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영화 '미나리'가 미국 양대 영화상 중 하나인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부문 후보에 올랐습니다.
이 영화는 제목도 한국어, 주연도 한국 배우, 감독도 리 아이삭 정 (한국이름 정이삭), 재미교포입니다.
골든 글로브를 주관하는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 규정상 대화의 50% 이상이 영어가 아닌 경우 외국어 영화로 분류합니다.
얼핏 보면 외국어 영화상 후보가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소셜 미디어에서는 <미나리>를 외국어 영화로 분류한 데 대한 논란이 뜨겁습니다.
지난해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던 영화 <페어웰> 역시 뉴욕에 사는 중국인 가정의 이야기를 다뤄 큰 관심을 받았지만 대사 대부분이 중국어라는 이유로 외국어 영화로 분류됐었습니다.이 영화의 감독 룰루 왕(중국계 미국인)은 <미나리>와 관련해 이런 트윗을 올렸습니다.
"올해 <미나리>보다 더 미국적인 영화는 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쫓는 이민 가정의 이야기다. 영어로 말하는 것이 미국적이라고 특징짓는 이런 구시대적 잣대는 바뀌어야 한다."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에 출연 중인 아시아계 배우 시무 류도 <미나리>가 외국어 영화로 분류됐다는 기사와 함께 "미나리는 미국에서 촬영하고 미국인이 출연하고 미국인이 연출하고 미국 회사가 제작한 영화"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한국계 배우 대니얼 대 킴은 "미국이 고국인데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하는 셈"이라고 비판했습니다.<'미나리' 어떤 영화길래>
브래드 피트의 제작사 A24가 제작한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 정 감독이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연출한 영화입니다.
한국계 미국인 스티븐 연이 총괄 프로듀서이자 주연으로, 윤여정, 한예리 씨도 역시 주연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줄거리는 1980년대, 일곱 살 난 한국계 미국인 소년 데이빗의 가족이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아칸소 시골 지역으로 돌아가 농장을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윤여정 씨가 맡은 할머니는 데이빗 가족과 살기 위해 한국에서 왔는데요.
손자 데이빗에게 "할머니는 쿠키도 못 굽고 미국 할머니와 다르다"며 대놓고 타박을 듣기도 합니다.
예고편으로만 봐도 우리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집에서 가족들은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요.
그렇다고 이 영화를 미국 영화라고 할 수 없는 걸까요?
<미나리는 '미국적'이라는 말에 질문을 던졌다>
이와 관련해 워싱턴 포스트에 눈길을 끄는 칼럼이 실렸습니다.
베트남계 미국인 유명 작가이자 퓰리처상 수상자인 비엣 타인 응우옌이 '미나리는 한국어를 쓰는 이민자에 대한 영화다. 그렇다고 미나리를 외국 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는데요.
응우옌은 "미나리 감독인 리 아이작 정은 미국인이고, 미국인 배우를 캐스팅했으며 미국에서 제작됐다... 대사 대부분은 한국어이지만, 이를 외국어 영화로 분류한 결정은 외국적으로 만드는 게 도대체 무엇이냐는 문제를 강력히 제기했다"고 이번 논란을 분석했습니다.
또 자신의 부모는 1975년 미국으로 이민와 집에서 베트남어를 쓰고 친구 모두가 베트남인이지만 미국에서 집을 사고 세금을 낼 만큼 영어를 충분히 알고 자신을 미국인이라고 여긴다면서 "45년이 지난 뒤 영어가 여전히 완벽하지 않지만 이들이 외국인이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면서 "언어가 '외국적'의 기준이 된다는 주장은 미국에서 백인에겐 사실일 수 있지만 아시아계는 영어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외국인으로 인식되는 듯하다"고 꼬집었습니다.<봉준호 "1인치 장벽은 무너졌다">
올 초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 영화상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차지했습니다.
당시 그는 시상대에 올라 이렇게 소감을 밝혔죠.
"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를 쓴다고 생각합니다. 그 언어는 영화입니다."
그는 줄곧 '자막'이란 1인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고 했고,
얼마 뒤 한국 영화 최초로 <기생충>이 아카데미를 석권한 뒤에는 1인치 장벽이 무너졌다고 선언했습니다.
"1인치 장벽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때늦은 소감이 아니었나 싶어요. 이미 장벽은 무너지고 있는 상태였고, 유튜브 스트리밍이나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이미 모두가 연결돼 있어요. 이제는 외국어 영화가 이런 상을 받는 게 사건으로 취급되지 않을 것 같아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올 것 같습니다."
<'미나리'가 아카데미 수상을 한다면...>
골든 글로브에서 외국어 영화상 출품작의 경우 작품상의 후보가 될 수 없습니다.
지난해 영화 <기생충>과 <페어웰>이 전세계의 각종 영화상을 휩쓸고 흥행에도 성공했지만 골든 글로브에선 각각 외국어 영화상과 여우주연상 수상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화인들이 '미나리'의 외국어 영화 분류에 분노하고 아쉬워하는 배경에는 결국 최우수 작품상에선 배제된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한국 언론들의 제목에서도 그런 심정이 읽힙니다.
-'미나리' 외국어영화로 분류…美골든글로브에 비판 쏟아져
-'미나리' 골든글로브 작품상 후보 탈락…인종차별 논란
-"'미나리'는 미국영화… 외국어영화상 분류는 인종차별"
-"'미나리' 美 영화 아냐"…골든글로브, '기생충' 쾌거에도 벽세우기
그런데 또 한편으론 <미나리>를 한국영화로 분류하고픈 욕망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 '미나리'에서 오스카 향기가 난다…'기생충'처럼 수상 행진
-'제2의 기생충' 견제? '미나리' 골든글로브 작품상 배제 논란
-오스카 바라보는 '미나리'…세계가 주목하는 K콘텐츠
- "아메리칸 드림 청신호"…오스카 희망 '미나리' 중간점검
이런 기사들을 보고 있노라니 골든글로브처럼 한국 영화 기자들이 올해의 영화를 선정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궁금해집니다.
만약 한국에 온 이민자 가정 출신의 감독이 고국의 언어로, 고국 배우를 출연시켜 코리안 드림을 둘러싼 현실을 영화로 만들었다면 그 영화는 다른 한국 영화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박수까지 받을 수 있을까요?
만약 '미나리'가 아카데미에서 수상을 한다면 한국 언론은 <기생충>에 이은 한국 영화의 쾌거라며 흥분하지 않을까요?
<미나리>를 둘러싼 미국 내 논란들은 봉준호 감독이 말한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날'에 다가가는 과정일 겁니다.
그 논란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도 그런 자연스러움이 묻어나길 기대해봅니다.
세계
문소현
[World Now] 영화 '미나리'는 한국 영화일까, 미국 영화일까
[World Now] 영화 '미나리'는 한국 영화일까, 미국 영화일까
입력 2020-12-26 09:10 |
수정 2021-01-0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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