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공모 85% LH 전관 회사가 싹쓸이"
'건축설계사무소 OB 현황'. 제보자가 보낸 문건 맨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OB는 '전직'이라는 뜻입니다. 아래 표에는 설계사무소 이름과 LH 입사연도가 나와 있었습니다. 업체 수는 43곳, 사람은 모두 70명이었습니다. 한 곳에 전화를 걸어봤습니다. 직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표님 오시기 전에는 (설계공모) 1개 붙었을 거예요. 오신 이후에 6개인가 7개인가 당선된 것 같아요."
정말 이 정도일까? 작년에 진행된 LH 현상설계 공모 85건의 심사결과를 일일이 열어봤습니다. 지방 설계사 등 응모제한이 있거나 액수가 너무 작아 영세 업체만 참여하는 공모를 빼면 61건이 남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52건, 85%를 'LH 전관 리스트'에 있는 회사 30곳이 따냈습니다. 얼마 전 한 의원실에서 작년 LH 설계공모 수주 상위 20개 업체 중 LH 출신 전관이 있는 11개 업체가 전체 일감의 42%를 따냈다는 자료를 낸 적이 있었는데 전수 조사를 해보니 상태가 훨씬 심각했던 겁니다.
이 같은 내용을 담은 3월 22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를 통해 'LH 전관이 없으면 현상설계 공모를 따낼 수 없다'는 설계업계의 오래된 속설이 사실로 확인됐습니다. 한 해 2천억 원이 넘는 LH 설계공모가 어쩌다 LH 퇴직자들의 놀이터가 됐는지 '알려줘! 경제'를 통해 촘촘히 살펴보겠습니다.
LH 내부위원 4명→2명 줄었지만…"영향력 여전"
LH는 1년에 100건 안팎의 설계공모를 냅니다. 당선되면 공공주택이나 공공기관 청사 등을 설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집니다. 중요한 건 돈입니다. 20억~50억 원 규모의 설계용역비를 가져갈 수 있습니다. LH 전관이 필요한 이유는 심사위원 중에 LH 직원도 있기 때문입니다. 심사위원은 7명인데 대학교수 등 외부위원이 5명, LH 임직원(내부위원)이 2명을 차지합니다. 2018년까지는 내부위원이 무려 4명이었습니다.
LH 심사위원 비율이 44%(9명 중 4명)→ 29%(7명 중 2명)로 줄긴 했지만 LH 위원들의 영향력은 여전하다고 합니다. 설계업체 관계자는 "LH가 공사 발주처잖아요. 발주처에서 '이런 유형의 건물이 쓰기가 편한 것 같다'는 얘기를 하는데 사용자 입장을 고려 안 하고 엉뚱한 안을 뽑았다는 얘기가 나오면 외부위원으로선 부담스럽죠"라고 말했습니다. LH 설계심사를 맡고 있는 한 건축학과 교수는 "LH 직원 중에 대놓고 '디자인 좋은 걸로 해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어요"라고 귀띔했습니다.
LH "심사 생중계"…업계 "의미 없어"
LH는 "심사가 유튜브로 생중계되고 있어 내부위원의 분위기 주도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런데 유튜브 생중계가 시작된 건 겨우 5개월 전(2020년 10월)입니다. LH는 또 2019년 9월부터 특정 앱을 통해 심사 실황을 공개했다고도 했는데, 알고 보니 입찰 당사자들만 볼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설계업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생중계를 일반인이 보지도 않을뿐더러 입찰에 참여한 업체들은 어차피 공통적으로 LH 전관들에게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는 공개심사"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누굴 지적할 상황이 아니라는 거죠. 게다가 분위기 조성이란 것도 '디자인', '경제성' 등을 에둘러 표현하면서 '아는 사람만 알 정도로' 은밀히 진행되기 때문에 일반인이 알아차리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설명입니다.
LH 전관 스스로 털어놓는 '전관의 압박'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영입하는 LH 전관은 보통 1급(처장, 본부장, 부문장) 출신이고 대부분 현직 때 LH 설계 심사를 맡았던 사람들입니다. 심사를 하다가 LH 퇴직자의 사정을 봐주고, 퇴직 후 자신도 설계사무소의 전관이 되어 후배를 압박하는 도식입니다.
3년 전 LH 본부장으로 퇴직하고 현재 설계사무소에 몸담고 있는 A씨를 만났습니다. A씨는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일하던 때를 이렇게 털어놨습니다. "심사 때 퇴직자에게 연락이 오는데 보통 강하게 말씀들을 하신다. 저는 그런 것과 무관하게 심사를 했지만 그렇게 못 하는 사례들도 많이 봤다". '그렇게 양심을 지키기 힘든 분위기냐'고 물었습니다. A씨는 "사회생활이 정말 힘들 정도였다"고 토로했습니다.
전관 때문에 압박을 받았다던 A씨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전관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습니다. A씨는 2년간 친정 LH로부터 100억 원이 넘는 설계용역을 따냈습니다. A씨는 "전관예우의 영향이 전혀 없다고 말씀드릴 순 없다"고 시인했습니다.
"후배한테 전화하는 게 뭐 어때서"…'사전접촉금지 규정' 무용지물
LH는 "심사위원 사전접촉 등을 방지코자 청렴서약서 및 사전접촉 등 확인서를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잘 운영되고 있을까.
6년 전 1급으로 퇴직해 설계사무소를 3개나 거치며 왕성한 전관 활동을 하고 있는 B씨를 찾아가봤습니다. B씨는 "심사에 들어간 현직들한테 좀 도와주라고 이렇게 전화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다른 사람은 안 하나."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사전접촉금지 서약서를 쓰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회사가 쓰지 내가 쓰는 건 아니지 않느냐"는 황당한 해명을 내놨습니다.
2010~2020년 사이 사전접촉 금지 위반으로 LH가 적발한 건은 딱 2건입니다. 심사 때마다 LH 현직 심사위원들의 전화통에 불이 나는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통계입니다. 2건마저도 경고만 하고 끝났습니다. LH 설명과 달리 '사전접촉금지 서약서'는 있으나 마나 한 규제인 셈입니다.
국토부 "LH 내부직원 심사 배제 검토"
MBC 보도 이후 국토교통부는 제도 개선 검토에 나섰습니다. LH 직원을 설계공모 심사에서 아예 배제하는 방안까지 거론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발주기관 임직원이 설계공모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건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하지만 건축사 자격 취득 후 5년 이상 실무경험을 쌓은 임직원은 예외적으로 참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국토부 관계자는 "예외 규정을 대폭 강화하거나 내부 직원을 아예 심사에서 배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모든 LH 내부직원들이 퇴직한 선배들의 포섭에 넘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공정하게 양심을 지켜 심사하는 임직원도 적지 않습니다. 또, 외부위원들이라고 로비로부터 자유로운 건 아닙니다. 3월 22일 뉴스데스크를 통해 보도했듯 금품 로비는 내, 외부위원을 가리지 않고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내부위원들을 배제한다 해도 숙제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때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LH 설계공모가 설계업계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기 때문입니다. 중견 건축설계사무소의 한 임원은 "설계안으로 경쟁하는 시장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LH 현상설계에 일부러 참여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설계사무소 전관들끼리 회의를 해서 아예 판을 짠다는 얘기도 업계에 파다합니다. 심사위원인 수도권 대학의 한 교수는 "조달청 공모는 몇천만 원짜리 용역에도 여러 팀이 몰리는데, LH 현상설계는 수십억짜리 용역인데도 입찰하는 팀이 2~3개에 불과하다.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LH의 작년 전체 발주 규모는 공사와 각종 용역을 합쳐 15조 8천억 원에 달합니다. 그만큼 전관예우도 광범위하게 퍼져있습니다. LH 공사현장에 납품하는 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아온 LH 1급 출신 간부가 납품업체에 부회장으로 취업하고, 이후 LH 일감을 싹쓸이한 사실이 MBC 보도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3기 신도시 투기 의혹에서 시작된 LH 사태에서 '투기' 못지않게 '전관'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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