 김 위원장은 통합당 정강정책에 5.18 정신 계승을 명시하고, 소속 의원들에게 호남 명예지역구를 배정하는 등의 적극적인 호남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요.
국민통합특위를 발족하는가 하면, 호남 출신들에게 비례대표를 할당하는 방안까지 검토 중입니다.
하지만 통합당 내에선 김 위원장의 이같은 행보에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는 게 현실입니다.
영남권의 한 재선 의원은 MBC와의 통화에서 "큰 틀에선 동의하는 바이지만, 낙후 지역은 호남에만 있는 게 아니고 호남만 험지가 아니"라며 "역차별 우려도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는데요.
김 위원장은 이 같은 반발 여론에 대해 "당 내부도 모두 우리가 추진하는 일에 대해 공감하고 따라올 것"이라고 자신했습니다.
5.18 유족회와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 등 3개 단체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김 위원장은 역사왜곡처벌법과 5.18 공법단체설립법, 5.18 유공자 예우법 등 민주당이 당론으로 정한 5.18 3법 통과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다만 "진정성을 알 수 있도록 각서를 써달라"는 5.18 단체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진 않았다고 합니다.
5.18 단체 관계자는 "과거보다는 진전된 논의였다"면서도 "김 위원장의 약속이 지켜질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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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
[국회M부스] 김종인의 빌리브란트 오마주…"진정성 입증이 과제"
[국회M부스] 김종인의 빌리브란트 오마주…"진정성 입증이 과제"
입력 2020-08-20 10:52 |
수정 2020-08-2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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