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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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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M본부] '금강회'를 아십니까…고문피해자 또 울리는 '피고 대한민국'의 항소

[서초동M본부] '금강회'를 아십니까…고문피해자 또 울리는 '피고 대한민국'의 항소
입력 2021-05-26 12:53 | 수정 2021-05-26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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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초동M본부] '금강회'를 아십니까…고문피해자 또 울리는 '피고 대한민국'의 항소

    자료사진

    ('금강회' 사건 국가손해배상 재판 피해자 신문)
    2021.5.25

    어제(25일) 오후 4시 40분 서울고등법원 559호.

    방청석이 텅 빈 법정인데도, 무거운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감색 재킷을 차려입고, 머리가 조금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 한 남성이 굳은 표정으로 법정에 섰습니다.

    전두환 정권 당시 고문 피해자 이영복 씨.

    피해자 신문을 위해 법정에 선 그는 마음 깊이 담아뒀던 41년 전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선서. 사실 그대로 말할 것을 맹세합니다."

    예순의 그는, 어느덧 스무 살 청년의 봄을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 학교 동아리 '금강회'가 무시무시한 이적단체로…전두환 정권의 조작 사건

    1980년 충남 공주사범대학교. 그는 교육학과 2학년이었습니다.

    친구들과 동아리 '금강회'를 만들어 책도 함께 읽고 학내 시위에도 참여했습니다.

    이제는 필독서가 된 <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책들을 주로 읽고 토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80년의 봄은 너무도 짧았습니다.

    1980년 5월, 전두환이 비상계엄령을 내리며 모든 게 급변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전후로 수많은 학생이 잡혀갔습니다.

    학내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이씨와 친구들 역시 조치원 32사단에 끌려가 열흘간 순화 교육을 받았고, 학내 공식 동아리 '금강회'는 해산됐습니다.
    [서초동M본부] '금강회'를 아십니까…고문피해자 또 울리는 '피고 대한민국'의 항소
    #.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 고문의 기억

    그리고 1년 뒤인 1981년 8월 8일, 당시 전남 광주의 무등다방.

    이씨는 '금강회' 친구들을 만나러 고향의 다방에 갔다가, 낯선 남성들에게 붙들려갔습니다.

    [5월 25일 '금강회' 사건 국가손배 재판 中]

    [이영복/고문 피해자]
    "제 양팔을 잡고 같이 가자고 신분도 안 밝힌 상태였는데 끌려서…. 지프차에 데려가서 타고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부여경찰서였습니다."


    7~8명의 경찰이 몰려들었고, 이씨를 무릎 꿇려 앉힌 뒤 집단구타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북한 방송을 듣느냐"는 게 경찰들의 첫 질문이었고, "안 들었다"고 했는데도 곤봉이 날아들었습니다.

    [5월 25일 '금강회' 사건 국가손배 재판 中]

    [이영복/고문 피해자]
    "곤봉에 노끈 같은 게 둘러쳐져 있는 것이었는데 (경찰들이) 들고 집단구타를 시작했습니다. 견딜 수가 없어서 (북한방송을) 들었다고 했는데도 계속 구타가 진행됐습니다. 질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계속 두드려 패서 견딜 수 없어서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이씨는 지프차에 태워졌습니다.

    눈이 가려진 채 이동하면서, 극한의 공포를 느꼈을 이씨…. 당시를 떠올리던 이씨는 법정에서 말을 잇지 못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5월 25일 '금강회' 사건 국가손배 재판 中]

    [이영복/고문 피해자]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고) 제가 정확히는 지하실에 끌려가서 18일 되는 날 주위를 살펴볼 마음에 의자 뒷면을 봤는데 충남이라고 쓰여 있어서…. 대공분실 지하실이었습니다."


    충남 대공분실 지하실. 전두환 정권 당시 잔인한 고문으로 간첩 조작 사건을 만들어냈던 곳입니다.

    [5월 25일 '금강회' 사건 국가손배 재판 中]

    [이영복/고문 피해자]
    "저를 재우던 방에서 계단 바로 옆이 취조실이었고 그 바로 옆이 고문실이었습니다. 조사 받을 때 비명이나 신음, 취조 소리 이런 게 방음이 안 좋아서 적나라하게 들리는 상황이기 때문에…."


    수사관 10여 명은 이씨를 둘러싸고, '고정 간첩을 만난 적 있느냐' '노동당에 가입한 적 있느냐' 등을 물었고 아니라고 하면 주먹이 날아들었습니다.

    진술서를 수백 번 고쳐 쓰며 수사관이 원하는 답을 내놓을 때까지…. 끔찍한 고문은 계속됐습니다.

    [5월 25일 '금강회' 사건 국가손배 재판 中]

    [이영복/고문 피해자]
    "손에 수갑을 채워서 창틀에 매달고 발을 땅에 못 대게 해서 두들겨 패더라고요. 두렵고 그런 게 반복되다 보니까 그들이 질문하면 무조건 '예' 하기에 바빴고요.
    일주일 정도 됐을 때 저를 물고문…. 통닭구이 고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흘을 연속으로…. 책상을 양쪽에 대고 긴 봉을 걸친 다음에 팔을 묶고 발을 묶고 해서 공중에 매단 채로 거꾸로 매달고 머리를 누른 다음에 코에만 물을 붓는 거거든요."


    그는 진술 도중 자주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했습니다.

    [5월 25일 '금강회' 사건 국가손배 재판 中]

    [이영복/고문 피해자]
    "조사 받다 보면 저는 잠이 들게 되고 꿈을 꾸게 됩니다. 학교 다니던 시절에 집 앞에서 있지도 않았던 다방이 생겨서 경찰서로 쫓기는 꿈을 계속 꿨습니다. 그게 아마도 20일간 계속됐던 것 같아요."


    지하실에 갇힌 47일간 옆방에서 욕하고 구타하는 소리, 친구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여러 차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시도했습니다.

    [5월 25일 '금강회' 사건 국가손배 재판 中]

    [이영복/고문 피해자]
    "고문은 한 개인의 인격을 파괴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그들은 물고문을 통해 저를 결국 파괴를 했고요. 저는 살아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그저 학내 동아리였던 '금강회'를 이적단체로 조작했습니다.

    공주사대 학생들 40여 명이 관련자로 조사를 받았는데, 일부는 가혹한 고문에 정신병을 앓게 됐습니다.

    이씨는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735일간 구금됐습니다.
    [서초동M본부] '금강회'를 아십니까…고문피해자 또 울리는 '피고 대한민국'의 항소

    자료사진

    #. 교사가 되고자 했던 꿈도, 청춘도….

    이씨가 대공분실로 끌려간 것도 모르고, 가족들은 아들을 찾기 위해 전국을 헤맸다고 합니다.

    [5월 25일 '금강회' 사건 국가손배 재판 中]

    [이영복/고문 피해자]
    "아버지에게 어떤 사무장이라는 분이 안기부를 통해서 제 소재를 파악해줬다고 하더라고요. 공주사대 등록금이 10만 8천 원이었는데 140만 원을 지불했던 모양입니다."


    1983년 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그는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고향인 광주에서 일어났던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때, 경찰에 쫓기느라 광주에 가지 못했던 게 내내 부채 의식으로 남았다는 이씨….

    [이영복/고문 피해자]
    "광주 한복판에 살았기 때문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서 졸업하고 하는 걸 감히 하지 못했고, 뭔가를 계속해야 했어요. 1983년에 전두환이 탄압했던 학생들 학교로 복교 조치를 시켰는데 안 가는 걸로 선택한 거죠."


    이씨는 1986년 충무체육관에서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을 또 선고받았습니다.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정말 예쁘게 키워야지.' 다짐했던 스무 살 청년은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5월 25일 '금강회' 사건 국가손배 재판 中]

    [이영복/고문 피해자]
    "아버지께서 졸업장만이라도 받으라고 하셨었는데…. 선친이 돌아가셨는데…. 느지막이 졸업을 하고 싶어서…. 교직에 나가고 싶었습니다. 재입학을 해서 2009년에 30년 만에 졸업했습니다."


    스무 살 대학생의 꿈도, 청춘도 지나가 버린 후였습니다.

    #. '피고 대한민국'은 항소 중

    이영복 씨가 대학 친구들과 함께 재심을 시작하게 된 건 2011년의 일입니다.

    대공분실 지하실에서 목격한 다른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 재판에서 증언하게 되면서, 우리 사건도 재심을 받아 명예회복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겁니다.

    하지만 법원은 처음엔 증거가 없다며 재심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금강회 학생 중 한 명의 80년대 당시 판결문에 '상당기간 감금됐던 것 같은 사정이 엿보인다'고 쓰여 있던 것을 찾아 증거로 내자, 법원은 그제야 재심을 받아줬습니다.

    어렵게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경찰과 대공분실 수사관들의 고문·가혹행위 피해를 배상받기 위해 소송을 신청하기까지…. 9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국가배상 소송 1심은 이씨와 가족들이 청구한 27억 원 중에 형사보상금을 빼고, 겨우 2억 원만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피고 대한민국'은 이마저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소했습니다.

    이미 재심에서 이씨의 무죄가 인정됐고, 당시 있었던 불법 구금과 고문·가혹행위가 낱낱이 드러났는데도, 피고 대한민국은 "국가의 불법행위 사실이 충분히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반박하고 있습니다.

    [이영복/고문 피해자]
    "(국가가 항소한다고 했을 때) 너무 화가 나고 어이 없고 그랬죠. 지나온 역사가 상처도 많고 국가폭력도 너무 많고. 간첩단 어마어마하게 만들어내고 그랬는데도…. 쉽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관성 같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선고는 다음 달 22일입니다. 재판부의 결론이 어떻게 나올지, 또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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