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히 지내고 있는 걸로 확인했습니다. 지금 어디 있는지 말씀은 못 드립니다."
지난주 인터뷰했던 아프가니스탄 전직 판사 나즐라 아유비 변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인터뷰 말미에 2001년 파키스탄에서 만났던 아프간 여성운동가 파타나 가일라니의 안부가 궁금해서 물었더니 소식을 알려줬다.
지난 2015년 미국으로 피신한 아유비 변호사는 캘리포니아주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는 운동(Every Woman Treaty)을 하고 있어서 아프간의 여성 운동가들과 '끈'이 있다. 지금도 250여 명과 24시간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했다.
* "아프간 여성 활동가들도 해외 대피 절실"
여성 활동가들 중에서도 탈레반의 주요 표적(hard target)인 경우는 몸을 숨기고 있다고 한다. 아유비 변호사는 이들이야말로 해외로 대피할 수 있는 대상에 포함돼야 할 절박한 상황이라고 했다.
"미군을 도운 조력자들 상당수가 해외로 대피했지만, 이 여성들은 미국 쪽에 닿는 이렇다 할 선도 없다. 지금으로선 집에 은신하면서 탈레반의 추적에 떨고 있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본인뿐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의 목숨도 위태롭다"고 말하는 아유비 변호사의 음성은 유독 떨렸다.
직접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여성 인권에 목소리를 내다가 그녀의 아버지와 남자 형제가 극단주의 세력에 의해 살해됐다.
자신은 아프간 파르완 지역에서 여성 최초로 판사가 됐지만 탈레반의 위협 탓에 5년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결국엔 미국을 피란처로 택했다.
숨어 지내며 가족의 목숨까지 걱정해야 하는 아프간 여성 활동가들의 처지는 아유비의 과거와 같은 셈이다.
* "탈레반 재집권 전까지 한국보다 높았던 여성 의원 비율"
이런 상황에서 탈레반에 저항할 여성들의 동력이 남아 있을까? 아유비 변호사는 그렇다고 했다. 들어보니 활동가들이 주도하는 운동만 생각할 게 아니었다.
"탈레반의 통제하에서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긴 하지만, 운동은 이제 시작됐다. 미국이 아프간에 발을 들인 20년 동안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된 여성들에게서 요구가 특히 높다."
이미 가죽 재킷 차림으로 자유롭게 활동해온 여성 가수,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올림픽에 출전한 육상 선수, 백악관에 초청까지 받았던 소녀 로봇 공학팀 등을 떠올리면 분명 예전의 아프간 여성들이 아니다.
국제의원연맹(IPU)에 등록된 2019년 기준 여성 국회의원 비율을 보면, 한국이 17%에 그친 데 비해 아프가니스탄은 24%였을 정도다.
(http://archive.ipu.org/wmn-e/arc/classif010219.htm)
이렇게 보면, 세계적으로 아프간 여성들이 트위터상에 퍼뜨린 '#내 옷에 손대지마'(#DoNotTouchMyClothes) 해시태그 운동이 놀랄 일은 아니다.
탈레반이 강요하는 검은 천을 전신에 뒤집어쓴 '부르카'는 아프간의 전통이 아니라며, 화려한 색상과 무늬의 전통의상 차림을 잇따라 올렸는데,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당당했다.
*'미국 20년 유산'을 보는 복잡한 시선
아프간 여성들의 존재를 복원하고, 목소리를 키운 건 분명 미국이 아프간에 남긴 20년의 유산이다. 하지만 이젠 그 유산을 보는 시선은 복잡해졌다.
한 아프간 여성은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그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여성에 대한 교육이 이뤄져 미국에 감사하다. 하지만 미국의 철수 이후 버림받았다는 감정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미국인들의 입장도 복잡했다.
9.11 테러 20년을 하루 앞두고 참사 현장이었던 '그라운드 제로'에서 만난 새라(시카고 거주)는 "50대 50의 감정"이라고 했다.
"탈레반을 치기 위해 들어간 것은 잘한 일이지만, 남겨진 아프간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나 그동안 미국이 이룬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을 보면 지난 20년간 미군의 목숨만 낭비한 것 같다"고 했다.
* 9.11 20년, 아프간 20년이 남긴 '트라우마'
지난 열흘간 울먹이는 사람들을 유독 많이 접하는 취재가 이어졌다.
가족이 탈레반에 살해당했다는 아유비 변호사의 얘기를 들을 때나,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9.11 테러 희생자들을 떠올리며 말을 잇지 못하던 새라의 표정을 접할 때, 인터뷰하는 기자로서 감정을 추스르려 애써야 했다.
그런 점에서는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9.11 당시 뉴욕소방대의 부서장 조 샌타가토 씨의 눈물이 잊히지 않는다.
"소방관은 대원 한 사람이 숨지면 동료들 모두 장례식장에 간다. 며칠이 지나도 함께 슬퍼하고 고인을 추억하는 말을 나눈다. 9.11 때 우리는 동료 345명을 잃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며칠이고 땅 파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의 눈물은 잘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는 참극이 왜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누구의 잘잘못이 있었는지는 중요치 않아 보였다.
구하지 못하고 땅속에 남겨둔 2천여 명의 희생자, 그들을 구하려다 함께 사라진 이들에 대한 고통스런 기억만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여전히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군인들이 철수 직전까지 목숨을 잃은 '아프가니스탄'도 많은 이들에게 두고두고 '트라우마'로 남을 판이다.
- 박성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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