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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Now] 76년 만의 위령비‥"한국인 희생자 1만명, 이제라도 건립돼 기뻐"

[World Now] 76년 만의 위령비‥"한국인 희생자 1만명, 이제라도 건립돼 기뻐"
입력 2021-11-06 11:51 | 수정 2021-11-0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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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rld Now] 76년 만의 위령비‥"한국인 희생자 1만명, 이제라도 건립돼 기뻐"

    사진 제공: 연합뉴스

    76년 만에 위령비‥한국인 원폭 희생자 추모

    일본 나가사키에 한국인 원자폭탄 희생자 위령비가 원폭 피해를 입은지 76년 만에, 건립을 추진한 지 27년 만에 세워졌습니다.

    오늘 오전 나가사키시 평화공원에선 강창일 주일본 한국대사와 여건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단장 등 한일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인 원자폭탄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습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시에 원자폭탄이 투하돼 약 7만4천명이 사망했습니다.

    이 중 수천명~1만 명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일제에 의해 공업 지역인 나가사키로 강제 동원됐던 조선인 노동자 등 우리 동포가 미군의 원폭 투하로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다른 원폭 투하 지역인 히로시마시에는 1970년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매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전날인 8월 5일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제가 열렸지만, 나가사키에는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가 없어 추모 행사를 열지 못했습니다.
    [World Now] 76년 만의 위령비‥"한국인 희생자 1만명, 이제라도 건립돼 기뻐"

    출처: 연합뉴스

    일본 "'강제 동원' 문구 안 돼"‥27년 만에 건립

    민단 나가사키 본부는 1994년 5월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 건립을 위해 나가사키시에 장소 제공을 요청했지만, 평화공원 재정비 공사를 이유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좀처럼 진척을 보이지 않던 위령비 건립은 2011년 3월 한국원폭피해자협회가 나가사키시에 건립 진정서를 내고, 이듬해 11월 주후쿠오카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장소 제공을 요청하면서 본격 추진되기 시작했습니다.

    2013년 7월에는 민단 나가사키 본부를 중심으로 건립위원회가 결성됐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나가사키시 측이 한국인 원폭 희생자가 발생한 역사적 배경인 강제 동원 관련 비문 내용과 위령비 크기 등에 문제를 제기하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끈질긴 교섭 끝에 지난 3월에서야 부지 제공 승인이 났고, 지난달에는 비문 문구 등에 대한 세부 협의도 마쳤습니다.

    비문 내용에는 시 당국이 반대한 '강제 동원'이라는 문구 대신 '본인의 의사에 반해'라는 표현을 넣는 것으로 절충했습니다.

    위령비 안내문에는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본인의 의사에 반해 노동자, 군인 및 군무원으로 징용, 동원되는 사례가 증가했다"며 한국인 원폭 희생자가 발생한 배경이 설명돼 있습니다.

    위령비 크기도 건립위는 당초 높이 3.5m로 만들려고 했지만, 나가사키시의 의견을 받아들여 3m로 낮췄습니다.

    나가사키시 평화공원 한쪽 구석에는 1979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과 일본 시민단체 주도로 건립된 작은 크기의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있지만,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재일민단 주도로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가 건립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World Now] 76년 만의 위령비‥"한국인 희생자 1만명, 이제라도 건립돼 기뻐"

    사진 제공: 연합뉴스

    "아직도 기억 생생‥이제라도 건립돼 기쁘다"

    "'펑'하고 엄청난 소리가 나서 나가 보니 하늘이 온통 검은 구름이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원자폭탄이라고 하더라."

    어느덧 아흔 다섯이 된 권순금 할머니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시에 원폭이 투하됐을 당시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권 할머니는 '한국인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을 하루 앞둔 5일 나가사키시 자택에서 한국 언론 도쿄특파원들과 만났습니다.

    그는 원폭 투하 지점에서 1.8㎞ 떨어진 집에 있다가 피폭됐습니다.

    당시 엄청난 화재가 발생해 몸이 불에 타 그을린 사람들이 많았고, 강에는 시체가 무수히 떠내려갔다고 합니다.

    나가사키시에 있다가 피폭된 권 할머니의 여동생 2명도 숨졌습니다.

    피폭자는 모두 '언제 증상이 나올까' 걱정을 안고 살아왔고, 권 할머니 자신도 무릎이 안 좋아 일어나기 힘들어졌을 때 '원폭 때문인가' 생각했다고 합니다.

    500m 상공에서 폭발한 나가사키 원폭으로 약 7만4천 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수천 명∼1만 명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 출신으로 추정됩니다.

    권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나가사키시에는 원폭 투하 당시 7만 명의 조선인이 있었고, 이중 2만 명이 피폭해 1만 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 중에는 일제에 의한 강제 동원된 노동자도 많았습니다.

    1926년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난 권 할머니는 4살 때 어머니에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왔고, 나가사키시에 정착한 것은 15살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와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를 모아 건설 현장 숙소를 운영했고, 권 할머니도 당시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아버지와 함께 일하던 11세 연상의 남편을 만나 18살 때 결혼했습니다.

    할머니의 남편인 조연식 전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나가사키 지방본부 단장은 1971년부터 몸 상태가 안 좋아졌고, 1983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위령비 건립을 주도한 강성춘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나가사키현 지방본부 단장도 "재일 한국인 동포의 손으로 염원이던 나가사키 원폭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를 드디어 건립했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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