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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이미지 김주만

[World Now] 이중스파이 '조지 블레이크'의 Time to Die

[World Now] 이중스파이 '조지 블레이크'의 Time to Die
입력 2020-12-28 19:11 | 수정 2020-12-28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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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rld Now] 이중스파이 '조지 블레이크'의 Time to Die

    조지 블레이크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전설의 이중 스파이 '조지 블레이크' 사망>

    현지시간 12월 25일 영국과 소련을 오가던 전설적인 이중갑첩 '조지 블레이크'가 러시아에서 숨졌습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그는 처음엔 유대인 아버지의 성을 받아 '조지 비하르'로 불렸고, 이후 영국 정보기관인 MI6에서는 조지 블레이크, 말년을 보낸 소련(러시아)에서는 '그레고리 이바노비치'라는 러시아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2차대전 당시 독일에 맞서 지하활동을 했던 그는 1944년 영국군의 첩보부대를 거쳐, 외무성에서 근무했습니다.

    첫 부임지인 베를린에서 대소련 첩보 활동을 하던 그는 스파이로서의 천부적인 자질을 드러내게 됩니다.
    [World Now] 이중스파이 '조지 블레이크'의 Time to Die

    조지 블레이크 [위키미디아 제공]

    <서울에 온 007…북한군 포로에서 전향>

    그가 첩보영화의 전형적인 소재인 '이중 스파이'로 변신한 계기는 1950년 한국전쟁이었습니다.

    1948년 정보원 신분으로 주한영국대사관의 부영사로 임명돼 본격적인 스파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의 삶은 큰 소용돌이에 휩싸입니다.

    이승만과 김일성이 각각 미국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정부 수립을 추진하던 1948년 서울은 동서 진영이 벌이는 첩보의 전장이었습니다.

    (한국과 미군 장교들로부터 군사 정보를 빼내던 한국의 마타하리 '김수임'이 활동한 시기도 이때였습니다.)

    이른바 공산세력('레드라인')을 막으려는 미국과 세력 확장을 벌이던 소련 사이에서 치열한 첩보전이 서울에서 벌어진 겁니다.

    이렇게 MI6 정보요원 '조지 블레이크'는 냉전의 한복판에 서게 됩니다.
    [World Now] 이중스파이 '조지 블레이크'의 Time to Die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부끄러움이 날 전향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냥 유능한' 스파이로 남을 수 있었던 조지 블레이크의 삶은 그가 북한군의 포로가 되면서 바뀝니다.

    1.4 후퇴 과정에서 미처 서울을 빠져나오지 못한 블레이크는 북한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북한군은 연합군 포로들과 함께 블레이크를 평양을 거쳐 압록강 또는 국경을 넘어 중국 만주까지 끌고갔고, 이 과정에서 일부 미군은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포섭돼 소련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3년 간의 포로 생활을 하면서 그도 전향을 하게 됩니다.

    그가 왜 공산주의를 선택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는 2011년 영국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의 참화를 내적 심경 변화의 이유로 꼽았습니다.

    "거대한 미군 폭격기가 아녀자와 노인만 남은 민가를 인정사정 없이 폭격했다. 무방비의 민간인을 겨냥한 강하고 기술적으로 우월한 그런 국가들에 내가 소속돼 있다는 게 부끄러웠다."

    민간인의 죽음과 미군의 폭격을 목도하고 이들과 한편에 서서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이 잘못됐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겁니다.
    [World Now] 이중스파이 '조지 블레이크'의 Time to Die

    조지 블레이크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중 스파이 활동…서방 정보 KGB로>

    1953년 휴전이 되면서 그는 영국에 돌아왔습니다.

    군첩보부대, 외무성 주한대사관,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을 눈여겨본 MI6는 그를 발탁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로 전향한 그의 내면을 읽지는 못했습니다.

    동독 내의 첩보조직을 지휘하게 된 그는 9년 동안 신분을 감추고 '이중 스파이'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동독과 소련에서 활동하는 수백명의 서방 스파이 명단을 소련측에 넘겼습니다.

    공산권에 그가 넘긴 최고 성과는 동독의 통신 지하터널에서 서방 정보기관이 시행했던 군사용 도청, 이른바 '황금작전(Operation Gold)'의 정보를 빼돌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국 MI6와 미국 CIA는 동독과 소련을 연결한 통신선에 도청장치를 설치해 주요 정보를 막 빼내고 있었습니다.

    블레이크가 이런 정보를 소련에 넘겼고 소련은 이 도청창치에 '역정보'를 흘리는 방식으로 1년 넘게 서방 정보기관의 공작을 번번이 좌절시켰습니다.

    그의 이중간첩 활동은 서방으로 망명한 공산진영의 첩보원이 영국 정보기관에서 암약하는 소련 첩자의 명단을 넘기면서 발각됐습니다.

    영국으로 소환된 그는 즉시 체포됐고 스파이 혐의를 인정했습니다.

    1961년 영국 법원은 그에게 종신형에 가까운 42년형을 선고했습니다.

    다소 과도한 형량이라는 것이 당시 여론이었습니다.

    소련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가 밀고한 스파이 42명을 즉각 처형했습니다.

    1년 형에 스파이 1명을 처형한 셈입니다.

    그는 소련이 무너진 1990년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넘긴 서방 스파이가 500명이 넘지만 42명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비난은 온당치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World Now] 이중스파이 '조지 블레이크'의 Time to Die
    <영화같은 탈출…소련의 영웅으로>

    '켐브리지 5인조' 스파이 등 잇따라 이중 스파이에 속아 체면을 구긴 영국의 정보기관은 몇년 뒤 또다시 당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합니다.

    1966년, 5년 째 수감중이던 블레이크는 감옥에서 만난 아일랜드 테러리스트와 외부 반핵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영화처럼 탈옥했고, 이듬해 삼엄한 감시를 피해 소련으로 넘어가는데 성공했습니다.

    소련은 그에게 '영웅'의 호칭을 주며 환영했고 그는 러시아 정보국 KGB에서 스파이 교육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렇게 '그레고리 이바노비치'가 된 그는 모스크바 외곽에 안착했고 말년에는 시각을 거의 상실했습니다.
    [World Now] 이중스파이 '조지 블레이크'의 Time to Die
    <어디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배반도 없다>

    스페인계 유태인으로 태어난 조지 블레이크는 독일에 맞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고, 위기 상황에서 한때 당시 아버지의 적국이었던 영국의 국적을 선택했습니다.

    냉전이 불러온 영국과 소련의 첩보전에서 삶과 죽음을 오가며 활동했고, 결국 소련을 '이념의 조국'으로 선택했습니다.

    배신자 또는 매국노라는 서방의 평가에 대해 그는 "배반을 하려면 어디에든 속해야하는데 나는 결코 어디에 속한 적인 없다"며 이방인으로 남은 자신의 삶(98세)을 변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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