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철수 후보가 단일후보가 되더라도 우리당이 조직과 자금을 동원해서.. 한 40억원 들어가는 선거인데, 김종인 위원장과의 관계에 비춰봐서도 그렇고 당이 달라서 자금 지원을 못합니다." (오세훈 후보, 3월 16일 TV토론 中)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지난 16일 단일화 경쟁을 하던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에게 불쑥 선거 자금 얘기를 꺼냈습니다.
가뜩이나 "당에 돈이 없어, 국민의힘을 빈 배처럼 이용하려고 한다"는 비난을 받아오던 안 후보의 아픈 곳을 찌른 건데요.
오 후보는 왜 선거 자금으로 안 후보를 공격한 걸까요?
이유는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는 각 정당에 선거 보조금이 지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각 후보들은 각 정당의 기존 보유 자금이나 개인 자금으로 선거를 치러야 하는거죠.
정치자금법 제25조 2항에는 "대통령 선거, 임기만료에 의한 국회의원 선거 또는 동시지방 선거가 있는 연도에는 각 선거마다 보조금 금액을 예산에 계상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습니다. 따라서 임기만료에 의한 선거가 아닌, 재선거나 보궐선거는 보조금 지급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보니 국민의힘보다 상대적으로 자금력에서 뒤지는 국민의당이 '스스로의 재력으로, 수십억이 들어가는 서울시장 선거를 치를 수 있겠느냐'는 일종의 비아냥이 오 후보에게서 나왔던 겁니다.
■ 2020년 정당보조금 총 907억원…국힘 361억·민주 327억·민생 117억
그렇다면 우리가 낸 세금으로 정당에 얼마나 보조금을 주고 있을까요?
정당보조금의 종류에는 매 분기마다 2월, 5월, 8월, 11월의 15일에 각각 지급되는 경상보조금이 있고요, 선거 때마다 지급되는 선거 보조금이 있습니다. 통상 이 두 종류의 보조금을 통틀어 정당보조금이라고 부릅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년 동안에만 모두 907억 1천여만원의 정당보조금이 각 정당에 지급됐습니다. 무려 1천억원에 가까운 금액이죠.
가장 많이 받은 정당은 국민의힘으로 수령액이 361억원이 넘습니다. 이어 더불어민주당이 327억원, 민생당이 117억원, 정의당 56억원, 국민의당 10억원, 열린민주당 9억원, 국가혁명당 8억원 순입니다.
현재 단 한 명의 국회의원도 없는 민생당이 지난해 20대 국회 임기 말까지 20석의 교섭단체 지위를 누리며 국고보조금을 117억원 받았고요.
국가혁명당도 4.15 총선에서 지역구 여성후보를 77명 공천해(여성추천보조금 지급 기준은 253개 지역구의 30%인 76명) 8억 4천여만원 가량의 보조금을 받았습니다.
의석이 없어 현재 입법 활동은 없지만, 지난 총선에서 선거 보조금을 두둑히 챙긴 민생당과 국가혁명당.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도 과감하게 후보를 내고 완주 태세를 갖춘 상태입니다.
■ 1980년 국보위가 도입한 정당보조금…"야당 길들이기" 비판도
그렇다면 세금으로 지급되는 정당보조금 제도는 언제 처음 도입됐을까요?
정치자금법에 국고보조금 항목이 신설된 경위를 찾아 국회 속기록을 뒤져봤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인 1980년 12월 16일 화요일 오후 2시에 개의된 국가보위입법회의(이하 국보위) 본회의 속기록에서 그 내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국보위는 12.12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국회를 해산한 뒤 1980년 5월에 만든 임시 입법 기구였습니다.
당시 '선거법 등 정치관계법률 특별위원장'이었던 김사용 의원은 국보위 본회의에 출석해 '정치자금법 개정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제안 설명을 합니다.
- "제안 이유를 말씀드리겠읍니다. 헌법 제7조 제3항의 규정에 의하여 국가가 정당의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보조할 수 있게 됨에 따라서 그 보조금의 지급대상과 배분 비율 등을 건전한 정당의 보호육성이라는 차원에서 새로 정하고...(중략)...정치자금을 양성화 함으로써 정치활동의 공명화를 촉진하고 민주정치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김사용 의원, 1980년 12월 16일 본회의 속기록 中)
해방 이후 우리나라 정당들은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에 의존해 운영돼왔고, 그렇다보니 정치 자금을 둘러싼 부정부패가 극심했습니다. 오죽하면 박정희 등 5.16 군사쿠데타 세력이 공화당 창당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놓고 주가조작을 시도했던 이른바 증권파동(1962년)까지 벌어질 정도였으니까요.
전문가들의 분석도 위 제안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특히 정치자금의 기부에 대한 특별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기업인이나 재력이 있는 정치인 후원자들은 불법으로 음성적인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이런 상황은 정치권력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부정축재자 처벌이라는 과정을 거쳐 노출됨으로써 정치인이나 기업인에 대한 불신만이 가중되었던 상황이다." (김영래, '정치자금 제도의 변천과정과 특징 연구' 中, 아주대학교 1994년)
따라서 정치인과 기업인 모두 정치자금법의 제정 필요성을 공감하던 차에 증권파동 직후였던 지난 1965년 정치자금법이 제정됐고, 법 제정 15년만인 1980년 정당보조금 제도까지 도입된 겁니다.
다시 김사용 의원의 제안 설명입니다.
- "..아홉째, 국가의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은 예산의 범위 내에서 지급할 수 있도록 하되 정당의 운영 경비에만 사용할 수 있게 했고, 보조금 지급은 지급 당시 국회의석이 다수인 순으로 4개 정당까지 100분의 5씩을 균등 지급하고, 그 잔여분 중 100분의 50은 의석수 비율로 지급하고, 그 잔여분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득표수 비율에 의하도록 했읍니다." (김사용 의원, 1980년 12월 16일 본회의 속기록 中)
눈에 띄는 점은 당시 다수 의석 순으로 1위부터 4위 정당에 국고보조금의 100분의 20을 우선 지급받는 특혜가 있었다는 점인데요. 여기엔 이같은 부연 설명이 붙어있습니다.
- "..정당법이 정당의 성립과 존속 요건을 완화하고 있기는 하지만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에 필요한 조직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수많은 군소정당의 난립으로 야기되는 정국 혼미의 현상은 국민적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의사가 담겨 있읍니다." (김사용 의원, 1980년 12월 16일 본회의 속기록 中)
이 결정의 취지는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데요. 현재는 20석 이상 의석의 교섭단체들이 정당보조금의 100분의 50을 우선 떼 가는 특혜를 누리는 식으로 변경돼 유지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민생당이 받은 보조금 117억원도 40여년 전 결정된 이런 연유로 가능했던 겁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정당을 지원하기로 한 역사적인(?) 순간. 당시 찬성은 몇 표였고, 반대는 몇 표였는지 궁금했으나 알 수 없었습니다.
당시 국보위는 별도 표결없이 법안을 통과시킨 것으로 보이는데요. 정치자금법 개정안도 아래와 같은 형식적 문답을 거쳐 바로 통과됐습니다.
- "그러면은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 개정법률안에 이의없으십니까? (「이의없읍니다」 하는 이 많음)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의장 이 호, 1980년 12월 16일 본회의 속기록 中)
보조금 제도의 취지와 관련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정경유착 차단과 정당의 건전성 강화를 위해 도입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하지만 '야당 길들이기'라는 비판도 당시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해외 사례는?…미국은 '정당 지원 No', 유럽·일본은 'Yes'
그렇다면 해외 국가들도 우리나라처럼 세금으로 정당에 돈을 줄까요?
일단 미국은 정당에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정당은 '정치활동위원회'라는 기구를 통해 모금한 기부금 위주로 운영되는데요. 총 모금액에 대한 규제는 없지만 5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5천 7백만원 이상을 모금할 경우에는 이를 전자문서화 하는 등의 특별 관리를 받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에 보조금 제도가 아예 없는 건 아니고요. 대통령 선거 후보자에게 한해, 그것도 직전 대선에서 총 투표수의 25% 이상을 득표한 정당의 대선 후보에게만 보조금이 적용됩니다. 사실상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선 후보만 일종의 선거 보조금을 받는 셈이죠.
정당에 보조금이 지급되는 대표적인 나라는 독일입니다. 독일은 정치활동이 정치인 개인이 아니라 정당 중심으로 이뤄지다보니 국가로부터 대규모의 보조금이 지급되는데요. 현재 연간 약 2억 유로, 우리 돈 2천 7백억 원 한도로 정당에 보조금이 나가고 있습니다. 2019년 통계를 보면 메르켈이 속해 있는 기민당이 5천 4백만 유로, 우리 돈 약 723억원을 받았고요. 사민당이 5천 5백만 유로, 약 736억원을 수령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https://de.statista.com 통계 참조)
이 밖에 프랑스는 일명 '정치자금정화법'에 따라 정당과 정치단체에 국고 보조가 진행되고 있고요. 영국 정부도 '정책개발 보조금' 명목으로 우리 돈 약 31억원 규모의 돈을 각 정당에 배분하고 있습니다.
일본 역시 지난 1994년 '정당조성법'을 제정해 정당보조금 제도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자민당의 장기 집권 체제가 이어지면서 연간 약 2백억엔, 우리 돈 2천억원에 달하는 정당보조금 중 절반 이상을 자민당이 받아가고 있습니다. ('각국의 정당·정치자금 제도 비교연구', 2016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 참조)
■ "정책개발비 지출은 0%"…고개드는 정당보조금 폐지론
다시 우리나라 정당보조금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지난해 10월 1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감사원 국정감사.
현재는 의원직을 사퇴한 열린민주당 김진애 전 의원이 최재형 감사원장에게 다음과 같은 질의를 합니다.
"..우리나라 정당 구조상 당비보다 국고보조금이 상당히 많은걸 아시죠. 그런데 이런 게 자산 취득에 이용될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해 적극적으로 감사를 해야 되는게 아니냐...(중략)...왜 우리가 정당의 자산까지도, 자산을 관리하는 이자까지도 국민의 세금을 내줘야 되는 것이냐. 필요하다면 저는 개정안을 내겠습니다."
국민의힘이 당시 지방의 건물들을 담보잡히고, 대출을 끌어오는 등의 방법으로 4백억원 상당의 중앙당사 건물을 여의도에 매입했다고 밝히자, 김 전 의원이 '정당보조금이 건물 매입에 쓰인 것 아니냐', '직접적으로 안쓰였더라도 대출이자를 갚는데 쓰이는 것 아니냐' 등의 문제를 제기한 겁니다.
그러자 최재형 감사원장은 "정당보조금이 헌법상 감사의 대상이 되는 건 맞지만 정당보조금에 대한 감사는 실시를 거의 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검토해보겠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 논의는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를 보면, 지난 2019년 더불어민주당은 당비와 정당보조금 등으로 거둔 수익 383억여원 중 163억여원을 지출했습니다.
그 중 기본경비가 62%, 조직활동비가 28%로 지출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정책개발비는 0%였습니다.
국민의힘의 전신인 자유한국당도 마찬가지입니다. 2019년 수입 337억원 가운데 184억원을 지출했는데, 그 중 기본경비가 52%, 조직활동비 지출이 23%였고, 정책개발비 지출은 0%였습니다.
당시 제3당이던 바른미래당도 수입 162억원 중 58억원을 썼는데, 기본경비가 60%, 조직활동비가 23%를 차지한 반면, 정책개발비 지출은 0%였습니다. (2019 정당의 활동개황 및 회계보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20.11 참조)
주요 정당의 연간 지출 대부분이 임대료와 인건비, 지역별 당협위원회 활동비 등 공룡같은 조직을 운영하는데 쓰였던 겁니다.
물론 정책개발비를 일부 쓰긴 썼습니다. 민주당이 2019년 연간 3천 1백만원, 자유한국당이 5천 7백만원의 정책개발비를 지출한 것으로 보고했는데, 2백억원 가까운 지출 내역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워낙 미미해 0%로 집계된 겁니다. 참고로 같은 해 바른미래당은 정책개발비를 단 1원도 쓰지 않았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당보조금에 대한 폐지론까지 거론되는 실정인데요.
중앙대 법학과 교수 출신으로 20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상돈 전 의원은 "각 정당이 최고위원회의 백드롭(배경 문구판) 한 번 만드는 데만 수십만원은 족히 드는데, 정치인들 말장난에 피같은 세금이 쓰이고 있는 꼴"이라며 "당비도 걷고 후원회비도 걷는 정당에 수백억씩 세금을 지원하다보니 넘치는 돈을 쓰러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출마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전 의원은 또 "후보들이 선거 득표율에 따라 선거 비용 보전을 받는데도, 선거철이 되면 각 정당에 선거보조금이 별도로 지급된다"며 "이게 혈세낭비가 아니고 뭐냐"고 보조금 폐지론을 주장했습니다.
반대 의견도 있습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모든 제도가 완벽할 순 없고, 순기능과 역기능 중 어느 쪽이 더 많으냐로 따져야한다"며 "제도 폐지보다는 투명성 제고 방안을 찾는 쪽으로 논의돼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당비만으로 정당이 운영되도록, 정치인들이 스스로 혁신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요.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당이 가만히 있어도 때가 되면 국고 지원이 돼다보니, 당장 자기 일이기도 한 국회의원들은 이 꿀맛을 유지하려고 제도 개선에 미온적일 수 밖에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교수는 그러면서 "정당보조금 없이 당원들의 당비만으로 정당이 운영되는 시대가 도래해야 유권자를 당원으로 만들려는 정치인들의 노력도 배가되고 상향식 민주주의도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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