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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진의 세계는] 우크라이나 위기, 미국이 뿌린 씨앗인가?

[권희진의 세계는] 우크라이나 위기, 미국이 뿌린 씨앗인가?
입력 2021-12-12 12:21 | 수정 2021-12-12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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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희진의 세계는] 우크라이나 위기, 미국이 뿌린 씨앗인가?

    [사진 제공: 연합뉴스] 도열한 우크라이나 병사들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반대했던 미국

    1991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해체된 뒤,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지도자 고르바초프와 러시아 초대 대통령 옐친은 15개국으로 구성된 느슨한 형태의 연방을 구상합니다.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 구상엔 우크라이나가 핵심이었습니다.

    러시아 다음 2번째로 인구가 많은 슬라브 국가인 우크라이나 없이는 연방 구성이 불가능하니까요.

    하지만 그건 그들의 생각이었을 뿐,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강력하게 원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미국도 당시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지 않고 연방에 남기를 바랐다는 점입니다.

    91년 아버지 부시는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하려들면 미국이 지원하지 않겠다는 연설을 당시 소련에서 할 정도였으니까요.

    우크라이나에 잔뜩 남아있던 옛 소련 시절 핵무기가 미국이 독립을 반대한 원인이었습니다.

    핵을 가진 우크라이나가 독립 후 유고슬라비아 같은 내전에라도 휩싸인다면 미국이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민투표 결과 90% 이상이 독립을 지지하면서 우크라이나는 연방에서 떨어져나와 독립을 하게 되고 이는 노미노처럼 다른 소비에트 연방국가들의 이탈로 이어지면서 결국 소련은 해체됐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비극, 막강한 핵무기

    미국의 의도에 반해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즉시 서방의 위협이 됐습니다.

    1900개의 핵탄두와 2500개의 전술 핵무기 보유한 핵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미사일 개발 능력도 탁월해서 1962년 쿠바에 배치됐던 소련 미사일이 모두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됐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중국, 프랑스, 영국을 넘어서는 3번째 핵보유국이었는데, 이 때문에 미국은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우크라이나의 핵무기가 당시 미국의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이라고 봤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크라이나의 핵을 제거하거나 러시아로 옮기자는 데에 러시아와 미국의 이해가 모처럼 일치하게 된 거죠.

    미국은 차라리 러시아가 핵을 갖고 있는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던 92년 5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두고 충돌합니다.

    크림반도 세바스토폴의 러시아 흑해함대 문제로 양 측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고, 심각한 안보위기를 느낀 우크라이나는 핵 미사일을 포기하는 댓가로 경제 지원, 공식 영토 확정, 안보 보장 등을 요구하게 됩니다.
    [권희진의 세계는] 우크라이나 위기, 미국이 뿌린 씨앗인가?

    [사진 제공: 연합뉴스] 행진하는 러시아 군대

    미국의 관심에서 멀어진 우크라이나

    이후 94년 12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러시아, 영국,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이른바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체결합니다.

    핵을 포기하는 대신 이들이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양해각서'였을 뿐 구속력있는 '협정'이 아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만약 '안전보장 협정'이었다면 러시아가 이를 어기면서까지 2014년에 크림반도를 침공하긴 어려웠을 겁니다.

    우크라이나도 이 양해각서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울며 겨자먹기로 여기에 서명을 합니다.

    경제는 붕괴 위기 직전이고, 미국과 러시아의 압박이 거센 상황에서 여기에 서명 안하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경제지원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핵위험이 사라진 우크라이나는 이제 더이상 미국의 중요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별다른 안전보장 장치 없이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 어정쩡하게 놓이게 된 우크라이나는 국내 정치적으로도 혼란을 겪었고, 점점 러시아가 눈독들이기 좋은 상황으로 빠져 늘어갔습니다.
    [권희진의 세계는] 우크라이나 위기, 미국이 뿌린 씨앗인가?

    [사진 제공: 연합뉴스] 지난 9월 백악관에서 정상회담하는 바이든(오른쪽)과 젤렌스키

    푸틴의 야욕 앞에 놓인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했어도 러시아는 여전히 자국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럽을 향한 지정학적 관문이자, 러시아의 발원지와도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99년 12월 31일, 푸틴 대통령이 취임합니다.

    KGB 요원 출신의 푸틴은 옐친과는 달리 예전 소련의 광대한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생각으로 가득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포석으로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전쟁까지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동유럽 국가를 나토로 끌어들이던 미국이 2004년에는 발틱 3국과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 4국을 나토에 가입시킨 겁니다.

    푸틴의 분노와 우크라이나의 위기

    이는 나토의 동진이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명백한 신호였고, 나름의 성의를 배반당한 푸틴은 이를 엄청난 모욕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크라이나는 더욱 위험해지게 됐죠.

    미국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2008년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아예 나토에 가입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막판에 '이들의 나토 가입을 약속한다'고 입장을 바꾸면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좌절됩니다.

    그리고 푸틴은 곧바로 조지아를 침공했습니다.

    여기엔 미국에 대한 푸틴의 분노가 한 몫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되자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그러던 2014년 '마이단 혁명'으로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권이 들어서자, 푸틴은 이제 드디어 우크라이나에 붙은 크림반도를 침공합니다.

    그리고 러시아 국경쪽 돈바스 지역의 분리독립을 배후에서 지원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끝없는 내전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2014년 4월부터 계속되는 이 돈바스 내전으로 13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난민이 속출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이렇게 분쟁 지역이 돼버렸습니다.

    여기에 지금은 동부 국경지역에 대규모 러시아 병력까지 집결해 전쟁을 앞둔 상황에까지 처했습니다.
    [권희진의 세계는] 우크라이나 위기, 미국이 뿌린 씨앗인가?

    [사진 제공: 연합뉴스]

    나토가입 요구와 미국의 부채 의식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무엇보다 원하는 것은 나토 가입을 통한 안전 보장입니다.

    하지만 이는 우크라이나에게 절실한 만큼이나 러시아로선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핵을 제거한 뒤 우크라이나를 대책없이 내버려뒀던 미국으로선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한 원죄를 느끼고 있을테지만 그렇다고 러시아의 반발을 무릅쓰며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킬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죠.

    미국에게도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대만과 함께 2개의 거대한 전선을 만든 셈이 됐습니다.

    우크라이나가 핵 포기의 댓가로 명확한 안전보장 장치를 요구했을 때, 미국이 이를 들어줘 러시아가 침공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앴더라면 우크라이나의 지금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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